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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소드마스터의 흔적 (49/54)


49화. 소드마스터의 흔적
2023.07.20.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토벌대는 암석으로 둘러싸인 평평한 땅에 진을 쳤다. 몇몇 백색기사단 기사들이 주변을 정찰하러 떠난 사이, 간단한 식사가 준비됐다.

나는 삼삼오오 모여 있는 토벌대를 둘러보았다. 백색기사단을 제외한 다른 기사들의 얼굴에서는 이미 긴장감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대부분의 마수는 산의 중턱에 있는 붉은 샘 근처에 분포해 있어, 산의 초입은 토벌이 비교적 수월한 편이라지만…….

벌써 긴장을 늦추면 안 될 텐데.


“그나저나 누가 죽인 걸까요?”

“스콜피온? 두 마리가 서로 싸우다가 그렇게 된 거 아니야?”

“검으로 벤 흔적이 있었잖아요.”

모여 있는 이들마다 스콜피온의 사체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나는 어디에도 끼지 않고 따로 떨어져 앉아 곰곰이 생각했다.

사체에는 대각선으로 베인 흔적이 있었다. 머리와 몸통이 이어지는 부분이었으니 비교적 약한 외골격을 공격한 것도 아니었다.

일반 검으로 스콜피온의 단단한 외골격을 깔끔하게 베어내려면…….

방법은 단 하나다.

바로 오러를 사용하는 것.


“대체 누가…….”

토벌대는 모두가 함께 움직였으니 토벌대에 속한 이는 아닐 터였다. 그렇다면 이 산에 검을 쓸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사체에서 오러의 기운이 느껴졌으니 일반 검사가 아니라 오러를 운용할 수 있는 소드마스터라는 거고.

내가 알기론 제국에 소드마스터는 로즈벨리아뿐…….


“아니지.”

한 명 더 있긴 했다. 그 얼굴을 떠올리려는 찰나, 뒤편에서 자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자갈을 밟는 소리인 거 같은데?

걸터앉아 있던 통나무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로즈벨리아, 여기 있었느냐.”

“네, 단장님.”

기척을 숨기지 않고 다가온 이는 가브리엘이었다. 그는 말없이 커다란 암석 뒤편을 가리키며 따르라는 눈짓을 보내왔다.

가브리엘의 뒤를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암석 뒤편에 나무가 우거진 숲길에 다다라서야 멈춰 선 가브리엘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네가 보기엔 어땠느냐.”

“스콜피온의 사체요?”

“그래.”

“오러가 아니라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미약하게나마 오러의 기운을 느끼기도 했고요.”

“나도 그럴 거라고 추측은 했다만…….”

수염을 매만지는 손길이 몇 번이나 멈칫거렸다. 생각에 잠긴 듯한 가브리엘의 얼굴 위로 혼란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 산에 저희 말고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거잖아요.”

“그렇겠지. 그런데 왜 마수를 처치했는지 의문이구나. 게다가 이 제국에 너 말고 다른 소드마스터가 있다는 건데, 그것도 좀처럼 믿기지 않는구나.”

원작에서 로즈벨리아와 이안을 제외한 다른 소드마스터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이안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었다.

토벌에 참여하고 싶었다면 토벌대로 합류하면 될 텐데 굳이 단독행동을 한다고?

그것도 마수가 득실대는 이 산에서?


“누가,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 짐작조차 못 하겠어요.”

“내일부터는 토벌대를 반으로 나누어 수색할 것이니 너는 리나트와 함께 가거라. 행여 내일도 마수의 사체를 발견한다면 네가 잘 살펴봐야 한다.”

“알겠습니다.”

나는 정찰대의 보고를 기다리겠다는 가브리엘을 남겨두고 먼저 토벌대의 진영으로 돌아왔다. 아까 앉았던 기다란 통나무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는데, 시야에 불쑥 리나트가 들어왔다.


“로즈벨리아 경.”

“네, 부단장님.”

“아직 식사 전이시죠?”

대답하기도 전에 리나트가 내게 은제 그릇을 내밀었다. 그가 건넨 건, 포도주에 담긴 빵 조각이었다.

식량으로 챙겨온 빵은 수분기 없이 단단해서 포도주나 물에 불려야 먹을 수 있었다. 맛이랄 건 없지만 적어도 허기는 달랠 수 있는, 전형적인 전투식량이었다.


“감사합니다. 부단장님은 안 드세요?”

“저는 먹었습니다.”

“그럼 쉬시지 않고요.”

좀처럼 통나무가 보이지 않아 비교적 평평한 암석에 걸터앉자 리나트가 자연스레 따라 앉았다.


“경께서 식사하는 동안 말동무라도 되어드릴까 해서요.”

부담스럽다고 하면 상처받으려나?

싱긋 웃는 얼굴을 마주한 나는 입안에 맴도는 말을 꾹 삼켜냈다.


“아, 네. 부단장님께서는 배려심이 많으시네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나저나 백색기사단 기사들은 확실히 토벌에 능하더군요. 반응 속도가 다르다고 해야 할까요. 솔직히 감탄했습니다.”

“아무래도 매년 참여해왔으니까요.”

“마수에 대한 수업을 듣고 왔는데도 막상 마수를 마주하니 당황하게 되더군요.”

“토벌에서는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한 거 같아요. 마수에게 당하는 건 순식간이거든요.”

적어도 내가 본 기억에서는 그랬다. 평범한 숲길이어도 경계를 늦춰선 안 되고, 매사 경계해야 했다.

불침번을 서는 인원도 최소 열 명 정도는 되어야 했다. 마수가 급작스럽게 습격해오더라도 제대로 대응해야 하니까.


“그렇군요. 저희 기사들에게도 철저히 일러두겠습니다.”

“그만 일어날까요?”

대충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려는데, 리나트가 대뜸 자그마한 주머니를 건네왔다.


“받으십시오.”

“이게 뭔데요?”

주머니 안에는 바짝 말린 크랜베리가 들어 있었다. 육포는 챙겨왔다고 들었는데 과일 말린 게 전투식량에 있었던가?


“데이지가 챙겨준 겁니다.”

데이지가 준 거라고?


“그럼 부단장님이 드셔야죠.”

“제 건 따로 있습니다. 이건 경의 몫으로 챙겨준 겁니다.”

연분홍빛 색감에 화려한 자수까지 들어간 주머니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슬쩍 웃음이 나왔다.

누가 봐도 데이지 거긴 하네.


“한번 드셔보십시오.”

크랜베리를 하나 꺼내 들어 베어 물자 입안 가득 상큼한 향과 함께 단맛이 퍼졌다.


 


“맛있네요.”

입매가 절로 부드럽게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나를 빤히 보는 듯하던 리나트의 눈동자에 이채가 어린 건 그때였다.

내 얼굴에 뭐가 묻기라도 한 건가?

입을 뗄 새도 없이 리나트는 돌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럼 저는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갑자기 왜 저러지?

다급하게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크랜베리를 하나 더 집어 먹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

마수의 사체는 다음 날에도 어김없이 발견되었다. 키가 3m는 족히 넘는 웨어베어 세 마리의 사체였다.


“정말 이상하네요.”

“누군가 저희가 갈 길을 미리 알고서 마수를 죽여놓는 것도 아닐 테고…….”

웨어베어는 일반적인 곰보다 조금 더 사람의 형체와 비슷하고, 늘 두 발로 서서 걸으며, 두 눈이 섬뜩하리만큼 붉었다.

게다가 가죽이 훨씬 질겨 한 번에 여러 명이 달려들어 치명상을 입혀야 제압할 수 있는 마수였다.

사체를 보아하니 죽은 지 꽤 된 건가?

그래서인지 오러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오러가 아니라면 웨어베어의 죽음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검에 베인 흔적이 일정한 걸 봐선 여러 사람이 달려든 게 아니라 한 사람이 처치했다는 건데.

소드마스터가 아니고서야 웨어베어 세 마리를 혼자서 상대하기란 불가능했다.


“대체 누가 마수를 죽이는 걸까요? 로즈벨리아 경은 어떻게…….”

“누군가 마수를 처치했다면 우리에겐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리나트의 말을 끊은 건, 라일리 가문의 기사였다. 이름이 피에르라고 했던가.

오늘부터는 낮 동안 토벌대가 두 무리로 나누어져 토벌에 임해야 했다.

하필 라일리 가문의 두 기사와 마수 연구원까지 같은 무리에 속해 괜스레 신경이 쓰였는데…….

어제부터 태평한 소리를 잘도 하네.

헛웃음을 흘리는 사이 리나트가 피에르 앞에 섰다.


“피에르 경이라고 했던가요.”

“그렇소만.”

“이 산에 토벌대가 아닌 신원 불명의 다른 누군가 있다는 건데, 그 사람이 마수를 죽였다고 해서 우리 편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적의 적이면 같은 편이 되는 거지요. 우리 대신 마수를 처치해주니 같은 편이라고 볼 수 있는 거 아닙니까?”

피에르는 마치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는 사람처럼 으스댔다. 그러곤 심지어 커다란 바위에 떡하니 몸을 기대기까지 했다.


“피에르 경, 지금은 토벌 중입니다.”

“이 중에서 그거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까?”

네가 모르는 거 같은데.

나는 한심하다는 눈빛을 쏘아주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가하게 기댈 때가 아니란 뜻입니다.”

피에르의 행동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는지 리나트의 목소리에도 화기가 어렸다.


“어제는 스콜피온에 오늘은 웨어베어까지. 힘이 드는 놈들만 쏙쏙 골라서 죽여놓으니 얼마나 편합니까.”

스콜피온과 웨어베어라.

굳이 공통점을 찾자면 피에르의 말대로 손이 많이 가는 마수긴 했다.


“솔직히 이렇게 편한 토벌은 처음……. 으악!”

여유가 가득 담겨 있던 목소리가 찰나 괴성으로 변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한눈을 판 사이, 피에르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로즈벨리아 경, 맨트랩입니다!”

리나트의 외침에 다시 살펴보니 넝쿨에 다리를 붙잡힌 채로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피에르가 보였다. 길게 늘어진 넝쿨은 바위 뒤로 연결되어 있었다.


“로즈벨리아, 맨트랩은 바위 뒤에 있어.”

검을 꺼내 들고 재빠르게 내 옆으로 다가온 루카스가 말했다.


“어서 이 넝쿨을 베지 않고 뭘 하는 겁니까!”

피에르가 소리치자 기다란 넝쿨이 그의 몸을 더욱더 꽉 조였다.

하여간 도움이 안 돼.

발소리를 죽인 채로 피에르에게 가까이 다가간 나는 가볍게 뛰어올라 넝쿨을 베어냈다. 쿵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진 피에르는 그대로 몸을 웅크렸다.


“비켜요! 거기에 있다간 또…….”

“로즈벨리아 경!”

다급한 외침에 고개를 돌렸다. 단단한 넝쿨이 이번엔 내 쪽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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