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한계 (41/54)


41화. 한계
2023.06.22.



 
이안이 좁아진 미간을 매만지며 물었다.


“……어떤 의미의 접촉을 말하는 거지?”

“이렇게 피부가 맞닿는 접촉입니다.”

팔을 들어 올린 빈센트가 제 두 손바닥을 맞부딪혀 보였다.


“그걸로 불안정한 오러를 안정화시킬 수 있다고?”

“오러는 몸 안에 흐르는 기운입니다. 그걸 발현시키려면 검으로 밀어내는 과정이 필요하고요. 그런데 오러를 꼭 검으로만 밀어내야 할까요?”

오러를 검이 아닌 다른 매개로 발현시킨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전제였지만, 터무니없는 가설은 아니었다. 이안이 더 얘기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이자 빈센트가 뒤이어 말했다.


“저는 오러를 검으로 발현시키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다른 사람의 몸에 오러를 밀어 넣을 수 있지 않을까 추측했습니다. 물론 상대도 소드마스터여야겠죠. 그래야 몸에 무리 없이 오러를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다른 소드마스터가 있어야 가능한 전제라고 한 건가?”

“그렇습니다. 그렇게 해서 안정된 오러와 불안정한 오러가 만나면, 일시적으로나마 불안정한 오러가 잠잠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겁니다.”

“반대로 더 불안정해질 수도 있고.”

이안의 지적에 빈센트가 순순히 수긍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기록을 살펴보았을 때, 소드마스터가 지닌 특징은 모두 같았습니다.”

오러가 본질적으로 동일한 기운이라면 불안정한 오러가 안정된 오러를 만났을 때 더 심하게 날뛸 것 같진 않다고.

빈센트는 반쯤 확신에 찬 표정으로 덧붙였다.


“…….”

“그리고 이 또한 제 가정일 뿐이지만, 오러가 지닌 힘이 자가 치유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 순수한 치유 능력이 있는 거라면……. 오러를 검으로만 발현시켰기에 치유의 대상이 손으로 한정된 것이라면 말입니다.”

이안이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 사이 목을 가다듬은 빈센트가 한결 다부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황자님께서 걱정하시는 그분은 다른 소드마스터와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내상에 도움이 될 겁니다.”

“무슨 말인지는 충분히 이해했어. 문제는 다른 소드마스터가 없으니 그 방법은 시도조차 할 수 없단 거고.”

“……그렇죠. 제가 다른 방법을 더 연구해보겠습니다.”

“이만 가 봐.”

단조로운 발소리가 멎어 들고 이내 문이 닫혔다. 이안 홀로 남겨진 집무실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이안은 한숨을 삼키고 다시 책을 폈다. 책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다른 소드마스터라…….”

빈센트가 생각해 낸 방법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그럴싸했지만, 문제는 현존하는 소드마스터가 로즈벨리아 뿐이라는 거였다.

게다가 방법이 접촉이라니. 그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신경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다른 소드마스터가 나타났으면 하고 바랐다가도, 나타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랄까.

자리에서 일어난 이안은 창문 앞에 다가섰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달만이 환한 빛을 뿜고 있었다.

완벽한 원형으로 차오른 달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로즈벨리아가 떠올랐다. 로즈벨리아가 제 어깨에 기대 잠들 때마다 그는 하염없이 달을 올려다보곤 했으니까.

올려다보았던 달의 모양이 어땠는지까지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바람의 온도, 그 바람 끝에 실려 오던 나무 냄새, 간간이 들리던 풀벌레 소리.

애써 그런 것들에게 관심을 돌리려 해도 모든 신경은 제 어깨에 기대 잠든 그녀에게 쏠려 있었다.

자신보다 살짝 낮은 듯했던 체온, 코끝에 은은하게 맴돌던 향기, 야트막한 숨소리.

잠이 들면 습관처럼 제 손을 꼭 부여잡던 자그마한 손까지 떠올리고 나니 숨이 덜컥 막혀왔다.


“후…….”

밭은 숨을 내쉬던 이안이 제 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렸다. 이제는 그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한계에 내몰리는 기분이었다.

그는 눈이 시릴 정도로 밝은 달을 눈에 담았다. 그저 이 밤이 빨리 지나가길 바랄 뿐이었다.

*



“이 책도 기록이 빈약한 느낌이네.”

폰네스 제국사나 폰네스 황실과 관련한 책들을 몇 권 읽어 보았지만 몇몇 구간에서 기록이 빈약했다. 마치 의도적으로 축소한 것처럼.

마지막 장까지 별 영양가 없던 책을 덮은 뒤, 몸을 일으켰다. 기지개를 켜며 방 안을 둘러보고 있는데 문득 손수건이 떠올랐다.

어제도 오러 연습을 했었고, 이안에게서 받은 손수건으로 피를 닦고 주머니에 바로 넣었던 거 같은데…….

문제는 그 손수건을 숙소에 두고 온 기억이 없단 거였다.

지난번에 앤에게 피 묻은 손수건을 들켜서 변명하느라 진을 뺐던 기억을 떠올린 나는 부랴부랴 단원복 주머니를 뒤졌다.


“찾았다.”

손수건을 보자마자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손수건 같은 거 필요 없으니까 챙겨오지 말라고 했는데도 이안은 매번 새 손수건을 건네왔다.

청개구리도 아니고. 가만 보면 나보다도 고집이 센 거 같다니까.


“아가씨.”

별안간 방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서는 앤을 본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손수건을 평상복 주머니에 대충 구겨 넣었다.


“앤, 무슨 일이야?”

“딜런 님 오셨어요. 지금 정원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그래? 알겠어.”

태연한 척 램프를 받아들고 방에서 나왔다.

딜런이랑 얘기하고 돌아와서 서랍에 숨겨놓았다가 내일 기사단 갈 때 챙겨가면 되겠지.

생각을 정리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1층이었다. 본관 문을 열고 나와 곧장 정원으로 향했다.

정원에 있다더니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손에 든 램프로 이리저리 비춰보니, 어둠 속에서 어떤 형체가 아슴푸레 보였다.


“외숙부님?”

내 부름에 검은 형체가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이윽고 나를 발견한 딜런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왔다.


“……점점 더 릴리아나를 닮아가는구나.”

딜런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웃는 것도, 그렇다고 찡그린 것도 아닌 묘한 표정이었다.


“그런가요?”

“일단 이것부터 받으렴. 통증에 좋은 약이란다.”

딜런이 내게 준 건 손바닥보다 조금 큰 은색 단지였다.


“감사합니다.”

“약이 완성되려면 시일이 꽤 걸린단다. 네 친우의 독이 여태 몸에 남아 있었던 거라면 최대한 빨리 해독해야 해.”

“하지만 곧 토벌에 떠나는데…….”

“로즈벨리아, 네 친우는 토벌에 떠나지 못한단다. 떠나선 안 돼.”

딜런의 얼굴은 자못 진지했다. 덩달아 뺨 언저리가 흠칫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이전에도 치료를 받았다고 했지?”

“네.”

토벌에서 돌아오면 토벌에 떠났던 이들은 잠시 쉬며 재정비의 시간을 가졌다. 마수의 독에 당한 이들은 황궁에서 나을 때까지 치료를 보조해주었다.

마수의 독과 관련해서 해독제를 제조할 수 있는 건 라일리 가문뿐이니, 그때도 라일리 가문이 만든 해독제로 치료했을 터였다.


“그런데도 해독이 되지 않았던 거니, 우리도 대증으로 제조법을 조금씩 다르게 해볼 생각이다. 약의 효능을 즉각적으로 확인해야 하니 네 친우는 수도에 머물러야 하고.”

“그렇겠네요. 이 상황을 아시면 단장님께서 나서서 못 가게 하실 거예요.”

“그래, 홀튼 가문이었지? 네가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걸 보니 친한 모양이구나.”

“입단 동기라서요.”

“그럼 그 친우…….”

딜런이 막 입을 뗀 찰나 뒤편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내가 입가에 검지를 올리자 딜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멈추었다.

부탁해둔 약을 받았다고 둘러대면 되겠지. 누구와 마주치더라도 긴장할 필요는…….


“아버지?”

랜턴의 불빛에 드러난 얼굴은 뜻밖에도 헤르만이었다.


“로즈벨리아?”

“헤르만, 자네였군.”

“딜런, 자네가 이 시간엔 무슨 일이지?”

“제가 조금 몸이 안 좋아서 외숙부님께 약을 부탁드렸어요. 대공저로 돌아가시는 길에 급히 들러서 제게 약을 전해주신 거고요.”

“약을 전했으니 난 이만 가보겠네.”

“감사합니다, 외숙부님.”

멀어지는 딜런의 모습은 곧 어둠 속에 잠기었다.


“그런 거라면 응접실에서 얘기해도 됐을 텐데.”

“몸이 좋지 않다는 걸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았어요.”

나는 짧게 대답하고 본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내 걸음을 떼려는데, 불쑥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하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디아즈 가문과 혼담, 아버지가 허락하신 건가요?”

입 밖으로 뱉고 나니 애초부터 잘못된 질문이라는 걸 알았다. 가주가 허락하지 않은 혼담이 오갈 리가 없을 테니까.

그래도 내심 궁금하긴 했다. 올리비아가 그 혼담을 진행하려던 이유는 알겠는데, 헤르만이 허락한 이유는 모르겠어서.


“그래, 올리비아 말로는 같은 기사단에 있어서 서로를 잘 이해할 거 같았다더구나. 디아즈 가문 정도면…….”

그래, 역시나 깊이 생각했을 리 없지. 그저 올리비아가 좋은 혼처라고 꼬드기니 일말의 고민도 없이 그러라고 한 거겠지.


“혹시 저희 가문이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나요?”

“뭐?”

“제가 당장은 결혼 생각 없다고 분명히 말씀드렸는데 제 결혼을 자꾸 서두르시니까. 저로서는 가문이 어려워서 급하게 혼담을 맺는 건가 싶었거든요.”

“나는 그저, 올리비아가 늦게 결혼하면 좋은 혼처 자리가 없어진다고 하기에…….”

“토벌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어요. 여차하면 제가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

“…….”

“지금 제게 시급한 건 결혼이 아니에요. 일단 살아 돌아와야 그다음도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 토벌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세요.”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올리비아가 다른 혼담 건을 꺼낸들 냉큼 동의하진 않겠지.

허리를 꾸벅 숙여 보이고 돌아섰다.


“정말 그 이유가 전부인 게냐?”

“네?”

“올리비아가 하는 일은 뭐든 마음에 들지 않아서 삐딱하게 구는 게 아니고?”

입꼬리가 잘게 떨려왔다.

올리비아가 대체 얼마나 이간질을 했기에 자기 딸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지?


“다른 일도 아니고 제 결혼이잖아요. 상대를 제가 고를 수 없는 거라면, 적어도 제가 원하는 시기에 하고 싶을 뿐이에요. 그게 지금이 아닌 거고요.”

“…….”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더는 붙잡지 말라는 듯 옷자락이 휘날릴 정도로 몸을 홱 돌렸다.

멀어지는 발소리를 가만히 서서 듣고만 있던 헤르만이 눈자위를 꾹 어루만졌다. 헤르만은 본관 쪽으로 몇 걸음 떼는가 싶더니 돌연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이게 뭐지?”

바닥에 떨어진 물체를 주워든 헤르만의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 손수건이었다.


‘깨끗한 걸 보니 로즈벨리아가 떨어뜨린 모양인데…….’

손수건 한가운데에 묻은 피를 발견한 헤르만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제가 조금 몸이 안 좋아서 외숙부님께 약을 부탁드렸어요.’

릴리아나가 앓았던 원인을 알 수 없던 병. 시름시름 앓다가 급기야는 피를 토했던…….

아닐 거야. 낮게 중얼거린 헤르만이 손수건을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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