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일라이저 공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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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일라이저 공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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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일라이저 공작가
2023.07.03.
“부단장님?”
“여기서 뭐하고 계시는 겁니까? 비를 피하시지 않고요.”
리나트는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좁힌 채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 그게…….”
설마 이 비를 미련하게 다 맞고 있었냐는 듯한 눈빛에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비가 이렇게나 퍼붓는데 가만히 서 있던 건 내가 봐도 미련한 짓이긴 하니까.
고작 몇 마디 나눈 찰나에 리나트의 머리며 옷이며 금세 젖어 들어간 걸 보면, 내 몰골은 더욱 말이 아닐 터였다.
“로즈벨리아 님!”
데이지?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시계탑 맞은편에 정차해 있는 마차 안이었다. 마차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리나트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내왔다.
“동생과 이동 중에 로즈벨리아 경을 발견하고 마차를 세운 겁니다. 행선지까지 모셔다드릴 테니 함께 타고 가시죠.”
“아뇨, 저는 괜찮습니다. 근처에 제 말을 맡겨두었거든요.”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을 쓸어내린 리나트가 한숨처럼 말했다.
“이 비에 말을 타고 이동하는 건 무리일 텐데요. 일단 마차로 가서 비부터 피하는 게 좋겠습니다.”
“저는…….”
재차 거절의 의사를 전하려는데,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텅 빈 광장을 울렸다.
“아가씨, 안 돼요!”
소란이 인 곳은 마차 부근이었다. 가만 보니 마차 밖으로 나오려는 사람이 있는지 열린 문틈으로 드레스 자락이 보였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설마 지금 데이지가 마차에서 내리려는 건가?
“부단장님, 일단 마차로 가시죠.”
급한 마음에 통보하듯 말하고 마차 쪽으로 향했다. 채 몇 걸음 떼었을까.
주위가 부쩍 어두워져 힐긋 고개를 들어보니 컴컴한 하늘이 아닌, 내 머리 위로 쏟아지는 비를 막아서고 있는 리나트의 겉옷이 보였다.
그 겉옷을 받치고 있는 팔을 타고 내려오던 시선이 리나트의 얼굴에 닿았을 때,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겉옷을 내게만 드리워주느라 정작 리나트 본인은 쏟아지는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저는 괜찮으니 부단장님 쪽으로…….”
“로즈벨리아 님, 어서요!”
데이지의 다급한 음성에 멈칫하는 사이,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경께서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이대로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럼 조금 빨리 걸을게요.”
거의 뛰다시피 마차에 도착하니 데이지가 반갑다는 듯 손짓해 보였다. 물기를 조금이나마 털어내며 마차에 오르려는데, 어느새 다가온 리나트가 손끝을 잡아주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마차 내부엔 드레스 차림의 데이지와 노란빛이 도는 원피스를 입은 하녀가 있었다.
데이지가 외출할 때 데리고 나올 만한 하녀라면 루시인가?
“어머나, 이렇게 다 젖으셔서 어떡해요. 아, 이쪽은 제 전담 하녀인 루시예요. 루시, 이분은 백색기사단의 기사이자 윈터스 후작가문의 영애인 로즈벨리아 님이야.”
루시는 원작 속에서 늘 데이지 옆을 지켰던 하녀였다. 데이지가 루시를 묘사할 때, 뺨 아래 자리한 주근깨가 사랑스럽다고 했었는데 그 말대로 귀여운 인상이었다.
“저희 아가씨께 얘기 많이 들었는데, 정말 아름다우세요.”
“몰골이 말이 아닐 텐데, 고마워요.”
“루시에게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그리고 로즈벨리아 님의 아름다움은 비를 맞아도 변치 않는답니다. 로즈벨리아 님이 계신 곳만 빛이 나서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봤는걸요.”
이럴 땐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이전 삶에서도 외모에는 꽤 자신이 있었지만, 이렇듯 찬양에 가까운 외모 칭찬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루시가 건네준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어색하게 웃고만 있는데 때마침 마차에 오른 리나트가 내게 물었다.
“로즈벨리아 경, 어디로 모셔다드리면 될까요?”
“저는 기사단, 아니, 후작저…….”
기사단이든 후작저든 그리 가깝진 않았다. 이미 늦은 시간인 데다 빗길이라 데려다 달라고 하기엔 조금 애매한 거리였다.
“저희 저택이 바로 근방인데 들러서 옷이라도 갈아입고 가시면 어때요? 마차도 빌려드릴 수 있으니 기사단이든 후작저든 편히 가실 수 있을 거예요.”
“아니에요, 데이지 님. 저는 그냥 저 건물 앞에서 내릴게요. 제가 타고 온 말이 있어서요.”
“저택에서 머물다가 비가 조금 그친 뒤에 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말은 하인을 시켜 저희 저택으로 데리고 와도 되니까요.”
투둑투둑, 마차 위를 두들기는 빗소리가 아직도 거셌다.
기사단에서 나올 때 에밀리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비가 조금이나마 그친 뒤에 에밀리를 타고 이동하는 게 최선이긴 했다.
“함께 저택으로 가시는 거지요?”
초롱초롱 빛나는 보랏빛 눈동자를 마주한 나는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럼 잠깐 신세 좀 질게요. 마침 데이지 님께 드리고 싶은 말도 있고요.”
*
“로즈벨리아 님! 이 옷은 어때요?”
데이지의 성화에 욕탕에서 씻고 나온 내 앞에 펼쳐진 건, 족히 열 벌은 넘는 드레스였다. 데이지가 가리킨 분홍빛 드레스를 살핀 나는 그저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 그건 조금…….”
“그럼 이건요? 로즈벨리아 님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쏙 빼닮은 색이에요.”
이번에 데이지가 가리킨 건 연녹색의 드레스였다.
“저는 그냥 지금 입고 있는 이 옷도 편하고 좋은데요.”
“그 옷은 안 돼요! 손님으로 오신 건데…….”
축 처진 데이지의 눈꼬리를 본 나는 이마를 긁적이던 손으로 드레스 하나를 가리켰다.
“그럼 방금 가리킨 그 옷으로 입을게요.”
올리비아가 녹색 드레스를 즐겨 입는 편이라 로즈벨리아는 녹색 계열의 드레스를 피했었다.
녹색 빛깔 드레스를 입으면 어떨지 내심 궁금하긴 했으니까, 이 기회에 입어보는 것도 괜찮겠네.
“제가 도와드릴게요, 로즈벨리아 님.”
“괜찮아, 루시. 나는 혼자 갈아입는 게 익숙해서.”
고개를 끄덕이는 루시에게 드레스를 건네받고 가림막 안으로 들어갔다. 금세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데이지가 기다렸다는 듯 내게 달려왔다.
“어머나, 너무 예뻐요! 로즈벨리아 님! 혹시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세요?”
길이도 조금 짧고 가슴 쪽이 조이긴 했지만 숨을 못 쉴 정도는 아니었다.
“조금 작긴 한데 이 정도는 괜찮을 거 같아요.”
“이 옷에는 머리를 땋아서 내리는 게 어울릴 거 같은데 제가 해드려도 될까요?”
데이지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네? 머리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역시 그럴 필요는 없을까요?”
“아가씨가 저택에 누군가를 데려온 게 처음이라 들뜨셨나 봐요.”
루시가 스쳐 지나가는 척하며 내게 속삭였다. 그 말을 듣자마자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럼 머리도 부탁드려요, 데이지 님. 아, 그런데 제가 가문에 급히 전할 서신이 있는데 인편으로 전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럼요! 루시, 로즈벨리아 님께 종이와 펜을 가져다드려.”
“네, 아가씨.”
루시는 재빠르게 종이와 펜을 들고 내 앞에 놓아주었다. 오늘 황궁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봐달라고 짧게 적은 서신을 봉투에 넣자 데이지가 슬쩍 다가와 물었다.
“누구에게 전달하라고 할까요?”
“앤이라는 하녀가 있어요. 그 아이에게 은밀히 전해야 하는데…….”
“루시, 들었지?”
“네. 맡겨주세요.”
루시가 방을 나서는 사이, 나는 데이지에게 이끌려 거울 앞 의자에 앉았다. 뜨끈한 욕탕에 몸을 담그고 난 뒤라 그런지 슬슬 졸음이 밀려들었다.
잠깐 눈을 길게 감았다가 떴는데 거울 속 모습이 사뭇 달라져 있었다. 한쪽으로 길게 땋아진 머리 뒤로 보이는 건, 데이지가 아니었다.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자 거울 속 여자가 미안하다는 눈짓을 보내왔다.
“어머나, 놀랐나 보네요. 미안해요.”
“인사가 늦었습니다, 공작 부인.”
내가 예의를 갖춰 인사하자 아네스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게 보였다.
“나를 바로 알아봤군요?”
“네. 부단장님과도 데이지 님과도 닮으셨어요.”
찬찬히 보니 리나트나 데이지와 닮은 구석이 보이긴 했지만, 아네스를 단번에 알아본 건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자줏빛 드레스 때문이었다.
원작에서 아네스는 자줏빛이나 붉은 계열의 드레스를 자주 입고 등장했으니까.
“호호, 그래요?”
“어머니, 이제 제 방에서 나가주세요.”
“나도 같이 있으면 안 되는 거니?”
아네스는 생긋 웃으며 묻자 데이지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로즈벨리아 님이 제게 할 말이 있다고 하셨단 말이에요.”
“아, 사실 그게 공작 부인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일이기도 해서요.”
“내게요? 그게 뭘까?”
데이지에게도, 에드윈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는…….
그 일을 행하려면 아네스의 허락이 꼭 필요했다.
“데이지 님이 제게 검술을 배우고 싶다고 하셨어요.”
“검술? 정말이니?”
“검을 배우면 강한 사람이 될 것 같아서요. 저도 로즈벨리아 님처럼 멋있어지고 싶거든요.”
데이지는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진심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 아네스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하지만 데이지, 너는 몸이 많이 약하잖니.”
“……그래서 반대하실 거예요?”
데이지가 한층 풀 죽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네가 무언가를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생긴 건 좋지만, 네 체력으로 검을 들 수 있을 거 같지 않아서 걱정되는 거란다.”
“저도 공작 부인의 말에 동감해요. 그래서 데이지 님이 검을 배우시려면 그전에 먼저 체력을 기르셔야 한다고 생각해요.”
“체력을 기른다고요? 어떻게요?”
“데이지는 심장이 좋지 않아서 조금만 걸어도 어지럼증이 생긴답니다.”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원작에서는 데이지가 어지럽다고만 하면 방 안에서 꼼짝 못 하게 했으니까.
식사도 방에서 하고, 웬만하면 침대 밑으로 못 내려오게 할 정도로 과보호했었다.
“몸이 약하다고 집 안에서만 머무는 것보단 조금이라도 걷고, 햇빛을 보며 산책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그래야 식욕도 생기고, 먹으면 힘이 날 테니, 그 힘으로 더 걸을 수 있게 될 수 있을 거고요.”
“한번 해볼게요. 그렇게 해본 적은 없었거든요.”
데이지의 눈빛에 의욕이 충만했다.
내 예상이 맞았어. 데이지는 무기력했던 삶에 원동력이 되어줄 무언가가 필요했던 거였어.
그리고 그게 데이지의 건강을 나아지게 만들 수 있는 일이라면…….
“데이지 님이 지금보다 체력을 조금 더 기르신다면, 제가 토벌에 다녀와서 검술을 가르쳐드릴게요.”
“정말요?”
“그전에 데이지 님이 체력을 기를 겸 간단한 동작 몇 가지를 배우셔야 해요. 제가 토벌에 떠나 있는 동안 믿을 수 있는 기사단 동기에게 그 일을 맡기려고 하는데…….”
아네스를 쳐다보니 허락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좋아요. 저는 정말 열심히 할 수 있어요.”
의지가 넘치는 데이지를 흐뭇한 기색으로 지켜보던 아네스가 대뜸 나를 불렀다.
“윈터스 양.”
“네, 공작 부인.”
“비가 좀처럼 수그러들 기세가 아닌데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는 게 어떤가요?”
“네? 여기서요?”
“로즈벨리아 님, 그렇게 하세요. 비가 너무 많이 와요.”
흘긋 시선을 돌려 창가를 보았다. 창문 위로 물줄기가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 비에 에밀리를 타고 움직일 순 없고…….
이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당장 알아낼 방법이 없으니, 기사단이나 후작저에 돌아가도 심란하긴 마찬가지일 터였다.
“윈터스 양은 일전에 우리 데이지를 구해준 은인이에요. 그런 귀한 손님에게 방 하나 내어주는 건 일도 아니니 편하게 있다 가요.”
“……그럼 하루만 신세 지겠습니다.”
*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간밤에 잠든 이안은 하루가 다 지나도록 깨어나지 못했다. 의원이 벌써 셋은 넘게 다녀갔는데도 원인을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만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황제인 칼리스토의 명에 따라 이안의 방 주변을 통제하고 있지만, 황궁에 이안의 상태가 알려지는 건 시간 문제였다.
생일 당일, 그것도 당사자인 황자가 모습을 꽁꽁 감추었으니 어쩌면 암암리에 소문이 퍼졌을지도.
네이슨은 식은땀을 흘리는 이안을 보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안은 끙끙거리며 신음을 흘리거나, 고통스러운 듯 몸을 뒤틀거나 하면서도 좀처럼 눈을 뜨지 못했다.
‘오늘이 황자님 생일이신데, 왜 하필…….’
벽면에 자리한 시계를 살피려던 네이슨은 제 뒤로 다가온 칼리스토를 발견하고 급히 몸을 일으켰다.
“앉아있거라. 네가 고생이 많구나, 네이슨.”
“아닙니다, 폐하. 제가 황자님 보좌관인데 곁을 지켜야죠.”
이안은 주변에 누군가를 곁에 두지 않았다. 에녹이 호시탐탐 이안의 사람들을 뺏으려 드는 탓이었다. 에녹의 꼬임에 넘어가지 않고 유일하게 이안의 옆자리를 지킨 것이 네이슨이었다.
“녹록지 않은 일이었을 거란 거 안다. 그래서 네게 더욱 고마운 거고.”
이안이 가끔 얄밉게 굴긴 했어도 황제의 자리에 어울리는 건 개차반 같은 에녹이 아닌 우리 황자님이라고 내심 자부심을 느꼈었다.
이안을 보좌하면서 그가 황위를 물려받으면 어떨까 하는 상상은 가끔 상상했지만, 이런 모습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찡하고 울리는 코끝을 매만지던 찰나였다. 굳게 감겨 있던 이안의 눈꺼풀이 열리자 네이슨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을 틀어막았다.
“폐, 폐하! 황자님이 깨어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