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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감당할 자신 있습니까? (42/54)


42화. 감당할 자신 있습니까?
2023.06.26.


무언가가 목을 옥죄는 듯한 감각에 번쩍 눈을 떴다. 목 언저리를 매만지는 이안의 잇새로 연신 기침이 터져 나왔다.

꿈이라기엔 섬찟할 정도로 선명한 느낌이었다. 그는 기묘하게 일렁이는 가슴께를 꾹 누르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더는 잠이 오지 않을 거 같아 이안은 그대로 침실을 나섰다. 벽면 곳곳에 자리한 등불만이 빛을 발하고 있는 황궁의 복도는 스산하리만큼 조용했다.


“황자님, 뒤를 따를까요?”

그림자처럼 방 앞을 지키고 있던 수호기사단 기사가 다가와 물었다.


“됐어. 잠시 걷다 올 테니…….”

이안이 말을 멈추었다. 맞은편 복도에서 인기척이 느껴진 탓이었다. 바닥을 울리던 발소리가 멎어 들고 이내 모습을 드러낸 건, 칼리스토였다.


“말소리가 들리는 듯해 와보았더니 너였구나, 이안.”

“폐하, 이 야심한 시각에 어찌 홀로 다니시는 겁니까.”

칼리스토가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 허허, 웃어 보였다. 하기야 황제가 언제 어딜 가든 은밀히 따르며 호위하는 친위대가 있었다. 지금도 어디선가 주시하고 있을 터였다.


“한번 깼더니 잠이 오질 않더구나. 표정을 보아하니 너도 그런 모양이지?”

“네. 이상한 꿈을 꿔서요.”

“어떻게 이상한 꿈이었는데?”

되묻는 칼리스토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번졌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조금 생생한 꿈이었어요.”

“달리 이상한 곳은 없고?”

“네,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어쩌다 이곳까지 오신 겁니까.”

2층 한가운데 자리한 만찬실을 기준으로 황제의 방과 황후의 방은 왼편에, 황자들이 기거하는 방은 오른편에 자리했다.


“갈 곳이 있어서 온 거란다.”

“이 시간에 어딜요?”

칼리스토가 따라오는 눈짓을 보내며 앞장섰다. 그가 걸음을 멈춘 곳은 2층 오른편 복도 끝, 마치 황금을 둘러놓은 듯한 금색 빛깔의 철창으로 둘러싸인 방 앞이었다.


“이곳은 금기 구역 아닙니까?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방이라고…….”

“그래, 이곳은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지. 단 황제는 예외란다.”

“폐하께는 열쇠가 있는 겁니까?”

“그래, 이 문을 열 수 있는 유일한 열쇠는 황제에게만 은밀히 전해진단다.”

이안이 철창 너머로 보이는 방의 비밀을 가늠하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이 안에 뭐가 있는데요?”

“그건……. 네가 평생 몰랐으면 좋겠구나.”

“그게 무슨 뜻입니까. 제가 황제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인 거라면…….”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이안은 칼리스토가 제게 황위를 물려줄 마음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 이안 또한 황위에 욕심이 없었으니까.


‘황후의 세력이 건재하니 2황자인 에녹이 조만간 황태자가 될 테고, 물 흐르듯 황위를 이어받겠지.’

“그 뜻이 아니란다, 이안. 실은 황가에…….”

칼리스토는 잠시간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머리를 떼었다.


“이틀 뒤가 네 스물두 번째 생일이니, 그날이 지나면 내 모든 걸 말해주마.”

“……그날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겁니까.”

내내 품고 있던 불안감이 무심코 튀어나왔다. 어느덧 하늘이 밝아오고 있으니, 생일까진 이틀이 남은 게 아니었다. 오늘이 지나면 바로 내일이 그의 스물두 번째 생일이었다.


“이안.”

“예, 폐하.”

눈이 마주치자 칼리스토가 눈매를 가볍게 접어 보였다. 그는 짐짓 태연한 표정으로 이안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너에게는 아무 일도 없을 거란다.”

두드리는 손길에 작은 떨림이 전해 들었지만 이안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클라인, 너는 연무장으로 갈 거야?”

“글쎄.”

이안이 지근거리는 이마를 꾹꾹 누르며 대답했다. 신입 기사들이 필수로 들어야 하는 이론 수업을 듣고 별관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데릭이 레이먼 선배님과 대련한다는데 구경하러 갈래?”

“나는 됐어.”

제이스의 권유를 뒤로한 채 걸음을 옮기던 이안이 돌연 멈춰 섰다. 제 옆을 스쳐 지나가는 신입 무리에게서 언뜻 ‘로즈벨리아’라는 이름이 들려온 탓이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이안에게 팔을 덥석 붙잡힌 신입 기사 한 명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어?”

“너희 로즈벨리아 선배님 얘기하고 있었잖아. 아니야?”

“아아, 로즈벨리아 선배님이 곧 결혼하신대서 그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결혼?”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자마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갑자기 결혼이라니. 대체 누구와?’

연회에서 로즈벨리아는 지금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했었다. 아예 안 하면 안 했지. 떠밀리듯이 하는 결혼은 원치 않는다고 했었는데.


“근데 지난번 일처럼 그냥 뜬 소문일 수도 있잖아.”

“이번엔 아닐걸? 우리 기사단에 에르노아 선배님 있잖아. 디아즈 가문이랑 윈터스 가문 사이에 혼담까지 오갔다던데.”

“에르노아 선배님이 디아즈 가문 사람이었어?”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저들끼리 떠들어대는 신입 무리의 말소리가 푹푹 꽂혀 들었다. 이안은 밭은 숨을 삼키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로즈벨리아 선배님 오늘 오셨어?”

“오셨을걸.”

누군가 흘리듯 뱉은 말을 듣자마자 이안은 7연무장으로 달려갔다. 그는 굳게 닫힌 문 앞에 서서 잠시 호흡을 고른 뒤 문을 열었다.

연무장 안에 로즈벨리아는 없었다. 널찍한 내부에는 리나트와 콘라드뿐이었다.


“로즈벨리아 선배님은?”

“아, 그…….”

바짝 언 콘라드가 눈만 데구루루 구르고 있자, 리나트가 검을 내려놓고 이안의 앞에 다가섰다.


“로즈벨리아 경은 오늘 연무장에 오지 않으셨습니다.”

정자세로 선 리나트는 이안에게 고개를 숙이며 대꾸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콘라드가 한발 늦게 허리를 꾸벅 숙여 보였다.


“아예 안 왔다고?”

“예, 그렇습니다만.”

“그럼 대체…….”

어딜 간 거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문 이안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로즈벨리아가 종종 찾던 성벽부터 식당, 그리고 숙소까지 그녀가 갈 만한 곳은 모두 찾아보았지만, 어디에서도 그녀의 모습을 발견할 순 없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동이 트기 전까지 그저 눈만 감고 있다가 황궁에서 나온 터라 사고회로가 자꾸만 멈칫거렸다. 마치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발끝처럼.

문득 숙소 뒤편에 자리한 건물이 눈에 들어온 건 그때였다.


‘도서관이라고 들었던 거 같은데.’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건물의 정문을 향해 걸어가는데, 굳게 닫혀 있던 도서관 문이 벌컥 열렸다.

제자리에 멈춰 선 이안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그 안에서 나온 건 로즈벨리아였다.


“로즈…….”

이름을 미처 입에 다 올리기도 전에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어? 클라인!”

로즈벨리아가 환히 웃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제 이름을 부르면서, 반갑다는 듯 손까지 흔들고 있는 그 모습이 눈이 시릴 정도로 사랑스럽다는 생각뿐이었다.


 
이안은 제 두 다리에 힘을 실은 채로 손끝을 그러쥐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녀를 품에 안아버릴 것만 같았다.

그는 위험수위를 넘나드는 충동을 꾹 누른 채,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녀가 제게 오는 발소리에 맞춰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가 어느 순간엔 뻐근하게 조여들었다.

이안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



“내내 도서관에 계셨던 겁니까?”

“응. 클라인 너는 여기까지 웬일이야?”

“……혹시 소문 들으셨습니까?”

에르노와와 내 스캔들을 말하는 건가?

기사단에 오자마자 시몬이 울면서 에르노아 선배와 결혼하냐고 묻기에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소문을 퍼뜨린 건 올리비아의 짓일 터였다. 기사단에 그런 스캔들이 퍼지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곤란한 상황이니까.


“아, 너도 그거 들었구나. 혼담이 오간 건 맞는데 잘 정리했어. 새어머니가 나 모르게 밀어붙인 일이었거든.”

“정말입니까?”

“그래, 안 그래도 너한테 가려고 했는데 딱 만났네.”

이안이 무슨 일로 찾았냐고 묻듯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이거 주려고.”

“이게 뭡니까.”

“어제 디저트 가게 들렀다가 산 거야. 네가 나 연습하는 거 도와주는데 난 고맙다는 말뿐이었잖아. 나중에 시간 되면 밥도 사줄게.”

내가 건넨 상자를 품에 안은 이안이 옅은 미소를 보였다. 마지못해 받을 줄 알았더니, 꽤 기뻐 보이는 얼굴이었다.

재차 입을 떼려는 찰나, 뒤에서 덜커덩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안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책을 한가득 품에 안고 도서관에서 나오는 에르노아가 보였다.


“선배님, 벌써 가시려고요?”

“응. 읽고 싶은 책을 다 찾았거든.”

“그……. 달라지는 게 있다면 알려주세요.”

앞뒤 자른 말임에도 에르노아가 충분히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뭔가 달라지는 게 있다면 얘기해줄게. 그건 너에게 도움이 될까?”

“그럼요.”

에르노아는 유유히 숙소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긴 숨을 폭 내쉬는데, 이안이 불쑥 물었다.


“저 선배님이 혹시…….”

“응. 에르노아 선배님이셔.”

“……도서관에서 저 선배님과 계속 같이 있었던 겁니까?”

“할 얘기가 좀 있어서.”

에르노아가 했던 말이 계속 신경 쓰였다. 혹여나 이 몸과 내 영혼이 제대로 어우러지지 못해서 오러를 쓸 수 없는 건가 해서, 기사단에 오자마자 에르노아를 찾은 것이었다.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닌 게 맞습니까?”

“그렇다니까. 뭐, 사람 일이라는 게 장담은 못 하는 거지만 지금은 그냥 선후배 사이일 뿐이야.”

어제는 너무 당황해서 미처 살피지 못했는데 오늘 도서관에서 다시 얘기해보니, 나쁜 사람 같진 않았다.

어쩌면 에르노아가 볼 수 있다는 영혼이 내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

영혼이 이전처럼 다시 어우러지거나 조금이라도 다른 양상을 띠면 곧바로 얘기해준다고도 했으니까.


“…….”

“맞다, 네가 엊그제 줬던 손수건 있잖아. 그거 잃어버린 거 같아. 아무리 뒤져봐도 없더라고.”

딜런을 만나러 가기 전에 급히 주머니에 넣어두었는데, 방에 돌아와 보니 손수건이 어디에도 없었다.


“개의치 마십시오. 돌려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떻게 그래. 내가 새것으로 하나 사줄게.”

“지금 그깟 손수건 따위가 중요한 게…….”

말을 멈춘 이안이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한숨을 푹 내쉰 그가 제 머리칼을 흩트렸다.

오늘따라 이안의 상태가 좀 이상한 거 같은데?


“혹시 무슨 일 있었어?”

이안의 목울대가 요동치듯 출렁였다. 천천히 머리를 쓸어올린 이안이 시선을 내려 나를 마주 보았다.


“……이틀 뒤 저녁에 제게 시간을 내주실 수 있습니까?”

“모레 저녁을 말하는 거야?”

“네. 선배님께 전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근데 왜 이틀 뒤여야 해? 난 오늘이나 내일도 시간 되는데.”

“그건…….”

대답하기 난감하다는 듯한 이안의 표정을 보자마자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 그날은 내가 네 앞에 없을 수도 있어.”

그 말을 하고서 정작 놀란 건 나였다.

오늘따라 이안이 평소와 다르게 조급해 보이는 것도 그렇고. 굳이 모레 저녁에 만나야 하는 이유를 곧바로 꺼내지 못하는 것도 석연치 않았다.

마치 오늘이 폭풍전야인 것만 같은 기묘한 직감이 들었다고 해야 하나.


“…….”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지을 거까진 없는데. 내가 한 말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였나?”

굳게 다물린 입매를 살피던 나는 까치발을 들고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장난으로 분위기를 풀어보려던 건데, 이안은 내 얼굴이 가까워지는 순간 도리어 눈을 질끈 감았다.

뭐지, 이 반응? 내가 말실수를 한 건가?

한참 만에 눈을 뜬 이안은 눈자위를 거칠게 어루만지며 낮은 한숨을 흘렸다. 무언가를 참고 있는 사람처럼 바짝 힘이 들어간 턱을 살핀 나는 재차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미루지 않는 게 좋다고 말하려던 건데…….”

“미루지 않으면요? 감당, 할 자신 있습니까?”

감당할 자신이 있냐고?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저렇게까지 바람을 잡는 거지?

좀처럼 가늠이 되지 않아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선배님은 짐작조차 못 할 겁니다.”

“내가 뭘 짐작조차 못 하는데?”

“제가 선배님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내 머릿속에 얼마나 저급한 욕망들이 날뛰는지…….”

뭐? 무슨 욕망?


“……당신은 모르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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