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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혼담 (39/54)


39화. 혼담
2023.06.15.



“그게 무슨 말이지? 로즈벨리아 때문이라니.”

쏟아지는 시선에 얼굴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태연한 척 정면을 바라보는데 케이든이 발끈하는 게 보였다.


“슐츠, 말을 분명히 해야지. 그렇게 말하면 누님이 원인 제공을 한 것 같잖아. 누님 때문이 아니라 제가 부족한 실력으로 누님과의 대련을 욕심냈기 때문입니다.”

“대련?”

“케이든 너는 가만히 있으렴.”

올리비아가 팔을 다급히 잡아끌었지만 케이든을 막을 순 없었다. 주저 없이 올리비아의 손을 떼어낸 케이든은 헤르만에게 다가가 해명했다.


“실은 제가 누님과 대련하고 싶어서 슐츠를 찾아갔었어요. 누님의 검술을 오래 지켜봐 왔던 슐츠라면 제가 누님과 대련할 실력인지 아닌지 누구보다 정확히 판단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케이든 말이 사실인가?”

“예. 사실입니다. 도련님의 현재 실력으로는 로즈벨리아 아가씨와 대련할 수 없을 거라 판단했고 솔직하게 말씀드렸더니, 도련님께서 제게 따로 강도 높은 훈련을 부탁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케이든이 로즈벨리아와 대련할 실력을 갖추기 위해 강도 높은 훈련을 하다가 다쳤다는 말이군.”

헤르만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천천히 시선을 옮긴 나는 메인홀에 모여 있던 이들의 낯빛을 살폈다. 대다수가 수긍하는 기색을 보였다. 단 두 사람만이 예외였다.


“예. 도련님은 아주 영민한 분이십니다. 만약 제 훈련이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다면 먼저 그만두셨을 겁니다. 그 누구도 도련님께 훈련을 강요하지 않았으니까요.”

“아버지, 오히려 슐츠는 매번 저를 말렸는데 제가 조금 더 강도 높은 훈련을 원했어요. 그러다가 다친 거고요.”

“아시다시피 제 훈련 방법은 녹록지 않은 편이고, 도련님이 수련 중에 상처를 입으신 건 제 불찰이기도 합니다. 마님의 심려가 깊으신 듯하니, 저는 앞으로 도련님의 수련에 관여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슐츠와 케이든의 말이 이어질수록 올리비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는 게 보였다. 옆에서 마가렛이 무어라 말하려는 듯 몸을 기울였지만, 올리비아는 듣기 싫다는 듯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술을 훈련하다가 다치는 건 흔한 일이지. 케이든 너도 이제 어린 나이가 아니니 검술 스승 정도는 원하는 이로 정하는 게 좋겠구나.”

“헤르만!”

올리비아가 날 선 목소리로 외쳤다.

인자한 주인마님의 모습을 표방하더니 저렇게 감정 조절을 못 해서야.

이럴 땐 차라리 충격을 받아서 쓰러지는 모습을 연출하는 게 나을 텐데.


“저는 슐츠와 훈련하는 게 좋습니다.”

“올리비아, 당신이 케이든을 걱정하는 마음은 알지만 윈터스 가문의 차기 가주가 검술 스승 정도는 원하는 이로 정하는 게 맞지 않겠소. 게다가 스스로 혹독한 훈련을 자처했다니 그 마음가짐 또한 나쁘지 않다고 보는데.”

“감사합니다, 아버지.”

사건의 본말은 명확하게 전했고, 케이든이 원하는 대로 슐츠와의 훈련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고, 슐츠가 나에 대해 모함할 거라고 기대한 올리비아의 뒤통수까지 치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결말이었다.

나는 후련한 표정으로 서 있는 슐츠에게 슬쩍 눈인사를 건네고 유유히 돌아섰다. 메인 홀이 아직 혼란한 틈을 타 2층으로 올라오니 앤이 기다렸다는 듯 내 뒤를 따랐다.


“아가씨, 이 정도로 괜찮으시겠어요?”

“괜찮냐니?”

“슐츠 경에게 그냥 솔직히 털어놓으라고 해도 됐잖아요. 마님께 아가씨를 모함하라는 사주를 받았다고…….”

“증거가 없잖아. 자칫했다간 내가 어머니를 역으로 모함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어.”

“에이, 설마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앤을 뒤로한 채 방 안에 들어섰다. 곧장 소파에 기대앉은 나는 앤에게 앉으라는 눈짓을 보냈다.


“이 저택에서 너처럼 나를 절대적으로 신뢰해주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 거 같아?”

앤이 눈을 데구루루 굴려보더니 이내 입을 다물었다.


“슐츠가 거기서 어머니께 나를 모함하라는 사주를 받았다고 말했다고 치자. 누군가는 슐츠의 말을 믿을지도 몰라. 근데 증거라고는 슐츠의 말뿐인데 어머니가 순순히 인정하셨을까? 분명 억울하다고 했을 테고, 아마 그 자리에서 평소와 슐츠와 내가 가까웠다는 걸 모두에게 상기시키겠지.”

올리비아는 두뇌 회전이 빠른 편은 아닌 듯하니, 마가렛이 옆에서 귀띔해줄 터였다.


“그럼…….”

“어머니와 슐츠는 이렇다 할 접점이 없으니 어머니가 분위기를 몰아가는 대로, 내가 어머니를 모함했다고 의심하는 사람이 분명 생겨날 거야. 그 상황에서 아버지가 누구 말을 더 신뢰할까?”

이 집안에서 판단을 내리는 이는 결국 헤르만이었다. 헤르만이 나보다 올리비아를 더 신뢰한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고.


“제 생각이 짧았어요.”

“너처럼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많았다면, 나도 모든 진실을 털어놓고 싶었을 거야.”

자고로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방심하고 있을 올리비아를 역으로 궁지에 몰아넣을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평소에 올리비아를 끔찍하게 위하는 헤르만의 태도를 생각하면 도리어 자충수가 될 확률이 높아 안전한 길을 택한 것이었다.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가씨 믿어요. 죽을 때까지 아가씨 편 해드릴 거예요.”

흔들림 없는 목소리였다. 로즈벨리아를 향한 앤의 진심을 고스란히 전해주는 듯한.


“그래? 든든한데?”

“그러니까 아가씨도 저는 믿으셔도 돼요. 제가 아가씨를 배신하는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요.”

앤이 제법 비장한 얼굴로 덧붙였다. 나는 애써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고마워.”

 

 

*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슐츠를 포섭했다며.”

“제 불찰이에요, 마님. 갑자기 태도를 바꿀 줄 몰랐어요.”

마가렛이 올리비아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슐츠가 돌보는 어머니의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라일리 가문에서 약을 구해준다고 접근했었다.

그의 올곧은 성미를 알기에 거절하지 않는 것을 섣불리 긍정이라고 여긴 게 탈이었을까. 몰래 슐츠를 감시하던 이도 그가 다른 누군가와 접촉한 적 없다고 했었다.


‘본관으로 오라는 호출에 순순히 응하기에 마님 쪽으로 마음을 정한 줄 알았는데.’

“내 꼴만 우스워질 뻔했잖아.”

“진정하세요, 마님. 아무래도 로즈벨리아 아가씨를 배신할 수 없었던 모양이에요.”

올리비아가 콧방귀를 꼈다. 아픈 가족보다 로즈벨리아와의 신의를 지키다니.


“그깟 신의가 뭐라고.”

“그래도 마님 얘기는 꺼내지 않아서 다행…….”

마가렛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올리비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어림없는 소리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물었다.


“내 얘기를 꺼냈으면? 누가 믿어주기나 했을까?”

“그렇기야 하지만……. 제가 이번 일은 위험하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계획대로만 됐다면 로즈벨리아 얼굴에 제대로 먹칠할 수 있었어. 네 말대로 로즈벨리아와 각별한 슐츠가 로즈벨리아를 모함할 거란 생각은 못 할 테니까. 모두가 진실이라고 여기지 않았겠어?”

이 저택에 발을 들이는 걸 부끄럽게 만들어주려고 했더니만.

올리비아가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어차피 이번 일은 시작일 뿐이었다. 올리비아의 계획은 로즈벨리아의 평판을 조금씩 떨어뜨려, 그녀가 제 발로 기꺼이 이 저택을 나가게 하는 것이었다.


“마님, 진정하세요. 아직 다 끝난 게 아니잖아요.”

“그래, 그 일은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는 거 맞지?”

마가렛이 이번 일만큼은 안심해도 된다는 듯 다부진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

한동안은 순탄한 나날이 이어졌다. 슐츠의 일을 마무리한 뒤, 줄곧 숙소에 머무른 덕이었다.

슐츠를 포섭해 나를 모함하려던 일은 시작에 불과했을 거다. 올리비아는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로즈벨리아를 끊임없이 궁지에 몰아넣으려 했을 터였다.

로즈벨리아도 어느 순간에는 환멸을 느꼈을 거고.

어쩌면 로즈벨리아가 타국으로 망명한 것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생각에 잠겨 걷던 나는 분주한 발소리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로즈벨리아 아가씨!”

내 앞에 멈춰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이는 후작저의 시종 중 하나였다.


“여긴 어쩐 일이야?”

“마님께서……. 광장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뭐? 어머니가 광장 어디에 계시는데?”

“메인 스트릿 17번지에 ‘스위츠 애비뉴’에 계십니다.”

스위츠 애비뉴라면 로즈벨리아의 기억 속에서 봤었다. 달콤한 디저트가 많아서 로즈벨리아가 광장에 나갈 때 종종 들렀던 곳이었다.

언제 한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머니가 거기에서 날 기다리고 계신다고?”

“네. 아가씨가 오실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전하라십니다.”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이건 좀 신박한 방법인데?

시종을 시켜서 나를 불러냈는데 내가 거절한다면, 후작저 사용인들 사이에서 금세 말이 나오겠지.


“어머니께 바로 간다고 전해드려.”

“알겠습니다, 아가씨.”

기사단 마구간에서 에밀리를 꺼내 온 나는 올리비아가 기다리고 있다는 디저트 카페로 향했다. 서둘러서 왔는데 올리비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뭐야, 올 때까지 기다린다고 전해놓고는 벌써 간 건가?

붐비는 1층을 뒤로한 채 2층으로 올라갔다. 비교적 한산한 2층을 둘러보았지만 역시나 올리비아는 없었다.

야외 테라스까지 확인하고 몸을 돌리려는데.


“로즈벨리아, 여기야!”

2층 테라스에서 웬 남자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저 사람은 백색기사단 선배인데?

이름이 뭐였더라. 에르노아 디아즈였던가.

특이점은 한쪽 뺨을 가릴 정도로 길게 내려오는 앞머리를 고수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머리에 가려진 눈이 붉은 오드아이라는 거.


“선배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남자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일단 앉아.”

의자에 앉자 에르노아가 내 앞으로 디저트를 내밀며 물었다.


“넌 아무것도 듣지 못한 거야?”

“뭘요?”

“윈터스 가문에서 우리 디아즈 가문에 혼담을 제안했어.”

“윈터스면……. 저희 가문이요?”

혼담이라니? 이건 또 무슨…….


“그래, 정략혼인의 대상은 너랑 나고.”

실소가 터져 나왔다. 혼담이 하루아침에 뚝딱 오갈 리도 없으니, 미리 계획하고 있었단 건데.

슐츠 일이 순조롭게 마무리됐다고 너무 방심했나.


“저기, 선배님.”

“물론 너와 결혼하려고 여기에 나온 건 아니야.”

“……그럼요?”

“그다지 결혼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어머니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나온 거야.”

“저는 애초에 이 자리에 대해서 들은 바가 없었어요. 어머니가 갑자기 불러내서 나온 건데, 선배님과 이런 얘기를 할 줄은……. 저도 지금은 결혼할 마음이 전혀 없거든요.”

내 앞에는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들이 산재해 있었다. 새드 엔딩으로 점철된 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랬구나. 그럼 돌아가서 혼담 건은 서로 잘 정리하는 걸로 할까?”

그는 알만 하다는 눈초리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물었다.


“네, 좋아요.”

뭐지?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된다고?

올리비아가 혼담을 넣었다면, 성사될 만한 가문이라고 생각해서 넣은 걸 텐데.


“……사실 내가 여기 나온 건 너에게 궁금한 게 있어서야.”

“저한테요?”

나는 뭐든 물어보라는 듯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린 에르노아가 나를 마주 보았다.


“로즈벨리아는 어디로 갔어?”

마치 가벼운 일상을 묻는 듯한 덤덤한 목소리였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이고 나서야 그의 말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다.

로즈벨리아가 어디로 갔냐니? 내가 로즈벨리아인데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네? 지금 뭐라고…….”

때마침 바람이 불어닥쳤다. 길게 늘어뜨린 에르노아의 머리칼이 휘날리며 오드아이가 드러났다. 선명할 정도로 붉은 눈이 마치 나를 꿰뚫어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찰나였다.


“그 몸에 원래 있던 로즈벨리아 말이야. 어디로 갔는지 내내 궁금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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