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에르노아 디아즈
(40/54)
40화. 에르노아 디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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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에르노아 디아즈
2023.06.19.
에르노아가 한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러니까 나한테, 이 몸에 원래 있던 로즈벨리아가 어디로 갔냐고 물은 거지?
눈앞이 아찔해지는 감각에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정신 바짝 차리자. 그 말만을 끊임없이 되뇌며 입을 열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제가 로즈벨리아인데…….”
“아, 내가 너에게 이 말을 먼저 해야 했는데.”
에르노아는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는 걸 짐작한 사람처럼 차분한 말투로 운을 떼었다.
나는 일말의 동요도 없는 그의 얼굴을 힐긋 보았다. 이제는 저 입 밖으로 흘러나올 말이 두려울 지경이었다.
“사실 나는 영혼을 볼 수 있어.”
영혼을 볼 수 있다고? 그게 가능한 일인 거야?
두 귀로 듣고도 믿어지지 않았다. 내가 눈을 끔뻑거리고만 있자 에르노아가 옅은 미소를 보이며 뒷말을 이었다.
“영혼이라고 해서 거창한 건 아니고, 사람마다 그 사람을 감싸고 있는 얇은 막이라고 해야 하나, 띠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런 게 있는데 내 눈엔 그게 보여. 신기하게도 저마다 다른 색과 결을 지니고 있어서 난 그걸 줄곧 그 사람의 영혼이라고 생각해왔어.”
“…….”
“처음엔 나도 눈치채지 못했어. 원래 그 몸에 있던 영혼과 네 영혼의 색이 매우 비슷했거든.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알게 됐지.”
“뭘요?”
“색은 비슷한데 결이 조금 다르다는 걸. 그리고 지금 네 영혼이 그 몸에 온전히 어우러지지 못했다는 것도.”
“……저는 선배님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애써 끌어올린 입꼬리가 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마음속의 불안을 들킬까 입안이 바싹 말라왔다.
“영혼의 색은 놀라울 정도로 닮았는데, 결이 묘하게 다른 데다가 그 몸을 감싸고 있는 모양새도 다소 투박해. 부드럽게 어우러지는 느낌이 마치 누군가 억지로 욱여넣은 것처럼 말이야. 그게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했고 원인이 뭘까 추론해봤는데…….”
“…….”
“내가 내린 결론이 바로 그 몸에 다른 영혼이 들어왔다는 거야. 원래 그 몸에 있던 로즈벨리아의 영혼과 매우 비슷하지만 다른 영혼 말이야.”
일순간 거센 파도에 잠긴 듯 귀가 먹먹했다. 눈을 깜빡이는 그 찰나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전신에 소름이 쭉 끼쳐왔다.
그러니까……. 지금…….
일시적인 충격에 머리가 굳기라도 한 건지 사고의 흐름이 더뎠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순간 책 속 세계에서 눈을 떴고, 내가 동경했던 인물로 살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털어놓는다 한들 믿어주지 않을 얘기였다.
한데 이렇게 정확하게 꿰뚫어 본 사람이 있을 줄이야.
“그……. 선배님께 그런 능력이 있으시다니 정말 놀랍긴 한데요. 저는 로즈벨리아가 맞아요.”
“그래?”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가늠할 수 없는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에르노아는 자신의 패를 쉽게 내보였지만, 나는 내 비밀을 순순히 인정할 생각이 없었다.
“제가 최근에 크게 앓았던 적이 있는데 그날을 기점으로 몸이 조금 이상하다고 느끼긴 했어요.”
“어떻게 이상해졌는데?”
“안정적이었던 오러가 불안정하게 바뀌었거든요.”
일부러 오러라는 화두를 던져준 것인데, 에르노아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설마 내가 소드마스터라는 것도 예측했던 건가?
“너 소드마스터였구나.”
한발 늦은 반응에 어색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괜히 말했나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밀려들었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상대는 내 영혼이 바뀌었다고 추측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에 상응하는 주제로 둘러대는 수밖에.
“……혹시 크게 아파서 영혼이 뒤틀리거나 그럴 수도 있을까요? 아프고 난 이후로 오러를 제대로 다루지 못해서 저도 의아했거든요.”
“흐음, 그랬구나.”
“어찌 됐건 선배님이 짐작하신 대로 제 몸에 다른 영혼이 들어오거나 한 건 아니에요. 그런 거라면 제가 선배님을 어떻게 알겠어요.”
더 캐물을 줄 알았더니 에르노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음,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에르노아는 디저트를 한 입 베어 물곤 내게 권유하는 눈짓을 보냈다. 심장이 아직도 덜컹거렸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알록달록한 색상의 머핀 하나를 손에 쥐었다.
한 입 베어 물자 머핀이 입안에서 파삭거리며 부스러졌다. 어떠한 맛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디저트를 음미하는 척 입술을 분주히 오물거렸다.
“선배님은 기사단으로 복귀하실 건가요?”
“응. 너는?”
“저는 집에 다녀오려고요. 오늘 일 제대로 마무리하고 와야죠.”
“그래, 그럼 나중에 기사단에서 보자.”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에르노아는 유유히 1층으로 내려갔다.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신기하게도 흙무더기를 씹는 듯했던 머핀에서 달콤한 맛이 느껴졌다.
허탈하게 웃던 나는 머핀을 내려놓고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에 휩쓸려 혼미했던 정신이 서서히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근데 내 말을 믿어주긴 한 건가?”
*
“에밀리, 수고했어.”
에밀리의 목을 가볍게 쓰다듬은 나는 로이에게 고삐를 건넸다. 요란한 발굽 소리를 내며 마구간 안으로 들어가는 에밀리의 뒷모습이 꼭 투정을 부리는 아이 같아 웃음이 나왔다.
모처럼 빠르게 달렸더니 더 달리고 싶었나 보네.
나는 로이에게 에밀리를 잘 돌봐달라는 당부를 남기고 걸음을 재촉했다. 서둘러 온 건데도 해가 꽤 기울어 있었다.
본관에 들어서니 삼삼오오 모여 있던 하녀들이 멈칫하곤 인사를 해왔다. 그 중 앤은 없었다.
“앤은 아가씨 방에 있을 거예요. 매번 늦게까지 청소하거든요.”
두리번거리던 내게 말을 건넨 건 앤과 친하게 지내는 하녀인 낸시였다. 알았다는 눈짓을 보내곤 2층으로 올라섰다. 이내 방문을 열자 소파 앞 테이블을 닦는 앤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가씨?”
“앤, 어머니는?”
“마님께서는 오늘 대공저에 가셨어요.”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네.
라일리 대공저는 윈터스 후작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래서인지 올리비아는 유독 친정과 왕래가 잦았다.
한 달에 한 번 꼴로는 대공저를 찾았었지.
“그거 말고는 별다른 건 없었어?”
“아, 광장에 들렀다 가신다는 말을 들었던 거 같아요. 근데 갑자기 마님 행방은 왜 물으시는 거예요?”
절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와중에 광장에 들렀다 간다는 말까지 흘리고 갔을 줄이야.
하기야 실패를 거듭하다 보면 다음 계획은 더욱더 치밀해지기 마련이었다.
“안 그래도 기사단에 사람을 보내려고 했는데 잘 오셨어요.”
“기사단에는 왜?”
“오늘 밤에 딜런 님께서 저택에 잠깐 들르신대요.”
“내가 잘 맞춰 왔네.”
딜런은 올리비아가 조만간 친정에 갈 거라는 알았던 건가? 그 타이밍에 맞춰 후작저에 들를 생각이었나 보네.
“근데 그건 뭐예요?”
“아아, 이거.”
앤이 가리킨 건 내가 품에 안고 있는 분홍빛의 종이봉투였다. 나는 그 안에서 세 개의 상자를 꺼냈다.
상자 역시 분홍빛이었는데, 두 개는 흰 리본이 묶여 있었고 하나는 파란 리본이 묶여 있었다. 모두 디저트 가게에서 포장해 온 것이었다.
“이건 비비안 거, 그리고 이건 네 몫이야.”
나는 흰 리본이 묶인 두 개의 상자를 차례로 가리켰다.
“이게 뭔데요?”
“스위츠 애비뉴에서 사 온 디저트야.”
흰 리본을 묶은 상자는 가게에서 가장 단 디저트 위주로 포장해 온 것이었고, 파란 리본을 묶은 상자는 덜 단 디저트 위주로 포장해 온 것이었다.
“그럼 아가씨 드세요. 단 거 좋아하시잖아요.”
“오늘은 별로 안 먹고 싶네.”
디저트 상자를 힐긋 보았다가 바로 시선을 떼었다. 에르노아와의 대화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속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근데 이 상자만 파란 리본이네요?”
“이건…….”
이안의 몫이었다. 비비안과 앤에게 가져다줄 디저트를 사려는데 문득 이안이 생각났다.
단 건 별로 안 좋아하는 듯했지만, 내게서 사탕을 받아갔던 게 생각나서 충동적으로 산 것이었다.
덕분에 오러 연습을 마음껏 하고 있는데 매번 고맙다는 말이 전부였으니까. 비교적 덜 단 디저트면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려나? 디저트라는 걸 숨기고 줘볼까?
이안의 반응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살풋 웃음이 나오려 했다.
“아가씨?”
“……나 좀 씻어야겠어. 그만 나가봐, 앤.”
앤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상자 두 개를 품에 안았다. 욕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방을 나서는 앤을 보곤 비식 웃었다.
종종 사다 줘야겠네.
*
간결한 노크 소리에 이안이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습관적으로 네이슨을 찾으려던 그가 낮은 탄성을 흘렸다.
‘오늘은 몸이 좋지 않다고 일찍 들어갔지.’
“들어와.”
이내 문이 열렸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는 이는 빈센트였다.
“부르셨습니까, 황자님.”
“진전이 조금 있나 들어보려고 부른 건데, 표정을 보아하니 아직인가?”
“방법을 찾고는 있는데 쉽지 않습니다. 현존하는 다른 소드마스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남아 있는 기록을 뒤지는 것뿐이라서요.”
“완벽한 방법이 아니어도 좋아. 지금은…….”
그저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더 고통스러웠다. 로즈벨리아는 정말 고집스러울 정도로 오러를 연습했다.
통증은 아주 잠깐이라지만 피를 토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빈센트가 저술한 책의 문장이 떠올랐다.
「오러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면 오히려 검사의 생명력을 갉아먹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
“꼭 기록에 의존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씀이십니까?”
방법을 쉽게 찾을 수 없다는 건 이안도 알고 있었다. 시간이 날 때면 늘 오러에 대한 책을 읽었지만 로즈벨리아와 같은 케이스를 본 적은 없었으니까.
“뭐가 됐든 시도라도 해봐야지.”
이안이 저도 모르게 질끈 깨물었던 아랫입술을 놓아주며 말했다.
“제 직관에 따르면 방법이 하나 있을 것 같긴 한데……. 그분 말고 다른 소드마스터가 있어야 가능한 전제라.”
다른 소드마스터라.
자신은 고작 오러를 감지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녀처럼 소드마스터가 되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었다. 이렇게 감지만 하다가 끝나는 경우가 대다수니까.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다른 소드마스터가 있었으면 여태 잠잠했을 리 없잖아.”
이안이 제 머리를 흩트렸다. 짜증스러움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손길에 빈센트가 큼큼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그렇겠죠, 아무래도……. 제가 다른 방법을 더 고안해보겠습니다.”
“그래도 일단 얘기는 해 봐. 다른 소드마스터가 있다는 전제로, 네가 생각했다는 방법이 뭔지.”
“그러니까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오러가 안정화된 소드마스터와 오러가 불안정한 소드마스터가 접촉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