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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저녁 약속 (43/54)


43화. 저녁 약속
2023.06.29.



 
찰나 모든 게 멈춘 듯했다. 느리게 불어오던 바람도, 아슴푸레 들려오던 새 울음소리도.

내 머릿속 사고회로도 그대로 정지했다.

눈을 깜빡여야 한다는 것도, 숨을 쉬어야 한다는 것도 잊은 사람처럼 그저 이안을 바라보기만 했다.


‘제가 선배님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내 머릿속에 얼마나 저급한 욕망들이 날뛰는지…….’

불쑥 떠오른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천천히 호흡을 고르자 사고회로가 더디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그러니까 네 말은…….”

흘긋 시선을 들어 올린 나는 뒷말을 삼키었다. 마치 거센 파도처럼 일렁이는 눈동자 속에 내가 있었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파도 속에서 내 얼굴만은 선명했다.


“이렇게 갑작스레 하려던 말은 아니었는데…….”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지?”

“역시 감당할 자신이 없으신 겁니까.”

이안은 허탈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는 걸 예견했다는 듯 덤덤한 눈빛을 보내왔다.


“나는 사실 짐작도…….”

‘……선배님은 짐작조차 못 할 겁니다.’

결국 이안의 말이 맞았네.

이안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니까.


“선배님.”

“어?”

“제게 밥을 사주신다고 하셨죠?”

어느새 다가와 내 손끝을 맞잡은 이안이 내 손등 위에 고개를 내렸다.


“어어, 그랬지.”

대답하는 사이, 따뜻한 감촉이 맞닿았다가 곧 멀어졌다. 얼떨떨한 눈으로 이안을 올려다보자, 그가 화답하듯 나와 눈을 맞추었다.


“이틀 뒤가 아니라 내일 저녁은 어떠십니까.”

“괜찮아.”

슬쩍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바다를 닮은 눈동자인데, 왜인지 마주하기가 버거웠다.


“그럼 내일 여섯 시에 광장 시계탑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옅은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부드럽게 감겨들었다.

문득 이렇게 약속을 잡아도 되나?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오늘 제가 한 말은 잊어주셔도 됩니다. 내일 저녁에 제대로 전하겠습니다.”

손끝을 붙잡았던 감각이 사라지고 이내 발소리가 멀어졌다. 그제야 밭은 숨을 몰아쉰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내가 꿈을 꾼 건 아니겠지?”

원작에서 이안은 이성에게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사랑스러운 데이지뿐만 아니라 여자에게 일절 곁을 내주지 않는 철벽남으로 묘사됐었는데…….

욕망이라니. 그것도 무슨 욕망이랬더라?

그가 한 말을 재차 떠올린 나는 다급히 손부채질했다.


“나를 여자로 안 봐서 거리낌이 없었던 거 아니었나.”

설마 오늘 이상하게 굴었던 것도 에르노아와 나를 질투한 건가?

제자리에 망부석처럼 가만히 서 있던 나는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머릿속이 복잡한 탓인지 몇 걸음 걷다가 멈추길 일쑤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게 말이 돼?”

이안, 너 이런 캐릭터 아니었잖아.


“말이 안 될 건 또 뭐야.”

불쑥 끼어든 말에 흠칫 놀라며 몸을 돌렸다. 내 뒤에 서 있는 건 짓궂은 미소를 지은 채로 서 있는 에드윈이었다.


“에드?”

“그래, 에드다. 근데 로즈 너…….”

돌연 말을 멈춘 에드윈이 내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왜?”

“열나는 거 아니야? 얼굴이 평소보다 빨간 거 같은데.”

“열은 무슨……. 전혀 아닌데? 내 얼굴이 어디가 어때서.”

속으로 뜨끔했지만 황당한 말을 들은 사람처럼 코웃음부터 쳤다. 그러자 에드윈이 도리어 수상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얼굴이 어디가 어떻다는 말은 안 했는데. 너 오늘 좀 이상하다?”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마침 잘 만났다. 너한테 할 얘기 있었거든.”

에드윈은 그제야 아차 하는 얼굴로 슬슬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내가 하려는 말이 뭔지 대번에 깨달은 모양이었다.


“맞다, 로즈. 나 지금 바삐 어디 가는 중이어서 얘기는 다음에…….”

“네가 바쁘다면 바로 단장님께 갈게.”

“잠깐만!”

다급한 외침에 나는 다시 에드윈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할 말을 해보라는 듯 눈썹을 들어 올리자 에드윈이 빛보다 빠르게 내 앞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바빠도 네가 나에게 할 얘기가 있다는데 들어봐야지.”

입에 발린 말을 어찌나 천연덕스럽게 잘하는지 절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이럴 때 보면 정말 능글맞다니까.


“어제 외숙부님을 만났어.”

“외숙부님이면……. 라일리 가문을 말하는 거야?”

“그래. 네 얘기를 전했더니 해독제를 하루빨리 만들어보시겠대.”

“정말? 역시 내 걱정해주는 건 너밖에 없다니까.”

“이것도 주셨어.”

은색 단지를 건네며 통증에 좋은 약이라고 덧붙이자 에드윈의 낯빛이 환해졌다.

발목에 통증이 도졌다고 일찌감치 알렸다면 가브리엘은 정식으로 황실에 보고했을 테고, 라일리 가문은 바로 응했을 터였다.

수월한 길을 두고 에드윈이 이렇게 돌고 돌아 약을 구하려던 건.

토벌에 참여하고 싶어서.

단지 그 이유였다.

멀리 돌아왔음에도 네가 원했던 결말이 아니라는 말을 해야 하는데, 들뜬 얼굴을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좋아할 거 없어. 외숙부님도 네가 토벌에 가선 안 된다고 하셨거든.”

“뭐? 왜?”

나는 딜런에게서 들은 말을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그대로 전했다. 삽시간에 굳어진 에드윈의 표정을 흘긋 살피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마수의 독이 여태 몸에 남아 있었던 거니까 최대한 빨리 해독해야 한다고도 하셨어. 그러니 넌 여기 남아서 치료에 집중하는 게 어때?”

길게 한숨을 내쉰 에드윈이 체념한 듯 허탈한 웃음을 보였다.


“결국 달라진 게 없네.”

“……다음 토벌에서 두 배로 활약하면 되잖아.”

에드윈이 돌연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린 건 그때였다.


“근데 말이야, 로즈.”

“어?”

에드윈은 가늘게 좁아진 눈매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눈을 저렇게 뜨고 있는 거지?


“너 오늘 좀 이상하긴 한 거 같아.”

“아까도 그러더니 내가 어디가 어떻게 이상한데.”

“예전 같았으면 나한테 어떠냐고 묻는 게 아니라 치료에 집중하라고 딱 잘라 말했을 거잖아. 내가 의기소침해할 때는 위로하기보단 자극을 심어주는 편이었고.”

나는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만약 원작의 로즈벨리아였다면 마수에 당한 건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니,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앞을 봐야 한다고 충고했을 거다. 이번 일을 계기로 더욱 열심히 수련하라고 말했겠지.

로즈벨리아는 좋은 자질을 지닌 에드윈을 자극하는 게 그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여겼으니까.


“그랬지. 그래서 싫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너에게 이런 변화가 생긴 게 좀 반가워서.”

반갑다고?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 머리를 갸웃했다. 그러자 에드윈이 못 알아들을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뒷말을 이었다.


“네가 겉으로만 좀 세게 말한다는 거 알고 있었거든. 근데 요새는 조금 솔직해진 거 같다고 해야 하나?”

아, 그런 의미였구나.


“……이제부터 좀 솔직해져 보려고.”

씩 웃던 에드윈과 눈이 마주치자 왜인지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잇새로 튀어나오려는 헛기침을 꾹 참은 채 재차 입을 열었다.


“네가 수도에 남는다면 너한테 개인적으로 부탁하고 싶은 것도 있는데…….”

“그게 뭔데?”

 

*



“그래, 단원복을 입고 가는 건 좀 그렇지.”

옷장을 열어젖힌 나는 로즈벨리아의 옷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죄다 편해 보이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입을 옷이 없네.


“너무 신경 쓰고 가는 것도 좀 웃기지 않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고개를 이리 비틀고 저리 비틀기를 반복하다가 꺼내든 평상복은 결국 가장 밝은 색감의 옷이었다.

옷을 갈아입은 나는 조금 일찍 기사단을 나섰다. 유독 느리게 흘러간 하루라고 생각했는데, 광장으로 향하는 길은 도리어 짧게 느껴졌다.

에밀리를 마구간에 맡겨두고 곧장 시계탑 앞으로 향했다. 시침은 다섯 시를 지나고 있었다.

정말 내게 고백을 하려는 걸까? 그 철벽남 이안이?

고백을 받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시몬이 고백해오던 때와는 분명 달랐다. 그때 시몬이 고백했던 상대는 내가 아니었지만, 지금 이안이 보고 있는 건 적어도 과거의 로즈벨리아는 아니니까.


“……거절해야 하나?”

그 물음에 왜인지 쉽게 답할 수 없었다. 내 마음인데 마치 불투명한 흙탕물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후우.”

괜스레 한숨을 푹 내쉬었다가 어느 순간엔 시계탑을 빙빙 돌기도 하고, 지나가는 아이에게 괜히 손을 흔들어 보이며 시간을 보냈다.


“왜 이렇게 안 오지?”

하기야 내가 너무 빨리 오긴 했지.

애써 마음을 가다듬으며 시계탑에 등을 기댔다.

하지만 파랬던 하늘에 노을이 지고, 저녁 어스름이 찾아들 때까지 이안은 나타나지 않았다.

시곗바늘은 어느덧 일곱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비가 오려나 봐요.”

“어서 안으로 들어가요.”

옆을 스쳐 지나가던 행인의 말에 고개를 뒤로 젖혔다. 부쩍 먹구름이 밀려온다 싶더니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굵어진 건 순식간이었다. 매섭게 쏟아지는 비에 사람들이 분주하게 흩어졌다. 시계탑 앞에는 어느새 나뿐이었다.


“……진짜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왜 안 오냐는 타박보다는 걱정이 밀려들었다.

광장에 못 올 사정이 생긴 거라면, 다른 사람이라도 보냈을 텐데…….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안의 전언을 가져다줄 이도 오지 않는 걸까.

곧 여덟 시가 되어가니, 엇갈린 건 아니라는 확신이 생겼지만 좀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황궁에 달려가 혹시 이안에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그득했다. 하지만 오늘 나와 약속한 이는 황자 이안이 아니라 제 신분을 속이고 있는 클라인이었다.

차라리 후작저에 가서 오늘 황궁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라고 할까?

그 생각이 머릿속에 스치자마자 망부석처럼 굳어 있던 다리가 떨어졌다. 마냥 기다린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그래, 차라리 이럴 시간에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아내는 편이 낫겠어.

불안감으로 일렁이는 가슴께를 내리누른 나는 근처에 맡겨둔 에밀리를 찾으러 몸을 돌렸다. 그 찰나, 타닥거리는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설마 이안이 온 건가?


“클…….”

시야에 들어온 은발을 확인한 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로즈벨리아 경?”

내 앞에서 멈춰선 이는 리나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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