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괴물인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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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괴물인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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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괴물인 거잖아
2023.07.10.
“시몬, 혹시 클라인 봤어?”
“그러고 보니 오늘은 못 본 거 같아요. 오전에 수업 들을 때도 없었거든요.”
“그래?”
태연한 척 되묻곤 애써 한숨을 삼키었다.
차라리 후작저로 갈 걸 그랬나?
비는 아침이 되어서야 그쳤고, 그길로 공작저에서 나와 후작저가 아닌 기사단으로 복귀한 건…….
어쩌면 이안이 기사단에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사단 내부를 구석구석 뒤져보아도 이안은 없었다. 이안을 봤다는 이 또한 없었다.
“그런데 클라인은 왜 찾으시는 거예요?”
얼굴 위로 빤한 시선이 닿는 게 느껴졌다. 호기심이 가득 서린 얼굴을 마주한 나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손을 가벼이 내저으며 대꾸했다.
“아, 별건 아니고……. 클라인한테 할 말이 있어서.”
“무슨 말이요? 만나게 되면 대신 전해드릴까요?”
“아니야, 됐어.”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선배님.”
시몬의 눈동자가 결연하게 빛났다. 뭐든 하겠다는 의욕으로 충만한 시몬을 보니 도리어 부담스러워진 건 나였다.
“그래, 고마워. 근데 수업 또 있는 거 아니야?”
“아! 맞아요. 저는 그럼 수업 들어가 볼게요, 선배님.”
시몬은 내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곤 이내 별관으로 들어갔다. 수업을 듣는 이들이 별관 안으로 우르르 몰려가자 별관 앞이 금세 한산해졌다. 남은 이들의 얼굴을 낱낱이 살펴보았지만 역시나 이안은 없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대체.”
하루 사이에 이렇게 감쪽같이 자취를 감출 수가 있나?
정말 무슨 일이 생기지 않고서야…….
애써 눌러두었던 불안감이 다시 엄습해왔다. 나는 생각을 멈추기 위해 고개를 빠르게 내저었다.
차라리 수호기사단 기사를 찾아볼까?
퍼뜩 떠오른 생각에 7연무장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굳게 닫힌 연무장 안으로 들어서니 목검으로 홀로 검술 연습을 하는 콘라드가 보였다.
“콘라드 경.”
데구루루, 콘라드의 손에서 떨어진 목검이 연무장 바닥을 울렸다.
“예?”
콘라드는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려는 듯 눈을 연신 깜빡였다.
하기야 놀랄 만도 하지.
7연무장에서 함께 수련하는 동안 가벼운 인사만 나누었을 뿐, 제대로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으니까.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예? 제게요?”
“여기 콘라드 경밖에 없잖아요.”
텅 빈 연무장 내부를 둘러본 콘라드는 민망한 듯 콧등을 움찔거렸다.
“그렇죠. 물어보십시오.”
“어제 황궁에 계셨나요?”
“예, 그렇습니다만.”
황궁에 있었다고?
무슨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생긴 건 아주 찰나였다. 뒤이어 스멀스멀 밀려드는 불안감에 나는 작게 호흡을 고르며 입을 뗐다.
“혹시 황궁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콘라드는 정말 대수롭지 않은 일을 말하는 것처럼 덤덤해 보였다.
황궁이 넓다고 해도 만약 황자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다면, 저렇게 태연할 순 없겠지.
“근데 갑자기 황궁 얘기는 왜…….”
“아까 누가 황궁 얘기를 하는 거 같았거든요. 무슨 일이 있었나 해서 궁금했어요.”
급히 둘러댄 말이었는데 콘라드는 수긍하는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라고 안도하려는 찰나, 그 작은 고갯짓이 멈추었다.
“부쩍 조용하긴 했습니다. 1황자님의 탄생일이었는데도요.”
1황자라면 이안이잖아.
어제가 이안의 생일이었다고?
“아, 네. 그랬군요. 고마워요.”
나는 얼빠진 사람처럼 눈을 끔뻑이고만 있는 콘라드를 뒤로한 채 도서관으로 향했다.
이전에 폰네스 제국사에 대해 읽을 때, 생일과 관련해서 이상한 게 있었던 거 같은데…….
“아, 있다.”
책장에서 <폰네스 제국, 그 황가에 대하여>라는 책을 꺼내든 나는 부리나케 페이지를 넘겼다.
“생일 관련해서…….”
활자를 훑어내리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붙잡혔다.
<역사적으로 폰네스의 황자들은 혼인을 치르지도 못하고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는 황자들은 기이하게도 자신의 생일 당일에 사망한 경우가 많으며, 그러한 배경 탓인지 폰네스에서는 황자들의 탄생일을 성대하게 치르지 않는다.>
“설마…….”
이안이 말한 그 저주라는 게 생일 당일에 발현되는 거라면?
그래서 죽을 수도 있고. 만약에 살아남는다면 원작 속 이안처럼 그렇게…….
나는 떨리는 손으로 책을 덮었다. 원작은 데이지 시점이라 이안에게 언제 저주가 발현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막연히 백색기사단을 떠난 이후, 황태자 책봉식 이전 시점에 저주가 발현되었겠거니 생각했었다.
그런데 저주가 발현돼서 백색기사단을 떠나는 거라면?
쿵, 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형편없는 꼴로 바닥에 떨어진 책이 보였지만 그저 망연히 쳐다볼 뿐이었다.
엉망으로 일그러진 내 마음은 아직도 추락하고 있었으니까.
*
“헤르만, 로즈벨리아 말이에요.”
올리비아가 들고 온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은 헤르만이 알만 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혼담 건이라면 조금 미뤄둡시다.”
뜻밖의 대답에 올리비아의 눈썹이 밉게 일그러졌다.
“갑자기 왜요? 지난번에 디아즈 가문과 혼담 건은 동의했잖아요.”
“토벌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하는 말이오. 로즈벨리아도 당분간 수도에 없을 텐데 급할 필요 없잖소.”
“……알겠어요.”
“올리비아.”
찻잔을 들려던 올리비아가 싱긋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말해요, 헤르만.”
“릴리아나 말이오.”
“갑자기 릴리아나 얘기는 왜…….”
올리비아가 태연한 얼굴로 드레스 자락을 붙잡았다. 어찌나 꽉 쥐고 있었는지 팔이 가늘게 떨려올 정도였다.
“그때는 원인 불명의 병이었지만 10여년 넘는 세월이 흘렀으니, 지금이라면 살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오?”
“글쎄요. 원인을 아는 병이라면 모를까. 아직도 릴리아나가 어떤 병에 걸렸는지 알 수 없으니…….”
“……알겠소. 그만 나가보시오.”
올리비아는 서재에서 나올 때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호흡을 고른 올리비아는 곧장 제 방으로 향했다.
“마님, 얘기는 잘 나누고 오셨…….”
“갑자기 릴리아나 얘기는 왜 꺼내는 거야?”
마가렛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 방에 자신과 올리비아만 있다는 걸 알면서도 괜스레 방 안을 둘러보던 마가렛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나도 모르겠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 이름을 입에 올린 건지.”
게다가 릴리아나의 병에 대해서 묻기까지 했다.
‘디아즈 가문과 혼담 건은 순순히 따라주기에 이번에도 흔쾌히 따라주겠거니 했는데, 혼담도 미루자고?’
“다 마음에 안 들어.”
“어차피 아가씨는 곧 토벌에 떠나잖아요. 당사자가 수도에 없으니 혼담은 천천히 준비하셔도 되지 않을까요?”
“헤르만과 똑같이 말하는구나.”
소파에 앉은 올리비아가 콧방귀를 뀌었다. 혼담을 천천히 진행하자는 헤르만의 말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었다. 로즈벨리아가 토벌에서 운 좋게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 기분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헤르만에게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건가?’
“정 안 되면, 로즈벨리아가 돌아오는 대로 이번에 완성된 약을 한번 써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마님, 그건 안 됩니다. 황후 폐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
“누가 알겠어? 어차피 그 약은…….”
뒷말을 삼킨 올리비아가 입꼬리를 한껏 올려 웃었다,
*
뒤척이던 이안이 번쩍 눈을 떴다. 벌써 몇 번째인지 알 수 없었다. 애써 눈을 감았다가 화들짝 놀라며 눈을 뜨길 반복했다.
시끄러워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오러를 감지하고 난 이후부터는, 사람들의 속마음이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바로 코앞에 있는 사람의 속마음만 들려오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일정 반경 안에 있는 사람들의 속마음이 섞여서 들려오고 있었다. 문제는 속마음이 들리지 않는 곳으로 가면 환청이 들려온다는 것이었다.
‘죽이고 싶을 텐데. 내 말을 믿어 봐. 너는 피에 굶주려 있다니까.’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누군가를 죽이라는 말을 건네왔다. 너무나도 쉽게 말이다.
저주가 발현된 지 고작 몇 시간 만에 이안이 내린 결론은, 죽이라는 환청을 듣는 것보단 시끄러워도 다른 이들의 속마음을 듣는 게 낫다는 거였다.
그는 새벽부터 아침까지 꼬박 몇 시간 동안 읽어낸 금기 구역의 기록물을 떠올렸다.
기록 속에서 저주가 발현됐음에도 살아남은 이들의 말로는 둘 중 하나였다.
살육에 미치거나, 정신을 놓거나.
어느 쪽도 끔찍했다. 그런데도 쉽게 죽을 수 없는 숙명이었다.
“불사의 몸이라고 했던가.”
자의로는 죽을 수 없다고 했다. 다른 이에게 칼로 찔러보라 명하고 가만히 있으려 해도 몸이 멋대로 움직여 방어하는 데다, 어떤 독을 마셔도 죽지 않는다고 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려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자의로 떨어지려고 하면 발이 붙들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다나.
냉소를 흘리던 이안이 눈을 감았다. 많은 양의 오러가 흐르는 게 느껴졌다.
게다가 소드마스터라니.
‘진심을 다해 싸우더라도 쉽게 죽지 않게 만든 거잖아.’
“……빌어먹을 저주네.”
낮게 읊조린 이안이 무거운 눈꺼풀을 어루만지며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깨질 거 같아 억지로 눈을 붙이려던 건데, 어째 점점 더 잠이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침실에서 나온 그는 본궁에서 벗어나 후원을 거닐었다. 환청을 애써 무시하며 걷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1황자?”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몸을 돌리니, 시녀가 들고 있는 양산 아래에서 유유히 서 있는 황후 이블린이 보였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그렇게 예의 차릴 거 없어요. 몸이 아팠다던데 지금은 괜찮은가요?”
물음에 대답하려는 찰나였다.
‘그냥 확 죽어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불쑥 들이닥친 이블린의 목소리에 이안이 쓴웃음을 삼켰다. 속으로는 죽으라고 저주를 퍼부으면서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정말 제 걱정을 하시긴 한 겁니까?”
“그럼요. 간밤에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답니다.”
“그냥 확 죽을 수도 있었는데, 황후 폐하가 극진히 걱정해주신 덕분에 제가 괜찮아졌나 봅니다.”
‘지금 얘가 뭐라는 거야?’
이블린의 얼굴에 걸려 있던 우아한 미소가 서서히 걷혔다. 점점 커지는 그녀의 눈을 마주한 이안은 엷은 조소를 흘리곤 머리를 숙여 보였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죽이고 싶지? 그냥 죽여 버려.’
이안은 얼마 가지 못해 제자리에 멈춰 섰다. 이블린을 마주하는 것도 썩 유쾌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환청이 들리는 게 더 나은 상황도 아니었다.
‘죽이는 게 가장 간단한데.’
“하, 시끄러워 죽겠네. 그 입 좀 닥쳐.”
저주가 발현된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환멸이 날 지경이었다.
‘앞으로 계속 이 상태로 살아가야 한다고?’
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리던 이안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붙잡혔다. 그의 눈길이 머무는 곳에는 물기 어린 클라이밍 로즈가 있었다. 붉은 장미를 눈에 담자 자연스레 로즈벨리아가 떠올랐다.
‘어제 비가 많이 왔다던데, 금방 돌아갔겠지?’
당장이라도 기사단에 가서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어제 일은 미안했다고 사과하고, 비를 많이 맞지는 않았는지, 몸 상태는 어떤지도 묻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녀에게 못했던 말을 제대로 전하고 싶었다.
“고백하려고 했는데…….”
이안은 요란하게 날뛰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충만해지는 마음인데, 그저 이 눈에 그녀를 담는 것만으로도 모든 게 괜찮아질 것만 같은데.
이 상태로는 그녀 앞에 설 수 없다. 그 생각이 스치기 무섭게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마치 끝없는 바닥으로 추락하는 듯한 감각이 순식간에 그를 덮쳐왔다.
로즈벨리아 앞에 선다면 그녀의 속마음이 들릴 테고, 그녀의 속마음이 들려오지 않을 때면 아까처럼 빌어먹을 환청이 들려올 터였다.
‘로즈벨리아를 죽이라는 환청이라니…….’
이안은 불쑥 밀려드는 토기에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이런 저 자신이 끔찍하고 역겨웠다.
게다가 불사의 몸? 자의로는 죽을 수도 없다고?
풀썩 앞으로 고꾸라진 이안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건 그냥 괴물인 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