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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저주의 발현 (45/54)


45화. 저주의 발현
2023.07.06.


게스트룸에 어둠이 내려앉자 빗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옅은 한숨을 흘린 나는 이불을 가슴께까지 끌어올렸다. 좀처럼 잠들 수 없는 밤이었다.

어떻게든 잠을 청해보자는 일념으로 눈꺼풀을 지그시 내리눌렀다.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간신히 선잠이 들었을 때였다.


‘황태자 전하.’

‘나를 죽이는 게 너에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텐데.’

로즈벨리아와 이안의 목소리였다. 그간의 경험으로 꿈속이라는 걸 바로 알아챈 나는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했다.


‘왜 꼭 제가 죽여야 하는 겁니까?’

로즈벨리아의 물음에 이안이 푹 꺼진 눈자위를 어루만졌다. 그는 며칠 잠을 자지 못한 사람처럼 부쩍 피곤해 보였다.


‘저주 때문에 언제 미쳐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인데, 내 의지로는 죽을 수가 없어. 심지어는 독약을 먹어도 죽지 않더군.’

‘그게 무슨…….’

‘잘 생각해봐. 내가 너에게 굳이 이런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잖아?’

‘…….’

로즈벨리아가 이안을 가만히 쳐다만 보는 사이, 그가 재차 입을 뗐다.


‘애석하게도 저주를 풀 방법 따윈 없어.’

이안의 말에 로즈벨리아가 놀란 듯 어깨를 흠칫거렸다.


‘그러니 제국민을 위한다면 나를 죽이는 게 좋을 거야.’

꿈속 장면은 거기서 끝이 났다. 눈을 번쩍 뜨자 낯선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가 어렴풋이 보였다.


“원작 속 이안은 언제 봐도 적응이 안 되네.”

감정이라곤 일절 드러나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에 모든 것에 싫증이 난 사람처럼 권태로운 목소리.

죽여달라고 찾아온 사람이라기엔 묘하게 여유가 느껴졌다. 마치 이미 모든 패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더 나아가 마치 로즈벨리아가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 하면 내가 너무 과민한 건가?

로즈벨리아도 자기 생각이 간파당한 것처럼 놀란 거 같았는데…….


“대체 그 저주라는 게 뭐길래.”

언제 미쳐도 이상하지 않은 데다가, 자기 의지로는 죽을 수도 없고, 독약을 먹어도 죽지 않는다는 거야?

게다가 저주를 풀 방법조차 없다고?


“후우.”

애써 밀어 넣은 불안감이 불쑥 고개를 치들었다. 이불을 아래로 밀어낸 나는 결국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더는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소파 위에 놓여 있던 숄을 걸치고 게스트룸 밖으로 나섰다. 복도를 따라 걷다 보니 공작저의 정원이 한눈에 보이는 통유리창이 있었다.

그 앞에 서서 주르륵 흘러내리는 빗줄기를 가만히 보았다. 먼 하늘에 번쩍하고 번개가 치더니 이내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로즈벨리아 경?”

아, 깜짝이야.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몸을 돌리니, 내 쪽으로 천천히 걸어오는 리나트가 보였다.


“부단장님?”

“무슨 고민거리라도 있으신가 봅니다.”

“고민이라기보단……. 그러는 부단장님은요?”

리나트는 혼란스러운 낯빛으로 나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이내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고민은 내가 아니라 그쪽이 가지고 있는 거 같은데?


“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뭐 하나만 여쭤봐도 되나요?”

“얼마든지요.”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리나트가 옅은 미소를 띠었다.


“오늘 아니, 어제 황궁에 가셨었나요?”

“아뇨. 저는 비번이었습니다만.”

“그러셨군요.”

역시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광장에서 마주쳤을 때, 리나트는 수호기사단 단원복을 입고 있지 않았으니까.


“그건 왜 물으시는 겁니까?”

“아까 단원복을 입고 있지 않으셨던 거 같아서 궁금했거든요.”

황궁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아니면 이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아무 일 없어야 할 텐데…….


“잠이 오지 않으시면 따뜻한 우유라도 올리라고 할까요?”

나는 고개를 가로젓곤 숄을 여몄다. 바깥엔 여전히 비가 무심하게 내리고 있었다.


 

*



“이안, 정신이 드느냐?”

밭은 숨을 토해낸 이안이 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빡였다. 긴 꿈을 꾼 것 같은데 꿈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생생했다.


‘다시 보게 되어 반갑구나. 저주의 핏줄을 타고난 아이여.’

기억나는 건 그 말뿐이었다.

그 목소리를 들은 이후로 마치 장기가 비틀리는 듯한 격한 통증에 시달렸다.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만 같은 순간을 여러 번 넘기고 넘겼다.

마치 전신이 마비라도 된 것처럼 손끝부터 발끝까지 움직일 수 없었다. 눈을 뜰 수도 없었다. 그저 끊임없이 찾아오는 고통을 감내할 뿐이었다.


“폐하?”

‘가여운 것. 하필 너에게 저주가 발현되다니.’

이안은 제 두 눈을 의심했다. 칼리스토의 입술이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 탓이었다.


“방금 뭐라고…….”

“정신이 드느냐고 물었다만, 왜 그러느냐.”

“아닙니다.”

환청이라도 들은 건가?

몸을 일으킨 이안이 멈칫했다. 콕 집어 말할 순 없는데 무언가 이상했다.

모든 감각이 이전과는 다르게 부쩍 예민해졌다고 해야 하나.


“황자님, 괜찮으세요?”

“네이슨?”

‘이제 한시름 놓을 수 있겠네. 눈을 뜨셔서 천만다행이야.’

대체 왜 이런 소리가 들려오는 거지? 네이슨은 그저 나를 쳐다보고 있을 뿐인데.


“마실 물을 가져오거라.”

칼리스토의 성화에 시종 하나가 물이 가득 담긴 찻잔을 들고 왔다.


‘큰일 치를 거라고 보고했는데 황후마마께는 뭐라고 말씀드려야 하지.’

“지금 뭐라고 했지?”

이안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예? 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요.”

이마를 짚고 있던 이안이 고개를 들어 시종의 얼굴을 확인했다. 얼마 전에 새로 온 시종이었다. 이름이 레오였던가.


“여기요, 황자님.”

‘하루 꼬박 앓더니 헛소리라도 들리는 건가?’

찻잔을 건네는 레오의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다. 하지만 이안에게 전해든 목소리는 분명 레오의 것이 맞았다.


‘대체 이 목소리는 뭐지? 어디서 들려오는 거지?’

목을 축인 이안이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레오를 올려다보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내가 무슨 헛소리라도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예?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뭐야, 내 속마음을 읽었을 리도 없고. 어떻게 알았지?’

레오가 사색이 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안은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애써 삼키고 그만 나가보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뭐가 어떻게 된……. 잠깐, 하루를 꼬박 앓았다고?’

벽면의 시계를 살핀 이안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여섯 시에 로즈벨리아와 광장 시계탑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폐하, 설마 제 생일이 지난 겁니까?”

“그렇다만.”

다급히 마른세수하자 칼리스토가 걱정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안, 괜찮은 것이냐?”

제 생일에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섣불리 낙관한 게 잘못이었다.

네이슨에게 로즈벨리아를 만나기로 했다고 귀띔이라도 해뒀어야 했는데.


“제가 하루를 꼬박 누워 있었던 겁니까?”

“그렇단다.”

“원인이 뭐랍니까. 설마 폐하께서 걱정하셨던 일이 이거였습니까?”

“……그래. 네 생일이 지나면 내가 모든 걸 말해주겠다고 했었지.”

칼리스토는 뒷말을 잇기 전, 주위를 모두 물리고는 어렵사리 입을 뗐다.


“황가에는 은밀히 내려오는 저주가 있단다. 저주가 발현되는 나이는 열다섯, 열여덟, 스물 모두 다양했단다. 기록상으로 가장 늦은 나이에 발현된 게 스물둘이라 이번 생일이 지나면 너에게 저주가 발현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여겼는데…….”

“저주라고요?”

칼리스토는 저주가 발현되는 나이는 제각각이었지만 공통점을 찾자면 모두 황제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아들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니까 제게 저주가 발현된 거라고요?”

‘지금 이 말이 너에게 들리고 있지?’

이안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칼리스토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데, 그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네. 들립니다.”

“기록을 보니 저주가 발현되면 다른 이의 속마음이 들린다더구나. 속마음이 들리지 않을 땐 환청이 들리고…….”

“환청이요?”

“그래. 어언 백여 년 동안 황가의 핏줄에 저주가 발현된 이가 없었기에, 너도 무사히 넘어갈 줄 알았는데…….”

“저주가 발현된다는 게 어떤 의미입니까? 속마음이 들리고 환청이 들리는 게 전부입니까?”

칼리스토는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슬픈 표정으로 이안의 손을 꼭 잡을 뿐이었다.

좌절감이 짙게 어린 얼굴을 살피던 이안이 성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말씀해주십시오.”

“금기의 방에는 저주에 관한 기록들이 보관되어 있단다. 직접 보는 게 좋을 테니 너에게 그 방 열쇠를 주마.”

“하지만 그 방은 황제만 들어갈 수 있는 방 아닙니까?”

“바이올렛에게 약조했는데.”

칼리스토가 씁쓸히 중얼거린 말에 이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약조요?”

“때가 되면 네가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주고 편히 살게 해주겠다고. 그저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평범한 삶을 살게 해주겠다고…….”

그때였다.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어린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전해진 건.


‘나는 아주 잘 알아. 네가 누구보다 피를 좋아한다는 걸. 그러니 일단 누구든 죽여봐. 엄청 짜릿할걸?’

장난기가 가득했지만 왜인지 섬뜩한 기분이 드는 목소리였다.

이안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건 누군가의 속마음이 들리는 게 아니라, 이 목소리가 바로 칼리스토가 말한 환청이라는 걸.


“…….”

“너를 황태자로 임명할 것이다.”

“예? 갑자기 그게 무슨…….”

이안이 돌연 말을 멈추었다. 몸 안에 무언가가 감지된 탓이었다. 미약하게 느끼던 오러의 양이 많아졌다. 아니, 금방이라도 넘쳐흐를 것처럼 넘실거렸다.

설마?

이안은 천천히 몸 안에 흐르는 힘을 손끝으로 밀어보았다. 따뜻한 감각이 손바닥에 고여 드는 게 느껴졌다.


‘오러를 운용할 수 있게 된 건가? 그렇다는 건 소드마스터가 되었다는 거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손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칼리스토가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너는 내 뒤를 이어 폰네스 제국의 황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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