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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토벌에 가신다고요? (47/54)


47화. 토벌에 가신다고요?
2023.07.13.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며칠 전, 앤이 보내온 서신에는 황궁에 별다른 일은 없었고 최근 1황자가 아팠다가 기력을 회복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이안은 여전히 기사단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안에 대한 소식을 알 만한 가브리엘마저도 클라인이 기사단에 나오지 않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고 잡아뗄 뿐이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나는 힐긋 창문을 보았다. 야속할 정도로 무심한 햇살이 커튼 사이로 스며들고 있었다.


“아침은 잘도 오네.”

절로 허무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안에게 저주가 발현됐을 거라는 추측은 확신으로 바뀐 지 오래였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침대에서 애써 몸을 일으킨 나는 씻고 곧장 연무장으로 향했다. 붕 뜬 마음을 애써 다잡아가며 수련에 임하다가도 이따금 멈칫하게 되는 건 막을 길이 없었다.

그 저주 때문에 감정이 없어지는 건 아니겠지?

원작 속 이안을 떠올려보면, 감정이라곤 일절 내비치지 않는 냉혈한에 가까운 모습이긴 했다. 나중엔 전쟁에 미친 폭군이 되기도 했고.


‘오늘 제가 한 말은 잊어주셔도 됩니다. 내일 저녁에 제대로 전하겠습니다.’

차라리 이안의 마음을 몰랐다면 지금보다 덜 심란했을까?

만약에 내가 꿈에서 본 것처럼, 그러니까 로즈벨리아가 회귀 전에 겪었던 것처럼 이안이 자신을 죽여달라고 찾아온다면…….

돌연 손아귀에서 힘이 빠졌다. 떼구루루, 연무장 바닥을 굴러가던 목검은 리나트의 발끝에서 멈추었다.


“괜찮으십니까?”

어느새 곁에 다가온 리나트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요.”

“내일이 토벌을 떠나는 날이니 오늘은 무리하지 않는 편이 좋을 거 같은데, 로즈벨리아 경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나는 리나트의 손에 들린 목검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의견을 묻는 듯한 어투였지만, 단호한 표정을 보아하니 연무장에 계속 있겠다고 해도 목검을 돌려주지 않을 기세였다.


“네, 그래야죠.”

“이건 제가 정리할 테니 로즈벨리아 경은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연무장 밖으로 쫓겨나듯 나온 나는 그 길로 성벽으로 향했다. 숙소에서 나와 연무장에서 수련한 기억밖에 없는데 어느덧 해가 저물어 있었다.

주위를 살핀 나는 성벽 위로 올라서서 어둠에 잠기기 직전의 바다를 마주했다. 정적인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엔 동적인 힘이 느껴지고, 사납게 굴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해졌다.

이 풍경을 보면 조금이나마 기분이 나아질 줄 알았는데.

힘없이 웃던 나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래, 내일이면 토벌을 떠나니까 일단은 토벌에…….


“클라인?”

뒤편에서 인기척을 느꼈을 뿐인데 절로 그 이름이 튀어나왔다.


 
성벽 아래로 내려와 주위를 휘둘러보았지만, 근방을 오가는 이는 눈에 띄지 않았다. 기척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언뜻 자갈을 밟는 소리처럼 들렸는데 잘못 들었나?

게다가 클라인이라니. 이안이 여기 있을 리가 없는데…….

어지러이 흩날리던 머리칼을 쓸어넘긴 나는 숙소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숙소 근처에 다다르자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 에드윈이 보였다.


“에드윈?”

“로즈, 어딜 다녀오는 거야?”

“그냥 바람 좀 쐬고 왔어. 설마 나 기다린 거야?”

“그래, 조심히 잘 다녀오라는 말을 하려고. 너는 알아서 잘할 거라는 거 알지만, 그래도…….”

평소와는 다르게 어딘가 조급하게 구는 에드윈을 보니 작게 웃음이 나왔다.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입매를 당겼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데이지 님을 잘 부탁할게.”

“나만 믿어.”

에드윈이 자신 있다는 듯 가슴을 두들겨 보였다. 데이지를 만날 수 있다는 게 위안이 된 건지, 에드윈의 표정은 한결 좋아 보였다.


“이틀에 한 번, 간단한 동작을 반복해서 알려드리도록 해. 데이지 님은…….”

“너무 무리하면 안 되는 거 잘 알고 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에드윈이 잽싸게 말을 가로챘다. 요 며칠 마주칠 때마다 언급했더니 세뇌가 된 모양이었다.


“그리고…….”

뒷말을 흐리자 에드윈이 긴장한 듯 콧등을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내가 또 잔소리할 줄 알았나 보네.

나는 어깨를 가볍게 들어 올리며 씩 웃었다.


“치료도 잘 받아.”

 

*



“황자님, 이렇게 계속 침실에만 있으실 거예요?”

“그래.”

네이슨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칼리스토가 이안이 뭘 하든 당분간은 그냥 놔두라고 했지만,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루를 꼬박 앓고 난 후, 이안은 침실에 틀어박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긴 시간 욕조에서 몸을 담그거나, 소파나 침대에 누워 있는 게 전부였다.


“오늘 토벌대가 떠난다는 건 알고 계세요?”

“그랬던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이안이 태연한 척 대꾸했다. 오늘 토벌대가 떠난다는 건, 카를에게 보고를 받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언제는 토벌에 참여하신다고 하셨으면서 기사단에 안 가보실 거예요?”

“나 원래 이랬잖아. 뭐 하나 진득하니 한 적도 없었고.”

“그럼 로즈벨리아 윈터스님은요? 그분은 강하시니까 토벌에 떠나실 거 아니에요. 걱정 안 되세요?”

이안의 목울대가 울컥 요동쳤다. 로즈벨리아에 대한 마음을 비우려고 했지만 내내 그녀에 대한 걱정을 떨칠 수 없었다.

로즈벨리아가 혼자서 오러를 연습한다는 보고를 매일같이 받았으니까.

토벌을 앞둔 그녀의 상태가 어떤지, 오러 부작용으로 힘들어 보이진 않는지. 두 눈으로 봐야 할 거 같아서 간밤에는 기사단에도 몰래 다녀왔었다.

연무장에서 나온 로즈벨리아가 성벽에 갔다가 숙소로 들어가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다가 돌아왔다. 그 뒤로는 로즈벨리아에 대한 생각을 멈추기가 더 힘들었다.

그녀 앞에 설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서 이런 제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것도 알지만.

도저히 비워지지 않았다.


‘황자님이 짝사랑하는 로즈벨리아 님을 지켜드려도 모자랄 판에 대체 왜 이러고 계시는 거야.’

네이슨의 속마음이 들려오자 이안이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토벌과 오러 연습은 분명 다를 터였다. 아직 불안정한 오러를 무리하게 쓰다가 큰일이 나는 건 아닐까. 그때처럼 피를 흘리고 모두 앞에서 정신을 잃기라도 한다면…….

잇새에 돌연 힘이 실렸다. 이안은 금기의 방에서 가져온 기록물을 내려놓고 창가에 다가섰다.

몇 날 며칠을 제대로 잠들 수 없어 눈꺼풀이 무거운데, 아이러니하게도 몸은 가뿐했다.

몸 안 가득 넘실대는 오러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오러가 안정화된 소드마스터와 오러가 불안정한 소드마스터가 접촉하는 겁니다.’

불쑥 떠오른 빈센트의 말에 이안의 눈이 크게 뜨였다.

온종일 끊이지 않는 말소리와 환청 때문에 시끄러워서 무언가를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데…….


‘내가 로즈벨리아의 오러를 안정시킬 수 있는 건가?’

“네이슨, 빈센트를 불러와.”

“예. 알겠습니다.”

모처럼 집무실에 들어선 이안이 책상 앞에 앉았다. 초조한 듯 손끝으로 책상을 두들기다가 몸을 일으켜 창문 앞을 서성이고 있는데 불쑥 문이 열렸다.

직접 빈센트를 데리러 갔던 건지 네이슨과 빈센트가 함께 들어오고 있었다.


“1황자님을 뵙습니다.”

“이전에 내게 말했던 그 방법 말인데, 아직도 그 방법뿐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내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빈센트가 고개를 떨구었다.


“예, 그렇습니다. 다른 방법은 찾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손바닥이 맞닿는 접촉으로도 가능하다 이거지?”

“예. 오러를 밀어내고 받아들이는 접촉의 과정이 필요한 거라서, 꼭 손바닥이 아니더라도 어디든 맞닿아 있으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빈센트는 로즈벨리아가 다른 소드마스터와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내상에 도움이 될 거라고 했었다. 오러에 자가 치유 능력이 아니라 순수 치유 능력이 있을 거란 전제하였지만.


“안정화된 오러를 전하면 정말로 도움이 될까?”

“저는 그렇게 추측합니다만 실행해보기 전까진 한낱 가정일 뿐이라……. 혹 다른 소드마스터를 찾으시기라도 한 겁니까?”

빈센트가 초조하게 물었다.


“그래.”

“정말이십니까? 이 제국에 있습니까?”

“네 앞에 있잖아.”

“제 앞이면……. 황자님이요?”

이안은 반쯤은 웃는 듯했고, 반쯤은 찡그린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빈센트에게 물러나라는 손짓을 한 이안이 검을 뽑아 들었다.

천천히 오러를 밀어내자 검 위에 파란빛이 감돌았다. 그 순간 빈센트가 탄성을 내질렀다.


“정말 아름다운 광경입니다. 소드마스터의 실물을 영접하는 건 제 평생의 꿈이었는데, 황자님이 이뤄주셨습니다.”

“네가 말한 그 방법이 통한다면 이런 광경쯤은 몇 번이고 더 보여줄 수 있어.”

“정말이십니까?”

마치 환상 속에 있는 사람처럼 몽롱하던 빈센트의 눈동자에 생기가 어렸다.


“그래, 지금은 내가 소드마스터란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으니 누구에게도 발설치 말고…….”

“입 다물고 있겠습니다. 세상에, 소드마스터가 두 분이나 계시다니. 그럼 저는 제가 말씀드렸던 방법에 대해 더 깊이 연구해보겠습니다.”

빈센트가 집무실을 나서자 네이슨이 쭈뼛거리며 다가와 물었다.


“진짜로 소드마스터가 되신 거예요?”

“너도 같이 봤잖아.”

“그렇긴 한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소드마스터가 되신 거지? 갑자기 엄청난 경지에 오르셔서 모든 게 귀찮아지신 건가?’

저주스럽게도 불사의 몸이 되었지만, 소드마스터가 되었으니 어쩌면 로즈벨리아를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러를 전하려면 로즈벨리아와 접촉해야 했다. 결국 이 몸으로 그녀 앞에 나서야 한다는 건데…….


‘로즈벨리아와 마주치지 않고 도울 방법은 없을까? 적어도 그녀가 토벌 중에 오러를 쓰지 않도록…….’

퍼뜩 떠오른 생각에 이안이 곧장 네이슨을 불렀다.


“네이슨.”

“예, 황자님.”

“토벌에 갈 거니까 간단히 짐을 꾸려줘.”

“예. 예? 토벌에 가신다고요?”

이안은 달리 문제라도 있냐는 듯 어깨를 들어 보였다.


‘마수를 상대할 자신은 있는데, 후방을 경계해줄 이가 한 명 정도는 있는 편이…….’

생각을 멈춘 이안이 네이슨을 빤히 바라보았다. 네이슨은 자신의 보좌관이었지만 그렇다고 검술에 문외한은 아니었다.

칼리스토가 보좌관을 뽑을 때, 기본적으로 검술에도 능한 이들을 후보에 올렸으니까.


“그러고 보니 네이슨 너 휴가 내고 싶다고 했었지?”

“그렇긴 한데, 그건 갑자기 왜…….”

이안이 씩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의 제스처에 담긴 의미가 무얼까 생각하던 네이슨이 눈이 점점 커졌다.


“에이, 황자님. 이건 아니죠. 설마 저보고 지금 토벌에 같이…….”

얼굴을 다급히 쓸어내린 네이슨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래, 휴가는 내가 받아들이도록 할게.”

“아뇨, 저는 안락한 곳에서 계속 일을 하고 싶습니다만.”

‘얼마 전에 안에만 있느라 몸이 근질거린다고 했으면서 튕기긴.’

“내가 혼자 떠나고 너 혼자 여기 남아도 곤란하긴 마찬가지일 거야.”

그건 이안의 말이 맞았다. 네이슨은 어느 쪽도 쉽게 고를 수 없다는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제 안전은 보장해주시는 거죠?”

“누가?”

“당연히 황자님이죠!”

‘이 황자님이 설마 나를 방패막이로 세우려는 건 아니겠지?’

이안이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네이슨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표정에 훤히 드러나는 편이라, 속마음이 들려와도 불쾌하지 않았다.


“마수는 내가 상대할 테니 넌 내 뒤를 지키기만 해.”

“정말 그것만 하면 됩니까?”

“그래, 최소한의 후방 경계만 해주면 돼.”

‘버려진 산에 있다는 붉은 샘이 궁금하긴 했는데…….’

잠시 고민하던 네이슨은 마침내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는 듯 이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뭐, 좋습니다. 제가 따라가 드리죠. 대신 휴가비는 두둑하게 챙겨주셔야 합니다.”

이안이 씩 웃으며 답했다.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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