50화. 거기 누구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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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거기 누구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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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거기 누구 있어?
2023.07.24.
독성이 있는 맨트랩의 넝쿨은 붉은빛을 띠었다. 지난 토벌에서 에드윈을 공격했던 맨트립이 그러했다.
초록색 넝쿨인 걸 보면 일단 독성은 없다는 건데…….
맨트랩의 약점은 넝쿨이 나오는 하단부가 아닌 상단부 정중앙이었다. 그곳에 자리한 맨트랩의 ‘입’이라 불리는 곳에 검을 깊숙이 찔러넣어야만 죽일 수 있었다.
“로즈벨리아, 뭐 해! 어서 피하지 않고!”
루카스의 다급한 목소리에도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어차피 맨트랩을 죽이려면 누군가는 바위 뒤로 가야 했다.
이왕이면 쉽게 가는 편이 낫겠지.
코앞까지 다가온 넝쿨이 허리께로 내려가려는 찰나, 덥석 넝쿨을 잡아챘다. 움찔거린 넝쿨은 이내 내 팔을 얽어매듯 감싸왔다.
맨트랩이 넝쿨을 당기자 허공에 붕 뜬 내 몸도 서서히 바위 쪽으로 가까워졌다.
“조금만 더…….”
바위 뒤에 있는 맨트랩의 모습이 보이자 내 팔을 결박하고 있던 넝쿨을 단숨에 베어냈다. 3m 높이에서 그대로 추락했다.
누군가 내지르는 비명을 뒤로한 채, 나는 맨트랩의 입에 시선을 고정했다.
재차 날아드는 넝쿨을 베어내고 그대로 맨트랩의 입에 검을 깊숙이 꽂아 넣었다.
“로즈벨리아 경!”
“로즈벨리아, 괜찮아?”
차례로 리나트와 루카스였다. 그 뒤로 족히 열 명은 되어 보이는 기사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그들의 얼굴엔 하나같이 걱정 어린 기색이 가득 담겨 있었다.
“보다시피 멀쩡해.”
진액을 내뿜은 채로 축 늘어진 맨트랩의 사체와 나를 번갈아 보던 루카스가 허탈하다는 듯 웃었다.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너 지난 토벌에서도 이랬다가 에드윈한테 혼났던 거 기억 안 나?”
축 늘어진 맨트랩의 사체를 보니 서서히 실감이 났다.
토벌을 떠나기 전, 나는 기억을 더듬어 마수와 싸우던 로즈벨리아의 모습을 반복해서 떠올렸었다.
로즈벨리아의 행동을 암기라도 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로즈벨리아처럼 대처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었다고나 할까.
그게 통하긴 통했네.
“정말 대단하십니다, 로즈벨리아 경. 보통 실력자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일단 이곳을 벗어나는 게 좋겠습니다.”
찬양에 가까운 말을 늘어놓는 수호기사단 기사와는 다르게 리나트의 음성은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기분이 안 좋은 건가?
차갑게 굳어 있는 리나트의 얼굴을 살핀 나는 빠르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바위 앞쪽으로 돌아오니 가장 먼저 피에르가 보였다. 어느덧 몸을 일으킨 그는 머리에 붙은 풀을 떼어내며 무어라 중얼대고 있었다.
“피에르 경, 로즈벨리아에게 감사 인사라도 하시죠?”
루카스가 건넨 말에 피에르는 이죽거리며 대답했다.
“빨리 구해줬으면 피차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뭐라는 거야, 지금.
소리에 민감한 맨트랩 앞에서 소리를 지른 게 누군데.
“맨트랩이 소리에 민감해서…….”
“그리고 같은 토벌대인데 서로 돕는 게 당연한 거지. 좀 도와줬다고 생색내는 겁니까?”
사고방식이 아주 기발하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내 옆에 서 있던 루카스도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토벌대끼리 서로 돕는 건 당연한 일이죠. 그런데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을 때 감사를 표하는 건 사람으로서 기본 예의 같은데요.”
피에르의 행태를 보다 못한 수호기사단의 기사가 참견하고 나섰다. 아까 내게 칭찬을 늘어놓았던 그 기사였다.
“피에르 경은 작년에도 토벌에 참여한 걸로 기억하는데, 독도 없는 맨트랩 넝쿨 하나 제대로 베어내지 못하면서 대체 여긴 왜 온 겁니까?”
거기에 루카스의 직언까지 더해지자 피에르가 샐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 왔겠습니까. 마수를 토벌하려고 왔죠.”
거꾸로 매달렸으니 넝쿨을 베어내는 건 쉽지 않았을 수 있다. 하지만 맨트랩에게 공격당한 이후, 도망치지도 못하고 바닥에 웅크리고만 있던 건 다소 의아했다.
마수 토벌에 참여하는 건 실력 있는 기사들의 자부심과도 같았다.
섣부르게 나섰다가 화를 입는 경우는 많이 봤어도 피에르처럼 지나치게 겁을 먹었던 기사는 없었던 거 같은데…….
맨트랩 정도의 마수도 무서워하면서 굳이 자원해서 이곳에 올 이유가 있나?
라일리 가문은 매번 토벌에 참여해서 자원하는 기사들이 넘쳐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
“이만 이동하죠. 여기서 더 꾸물거리다간 해가 지겠습니다.”
리나트가 상황을 정리하고 나서자 수색대는 다시 대열을 갖추었다. 나는 여전히 피에르의 뒤통수를 쏘아보는 루카스의 팔을 툭툭 건드렸다.
“앞으로 계속 같이 다녀야 하니까 그쯤 해, 루카스.”
“알았어.”
루카스는 순순히 내 말을 따랐지만, 도리어 피에르에게 시선이 붙잡힌 건 나였다.
마수와 싸우는 것에 열의를 보이는 것도 아니고, 쓸데없이 짐은 많고…….
대체 뭘까?
*
“반대편은 어땠느냐.”
“웨어보어의 사체를 발견했어요. 단장님이 가신 쪽은요?”
“스콜피온의 사체가 있었는데 무언가 이상하더구나.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검은빛이 아니라 붉은빛을 띤 스콜피온이었다.”
“붉은빛이면…….”
지난 토벌을 되짚어보았을 때, 붉은빛은 그다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일반 슬라임과 다르게 지난 토벌에서 처음 나타난 레드슬라임이 오러를 사용해야만 죽일 수 있었던 것처럼, 마수의 신체에 붉은색이 가미되면 보통은 이전보다 더욱 강해지곤 했으니까.
“살아있는 채로 맞닥뜨렸다면 큰 사상자가 나올 수도 있었겠지.”
“좀 이상하지 않으세요?”
“뭐가 말이냐?”
“토벌대가 상대하기 녹록지 않은 마수들만 죽어 있는 거 말이에요.”
이 산을 돌아다니다가 불행히도 그런 마수들만 마주쳤을 수 있겠지만, 그저 우연이라고만 치부하기엔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이상한 걸 꼽자면 끝도 없겠지만 이번 일은 나도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가 없구나.”
적어도 이 산에 나 말고 다른 소드마스터가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단장님이 봤다던 스콜피온 말이에요. 죽은 지 꽤 시간이 지났던가요?”
“그래. 우리가 발견한 게 한낮이었는데 죽은 지 대략 몇 시간은 지난 듯했다.”
대략 몇 시간은 지난 듯했다고…….
가브리엘과 얘기를 나누고 돌아온 이후에도 나는 내내 그 생각에 붙잡혀 있었다.
내가 짐작하는 대로라면, 강한 마수만 상대하는 신원불명의 소드마스터가 움직이는 건 토벌대가 잠든 밤이나 새벽이었다.
그러니 낮에 이동하는 산길에서 죽은 지 족히 몇 시간은 되어 보이는 마수의 사체를 발견한 거겠지.
‘누군가 저희가 갈 길을 미리 알고서 마수를 죽여놓는 것도 아닐 테고…….’
‘어제는 스콜피온에 오늘은 웨어베어까지. 힘이 드는 놈들만 쏙쏙 골라서 죽여놓으니 얼마나 편합니까.’
따지고 보면 피에르가 터무니없는 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토벌대보다 앞서서 가되, 토벌대와는 마주치지 않게 새벽에 움직이고, 토벌대가 상대하기 힘든 마수 위주로 처치한다?
나는 잘게 떨리는 눈꺼풀 위로 팔을 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여기 있을 이유가 없는데.
왜 나는 자꾸 너를 떠올리게 되는 걸까.
“대체 누굴까.”
누군지 확인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 생각이 스쳐 지나가기 무섭게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만약 이곳에 와 있는 게 이안 너라면…….
나는 너를 만나야겠어.
*
“황자님, 언제까지 위에 계실 거예요?”
단단한 나무 위에 올라서 있던 이안이 아래를 흘긋 내려다보았다.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셔야 할 텐데.’
빽빽한 잎사귀에 가려져 네이슨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속마음만큼은 또렷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이제 내려갈 거야.”
“저희는 어디에 머물까요?”
“아까 봐둔 곳이 있어.”
이안은 건성으로 대답하곤 지척에 있는 불빛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 끝에는 토벌대의 진영이 있었다.
이미 늦은 시각이라 불침번의 움직임만 간혹 보일 뿐인데, 왜인지 눈을 뗄 수 없었다.
“어제처럼 그냥 가까운 곳에서 보시지. 오늘은 너무 떨어져 있지 않아요?”
이안은 대답 대신 옅은 한숨을 흘렸다. 어제는 이보다 조금 더 가까이 갔다가 수호기사단 기사들의 속마음을 들었었다.
‘리나트였던가. 수호기사단의 부단장과 로즈벨리아를 엮었었지.’
수호기사단 기사들은 리나트가 로즈벨리아에게 마음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눈에 그렇게 보였다면, 눈에 띄게 챙기긴 했다는 건데.’
잇새에 절로 힘이 실렸다. 이 빌어먹을 저주만 아니었다면, 자신이 로즈벨리아 곁에 있었을 거다.
그녀를 챙기는 건 리나트가 아니라…….
“나였어야 했는데.”
메마른 손으로 눈가를 매만지던 이안은 토벌대 진영 쪽에서 힘겹게 시선을 떼어냈다.
“황자님, 아까 보니까 근처에 샘이 있던데요.”
‘조금 씻고 싶긴 한데 위험하려나?’
이안은 까마득히 높은 나무 위에서 단번에 뛰어내렸다. 그러곤 다소 놀란 듯한 네이슨에게 앞장서라는 눈짓을 보냈다.
“나도 피를 좀 씻어야 할 거 같아서.”
이안이 덧붙인 말에 네이슨의 얼굴 위로 화색이 번졌다.
“이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네이슨의 말대로 근처에 제법 맑은 샘이 있었다. 가장자리에 발을 밀어 넣자 차가운 감각이 전신에 퍼졌다.
“어우, 차가워. 저는 다 씻었어요.”
“벌써?”
기껏해야 고양이 세수하려고 여길 오자고 한 건가?
“여기 벗어두신 상의는 제가 챙겨갈게요. 천천히 씻고 나오세요.”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던 이안은 샘의 한가운데로 몇 발자국 더 내디뎠다. 찰랑거리는 샘물이 금세 허리춤까지 차올랐다.
한 걸음만 더 나아가려는 찰나, 뒤쪽 수풀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거기, 누구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