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버려진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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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버려진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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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버려진 산
2023.07.17.
토벌대는 하루를 꼬박 달려 ‘버려진 산’이 있는 백작령에 다다랐다.
“성벽 밖은 처참하군요.”
주위를 둘러보던 리나트가 음울한 낯빛으로 말했다. 간간이 보이는 민가는 폐허에 가까웠고 경작지 또한 엉망이었다.
“성벽 밖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성벽 안은 그래도 좀 나아요.”
“그렇습니까.”
무어라 대답하려는 찰나, 성벽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진입로가 보였다. 선두에서 토벌대를 이끄는 가브리엘은 이미 진입로를 통과하고 있었다.
꽤 높게 쌓인 성벽 안으로 들어서니 수십 채의 민가가 있었다. 토벌대임을 알아본 이들이 길을 비켜주자 가브리엘이 다시 속력을 높였다.
“백색기사단 단장님이십니까?”
본성 앞을 지키던 문지기가 물었다. 성벽 자체도 높은 편이었는데, 영주가 머무는 본성은 높이가 까마득할 정도로 위압적인 모양새였다.
“그렇네.”
가브리엘이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춰 세우자, 요란하던 말발굽 소리가 일순간에 잦아들었다.
“들어가십시오.”
가브리엘의 손짓에 토벌대가 일제히 말에서 내렸다. 그 사이 문지기 두 명이 양쪽에서 성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어서들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건, 이 성의 영주인 클로이 백작이었다. 백작 옆에는 로즈벨리아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얼굴들이 있었다.
“단장님 오셨습니까.”
“다들 고생이 많았겠구나.”
백색기사단에서 백작령으로 파견 나온 기사들이었던가?
작년 이맘때쯤 로즈벨리아가 마주했던 얼굴들보다는 살짝 야윈 듯했지만, 다행히 모두 멀쩡해 보였다.
“저희가 자처해서 온 건데요. 그나저나 단장님은 어째 더 젊어지신 거 같아요.”
흰 수염을 쓸어내리며 허허 웃던 가브리엘은 이내 토벌대를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밤낮없이 달리느라 다들 고생 많았다. 내일 해가 뜨기 전에 산에 오를 것이니, 오늘은 이곳에서 푹 쉬도록.”
“만찬을 준비해두었으니 식사를 먼저 하실 분들은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말 고삐는 이쪽으로 주십시오.”
식사를 안내하는 집사부터, 기사들에게 말 고삐를 받아 마구간으로 이동하는 하인들까지. 백작성의 사용인들은 토벌대를 맞이하는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로즈벨리아, 오랜만이네.”
“그러게요. 선배님. 잘 지내셨죠?”
내게 말을 건넨 이는 이마에 긴 상처가 있는 남자였다.
기사단 선배인 건 확실한데……. 이름이 올리버였던가?
“에드윈은 왜 안 왔어? 설마 토벌 명단에 못 든 거야?”
“명단에는 들었는데 사정이 좀 있었어요.”
“무슨 사정?”
“그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얘기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바네사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바네사는 나와 올리버 사이에 불쑥 끼어들며 말했다.
“올리버 선배님, 회포는 나중에 풀고 식사부터 하면 안 될까요?”
바네사는 허기진 사람처럼 배를 움켜쥐곤 내게 무언의 눈짓을 보냈다.
얼른 안으로 들어가자는 건가?
“맞아요, 저희 여기 오는 동안 먹은 거라곤 빵이 전부였거든요.”
“그랬어? 배고팠겠네. 얼른 밥부터 먹으러 가.”
아, 생각났다.
올리버는 수다가 끝이 없는 걸로 악명이 자자했던 선배였다. 그래서 에드윈과 아웅다웅하면서도 제법 죽이 잘 맞았었지.
“가자, 로즈벨리아.”
바네사의 뒤를 따라 들어선 식당에는 제법 호화로운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음식들을 눈으로 쭉 살펴보던 그녀가 내게로 몸을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지난 토벌 때보다 식사가 안 좋아진 거 같지?”
“그럴 만해요. 성벽 밖이 아주 엉망이었잖아요.”
“하기야 수도 외곽의 마을까지 마수가 나타났으니 이곳은 더하면 더했겠지. 이만 앉을까?”
바네사가 눈짓으로 가리킨 자리에 앉자 하인이 따뜻한 수프를 가져다주었다.
몇 숟갈이나 들었을까.
“저기, 로즈벨리아 경.”
부름이 들려온 곳은 바로 옆자리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조금 전까지 비어 있던 옆자리에 앉아있는 콘라드가 보였다.
무슨 할 말이 있냐는 듯 눈썹을 들어 올리자 콘라드가 긴장한 듯한 낯빛으로 입을 열었다.
“내내 사과드리고 싶었습니다.”
“뭘요?”
“로즈벨리아 경에게 무례하게 군 것에 대해서요.”
아아, 참 빠르기도 해라.
“그때 제게 그러셨죠. 여기사가 생긴 걸 이해할 수 없다고. 남자가 여자보다 약할 리가 없는데, 여기사를 뽑아서 대체…….”
“제가 무지했습니다. 일찍이 사과드렸어야 했는데, 경의 수련을 차마 방해할 수 없었습니다. 솔직히 말을 걸기도 쉽지 않았고요. 하지만 내내 진심으로 사과드리고 싶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콘라드가 내게 허리를 굽혀 보였다. 사실 그 일은 이미 잊힌 터라, 콘라드의 사과를 굳이 안 받아줄 이유는 없었다.
지난번에 황궁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았을 때, 선뜻 대답해주었던 일도 있고.
“그 사과 받아들이죠.”
“예?”
“토벌까지 같이 온 마당에 지난 일에 얽매여봤자 피차 좋을 게 없잖아요.”
“그……렇죠.”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나를 보는 콘라드에게 식사를 마저 하라는 듯 손을 들어 보이곤, 찬찬히 식당 내부를 둘러보았다.
스무 명이 넘는 백색기사단 기사들, 열 명 남짓의 수호기사단 기사들, 황실에서 온 마수 연구원 한 명을 제외하고 남은 이들은 귀족 가문에서 차출된 상급 기사들이었다.
황명에 따라 자작 이상의 귀족 가문은 격년에 한 번, 최소 1명 이상의 상급 기사를 토벌대에 보내야 했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그게 바로 라일리 가문이었다.
라일리 대공가는 해마다 자원해서 상급 기사 둘을 보내왔고, 지난 토벌에는 수호기사단이 아닌 치안대가 왔으니까…….
토벌에 고정적으로 참여하는 건 백색기사단과 마수 연구원, 그리고 라일리 가문의 기사인 셈인가?
포도를 집어먹던 나는 라일리 가문에서 온 기사 둘을 유심히 보았다. 그들 옆에는 황실에서 온 마수 연구원이 앉아 있었다.
다른 기사들과 멀찌감치 떨어져 앉은 그들은 음식을 앞에 두고 저들끼리 쑥덕거리고 있었다.
저런 광경을 목격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들으면 안 되는 비밀 얘기라도 나누는 듯 저들끼리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로즈벨리아, 그만 올라가자.”
“네. 선배님.”
다른 이들과 다르게 저 셋만 유독 짐이 많은 것도 그렇고…….
마수 연구원의 짐꾸러미가 많은 건 이해할 수 있었다. 토벌에 나올 때마다 연구목적으로 쓰이는 ‘붉은 샘’의 물을 담아가곤 했으니까.
한데 토벌을 떠나온 기사들의 짐이 많을 이유는 뭘까?
묘하게 거슬리네.
*
다음 날 동이 트기 전, 성 밖으로 나온 토벌대는 ‘버려진 산’을 향해 행군했다.
“부단장님, 저 산이죠?”
“그런 거 같군.”
“버려진 산이라는 이름이 괜히 붙여진 게 아닌가 봐요.”
수호기사단 기사들의 말처럼 어딘가 스산한 기운이 감도는 산이었다. 산 자체는 넓지 않지만 높이는 꽤 있는 편이었다.
이 산에 사는 마물이 수도 외곽 근처에 있는 마을까지 왔다는 거지?
하기야 따지고 보면 이 산 자체도 수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니까.
산의 초입에 가까워졌을 무렵, 가브리엘이 몸을 돌려 토벌대를 바라보았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이 토벌의 목적은 넓은 반경을 살피며 최대한 많은 마수를 죽이는 것이다.”
가브리엘의 근엄한 목소리가 울리자 전운이 감돌았다. 그는 토벌대 한 명 한 명과 일일이 눈을 마주하며 뒷말을 이었다.
“산의 초입에서부터 정상까지 올랐다가 반대편으로 내려와야 하니, 지금보다 몇 배는 더 힘든 여정이 될 것이다. 마수가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니 항상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네.”
토벌대가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뚝 솟은 황량한 산을 올려다보는 모두의 얼굴에 비장감이 감돌았다.
“저게 뭐지?”
다소 무거운 듯했던 정적을 깨뜨린 건 바네사였다. 그녀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에 검은 형체의 무언가가 있었다.
저건…….
일순간 형체가 사라지더니 뒤이어 땅속이 움직이는 것처럼 들썩거렸다.
설마 스콜피온?
“다들 방어 태세를 갖추어라!”
“스콜피온이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마수로 모두가 혼비백산이었다. 처음 맞닥뜨린 마수가 하필 상대하기 까다로운 편에 속하는 스콜피온이라니.
“로즈벨리아!”
잠시 멍하니 서 있던 나는 가브리엘의 외침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검을 뽑아 들고 가브리엘의 뒤를 따르자, 어느새 땅속에서 튀어나온 스콜피온이 위협하듯 몸을 들어 올렸다.
족히 4m는 될 거 같은데.
스콜피온은 마치 우리를 위협하듯 집게를 달각거렸다.
이건 실전이다.
그 사실을 깨닫기 무섭게 검을 쥐고 있던 손끝이 빳빳해져 갔다.
“스콜피온의 약점은 잘 알고 있지?”
“네.”
스콜피온의 외골격은 단단해서 일격에 치명상을 입힐 수 없었다. 비교적 약한 외골격을 노려야 했다. 집게와 몸통이 이어지는 부분과 몸통 하단부에 자리한 부분이었던가.
가브리엘은 마치 곤충을 분류하듯 가슴과 배 사이라고 말하곤 했으니까 저기겠네.
나는 오소소 소름이 인 뺨을 어루만지곤 그 부분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일격에 끝내야 한다.”
“알겠습니다.”
공격할 틈을 가늠하듯 집게만 움직이던 스콜피온은 갑자기 모든 움직임을 멈추었다. 달각거리는 소리도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왜 저러는 거지?
스콜피온은 자신이 왔던 길을 돌아보는 듯하더니 그대로 땅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스콜피온이 그냥 가는데요?”
“설마 도망을 치는 걸까요?”
루카스의 물음에 가브리엘은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피하려고 했으면 처음부터 피했겠지. 공격할 것처럼 와서는 이렇게 도망을 친 적은 없었던 거 같은데…….”
“저도 처음 보는 장면입니다.”
어느새 곁에 다가온 마수 연구원이 말했다. 모두가 의아해하는 찰나, 라일리 가문의 기사가 불쑥 끼어들었다.
“처음이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떻습니까. 피를 묻히지 않게 됐으니 잘된 일 아닙니까.”
“과연 그럴까요? 이 산의 정상까지 올라야 하니 언젠가는 마주칠 텐데요. 차라리 일찍 처치해두는 편이 나았을지 모릅니다.”
리나트의 발언에 라일리 가문의 기사가 멋쩍다는 듯 헛기침을 했다.
“오늘은 일단 같이 움직이는 게 좋겠군.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그땐 인원을 반으로 나눠 수색하겠다.”
“예.”
가브리엘의 명에 따라 토벌대 모두가 함께 산을 오르는 동안, 비교적 크기가 작은 마수가 여러 차례 나타나긴 했지만 스콜피온처럼 대형급에 속하는 마수는 없었다.
“단장님, 이것 좀 보십시오!”
산의 초입에서는 어느 정도 벗어났다고 생각한 무렵, 앞서 걷던 루카스가 다급한 목소리로 가브리엘을 불렀다.
“이건…….”
“마수의 사체입니다.”
산의 초입에서 맞닥뜨렸던 그 스콜피온과 그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스콜피온의 사체가 있었다. 사체 앞에 모여 있는 이들을 헤치고 가까이 다가간 나는 절로 미간을 좁혔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내 착각이 아니라면 이건…….
오러의 기운이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나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사체에서는 미약하게나마 오러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