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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로즈벨리아 아가씨 때문입니다 (38/54)


38화. 로즈벨리아 아가씨 때문입니다
2023.06.12.


아슴푸레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 풀벌레가 찌르륵거리는 소리…….

잠깐? 풀벌레라니?

퍼뜩 놀라서 눈을 뜨니 어둠에 잠긴 풀숲이 보였다.


“일어나셨습니까.”

미약한 고갯짓으로 대답을 대신하곤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상황을 파악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여긴 오러를 연습했던 풀숲이고, 난 밀려오는 잠을 이기지 못했고, 이안의 어깨에 기댄 채로 본격적으로 잠을 잔 건가?


“얼마나 이러고 있었던 거야? 그냥 깨우지.”

“얼마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말이 거짓이라는 건 금세 알 수 있었다. 이곳에 올 때만 해도 흐린 빛무리에 가까웠던 달이 환한 빛을 내뿜고 있었으니까.


“몸은 어떠십니까.”

“아무렇지도 않아. 한숨 자서 그런지 오히려 개운해.”

“다행입니다.”

내내 뻣뻣하게 들려왔던 목소리는 한결 부드럽게 풀어져 있었다. 옅은 웃음기까지 섞인 음성이라 그런지 괜스레 귓가가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근데 저게 뭐지? 자다 깬 지 얼마 되지 않아 헛것이 보이는 건가?

눈을 몇 차례 끔뻑거려 보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시야에 보이는 건 이안의 손을 부여잡고 있는 내 손이었다.

이안은 손바닥을 쫙 펴고 있을 뿐이었고, 그런 그의 손을 꼭 부여잡고 있는 건 분명 내 손이 맞았다.

그대로 손끝을 말아쥐려다 움찔했다. 그제야 손끝의 감각이 선명해진 탓이었다.

굳은살이 박인 그의 손은 크고, 단단했고, 따뜻했다.

나 진짜 가지가지 했구나.


“이만 숙소로 돌아갈까?”

시선을 숲길 너머로 던지며 태연히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 모른 척할 심산이라 풀숲을 빠져나가는 걸음이 조급했다.

그런데 어째 뒤따르는 이안의 기척이 이상했다.


“클라인?”

따라오는 걸음이 늦다고 생각했는데 걷는 모양새가 다소 불편해 보였다. 왼쪽으로 몸이 기울어진 걸 보니 오른쪽 다리에 쥐가 난 모양이었다.


“나 때문에 불편하게 있어서 그런 거지?”

“다리가 조금 저린 것뿐입니다. 저는 천천히 뒤따르겠습니다.”

“내가 부축해줄게. 나한테 기대.”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간 나는 망부석처럼 서 있는 이안의 앞에 섰다.


“괜찮…….”

“나는 너한테 제대로 도움받고 있잖아. 이런 거라도 하게 해줘.”

허리에 팔을 두르자 이안이 크게 움찔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 반응에 도리어 당황한 건 나였다.

너무 스스럼없이 굴었나 싶어 조심스럽게 손을 내리려는데, 이안이 내 손목을 붙들었다.


“그럼 저 나무 앞까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알았어. 나한테 더 기대도 돼.”

이안이 그제야 내 쪽으로 살짝 체중을 싣는 게 느껴졌다. 허리를 더 바짝 끌어안자, 그가 흠칫하며 내 어깨 위에 팔을 둘렀다.

걸음을 떼려던 나는 왼쪽 어깨를 힐긋 돌아보았다. 내 어깨에 손이 닿지 않게 원천 봉쇄라도 하듯 꽉 쥐어진 주먹이 보였다.

차라리 태연하게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면, 도리어 아무렇지 않았을 텐데…….

동료니까 조금 더 편하게 대해도 된다고. 혀끝까지 차오른 말을 뱉기만 하면 되는데.

왜인지 꽉 맞붙은 입술은 좀처럼 떼어지지 않았다.


“……갈까?”

“네.”

간신히 꺼낸 물음에 이안이 짧게 대답했다. 왼 어깨에서 시선을 떼어낸 나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습습히 부는 바람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오늘따라 바람마저 간질거린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뗐다. 뒤에선 여전히 풀벌레가 찌르륵거렸다.


 

*



“아가씨!”

2층 복도에 들어서자 내 방 앞에 서 있던 앤이 기다렸다는 듯 내 앞으로 달려왔다.


“조심해. 그러다 넘어지겠어.”

“사흘 만에 오신 거잖아요. 토벌 떠나시기 전엔 그냥 편하게 저택에 머무시지.”

앤이 볼멘소리로 투덜댔다. 훈련 때문에 기사단 숙소에 머물겠다고 전한 뒤, 꼬박 사흘을 숙소에서 지냈다.


“서신은?”

앤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딜런에게서 회신이 왔다는 전언을 듣지 않았다면 계속 그곳에 머물고 싶을 정도로 숙소가 편했다.


“제가 잘 숨겨두었어요.”

“시종한테 전하라고 해도 됐을 텐데.”

“그건……. 아가씨가 너무 저택에 안 오시니까.”

앤은 이전에도 종종 시종을 보내 로즈벨리아에게 돌아오라고 채근하곤 했다. 앤은 로즈벨리아가 이 집 안에 머물길 바라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으니까.


“잘했다고 칭찬하려는 거야.”

“저는 아가씨가 조금이라도 편히 쉬셨으면 좋겠어서…….”

“알아, 고마워.”

“훈련이 많으셨던 거예요? 곧 토벌에 떠나야 해서요?”

“뭐, 그렇다고 봐야지.”

숙소에 머무는 동안 내내 오러를 연습했다. 매번 같은 패턴이었다. 이안이 곁에 있다고 안심해서 오러를 마음껏 운용했고, 쏟아지는 수마를 못 이겨 눈을 감았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땐 늘 이안의 어깨에 기댄 채였다.


“여기요, 아가씨.”

앤이 건넨 서신을 열어보았다. 딜런이 내게 보낸 회신은 간단했다.

‘네 말대로 홀튼 가문에서 의뢰가 들어왔더구나. 서두르라고 일러두었다만 마수의 독을 해독하는 약을 제조하는 건 녹록지 않은 일이라 시일이 걸릴 거다. 조만간 후작저에 갈 일이 있으니 그때 얘기를 더 나누자꾸나.’
 


“아가씨가 기다리셨던 답변인가요?”

“좀 애매하네.”

후작저는 보는 눈이 한둘이 아닌데 여기서 어떻게 얘기를 하겠다는 거지?


“주세요, 제가 태울게요.”

“고마워.”

앤이 미리 준비해둔 욕탕에서 몸을 담그고 나온 나는 바로 서재를 찾았다.


“……포르투나, 라는 이름은 어디에도 없네.”

분명 여자 목소리였고, 평범한 존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신’이 아닐까 추측했지만 폰네스 제국사에서 그런 이름을 찾을 순 없었다.

애초에 폰네스 제국은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종교를 장려하는 분위기도 아닌 거 같고. 제국이라는 명칭을 내세우면서 오히려 ‘신’의 존재를 깎아내리고 구심점을 ‘황제’에게 두려고 했던 거 같은데.

폰네스 왕국이었다가 영토를 확장하면서 ‘제국’이라는 명칭을 내세운 거니까 그 이전의 역사를 찾아봐야 하나?

서재 밖에서 간결한 노크 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앤이었다.


“아가씨, 저녁 식사 준비 끝났대요.”

“그래? 슐츠는?”

“아까 본관에 들어오시는 거 확인했어요.”

“그럼 슬슬 내려가 봐야겠네.”

오매불망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텐데 기대에 응해줘야지.

나는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앤의 근심 어린 시선이 걸음걸음마다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걱정하지 마.

스쳐 지나가듯 그 말을 전한 뒤 입매를 한껏 당겨 보이자, 앤이 그제야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다녀오세요, 아가씨.”

“응.”

 

*

식당으로 향하는 길목이었다. 메인 홀에 다다르자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론에게 다 들었단다.”

“아론이요?”

뒤이어 들려온 건 케이든의 목소리였다. 올리비아가 준비한 연극의 막이 오른 모양이었다.


“다쳤으면 바로 얘기를 해야지. 왜 숨기고 있었던 거니?”

“그건……. 수련하다가 그냥 조금 다친 것뿐이라서 말씀드리지 않았던 거예요.”

“조금 다쳤다고? 아론에게 듣기론 조금이 아니라던데.”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요새 슐츠와 훈련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혹시 슐츠가 너에게 가혹하게 군 거니?”

올리비아가 힐긋 나를 보는 게 느껴졌다. 연극에 제대로 몰입한 건지 올리비아의 목소리는 점차 격양되고 있었다. 그 덕에 제대로 시선이 쏠리고 있었다.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무슨 소란이오, 올리비아.”

헤르만의 등장에 올리비아가 돌연 얼굴을 감싸 쥐었다. 제자리에서 살짝 비틀거리는 연출까지 더해져 마치 비련의 여주인공 같았다.


“케이든이 슐츠와 훈련하다가 심하게 다쳤다는데……. 너는 윈터스 가문을 이을 차기 가주야. 내가 어떻게 걱정을 안 할 수가 있겠니.”

“아놀드가 아니라 슐츠와 수련을 한 게냐?”

헤르만의 물음에 케이든이 다부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원해서 슐츠에게 수련을 청한 겁니다. 심하게 다친 것도 아니고요.”

“아론이 네 몸 곳곳에 멍이 있는 걸 봤다는데 심하게 다친 게 아니라니…….”

“네가 가서 슐츠를 데려오도록 해.”

이마를 짚고 있던 헤르만이 케이든을 보좌하는 남자 시종인 아론에게 명령했다.


“안 그래도 제가 어찌 된 영문인지 들어보려고 부른 참이에요.”

올리비아의 손짓에 마가렛이 응접실이 있는 복도 쪽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가렛과 함께 슐츠가 모습을 드러냈다.

꿈에서 이미 한 번 봤던 상황이지만, 직접 보니 더 가관이었다.

이렇게 치밀하게 준비해뒀는데 내가 계속 저택에 안 왔으면 어쩔 뻔했어.


“이건 달리 설명이 필요한 일이 아니에요, 아버지. 저는 슐츠와 그저 훈련한 것뿐이라고요.”

“헤르만, 케이든 말처럼 단순한 훈련으로도 심하게 다칠 수 있는 거예요? 저는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아서…….”

올리비아가 왼뺨에 손을 올린 채로 고개를 살래살래 내저었다.


“슐츠, 자네가 말해보게. 그저 자네와 훈련했을 뿐이라는 케이든이 어째서 멍투성이가 될 정도로 다친 건지.”

케이든과 올리비아를 차례로 지나친 슐츠가 헤르만 앞에 섰다. 바닥을 울리는 묵직한 발소리가 멎자 저택 내부에 스산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건…….”

말끝을 흐린 슐츠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나를 똑바로 마주한 그는 짧은 침묵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로즈벨리아 아가씨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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