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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오러 연습 (37/54)


37화. 오러 연습
2023.06.08.



 
연무장 내에 답답한 공기가 감돌았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목검을 잠시 내려놓고 머리를 묶었다.

문이라도 열어 놓을까 고민하는 찰나, 벌컥 소리와 함께 연무장 문이 열렸다.

에드윈인가?


“로즈벨리아 경, 여기 계셨군요.”

인사를 건네려던 두 입술이 그대로 다물렸다. 모습을 드러낸 건 리나트였다.


“부단장님? 여긴 무슨 일로…….”

“연무장을 찾은 이유야 뻔하지 않겠습니까.”

연무장이란 기본적으로 검술을 훈련하는 곳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여길 찾아온 이유가…….


“여기서 훈련하시려고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리나트의 입가에는 어느새 부드러운 미소가 덧그려져 있었다.

인상은 참 좋은데, 왠지 불편하단 말이야.


“아뇨, 그런 건 아닌데…….”

리나트에게서 살짝 비켜나간 시선 끝엔 콘라드가 있었다. 어제는 콘라드가 뜬금없이 연무장에 나타나더니 오늘은 리나트까지.

7연무장이 그나마 한적한 곳이라고 수호기사단 기사들 사이에 소문이라도 난 건가.

나는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콘라드와 리나트를 번갈아 보곤 다시 목검을 들었다.

어차피 같이 토벌도 떠나야 하는 마당에 내가 굳이 피할 필요는 없지.

나는 은근하게 쏟아지는 시선을 무시한 채, 로즈벨리아의 검술을 구현하는 것에 집중했다.

흉내 내는 정도가 아니라 그녀의 검술을 제대로 구현해낼 수 있다면 오러도 부작용 없이 쓸 수 있지 않을까, 머릿속엔 그 일념 하나였다.

이전 삶에서도 거저 얻어지는 건 없었다. 펜싱할 때 스텝을 간결하게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스텝 훈련을 했던가.

끈기 있게 매달리는 건 자신 있었다. 방법만 찾을 수 있다면 뭐든 해볼 심산이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고개를 가벼이 숙인 채 숨을 고르자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턱까지 흘러내렸다.

한결 개운하다는 생각에 절로 미소가 지어지려는 찰나, 연무장 문이 활짝 열렸다.


“선배님, 여태…….”

바닥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한 이안의 눈이 크게 뜨였다.


“클라인.”

성큼성큼 내게로 걸어오는 이안을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그나마 반가운 얼굴이라 작게 웃어주기까지 했는데, 돌연 시야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시야가 온통 하얬다. 이거 백색기사단 망토인 거 같은데?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땀을 얼른 닦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뭐?”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땀 좀 흘렸다고 망토를 내던진 거야?

대충 닦는 시늉만 하고 망토를 치우자 이안의 옆얼굴이 보였다. 이안은 다소 무표정한 얼굴로 리나트와 콘라드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여긴 왜 온 거야?”

“오늘 연습하겠다고 하셨잖습니까.”

아아, 그랬었지.


“근데 지금은 좀 이르지 않아? 아직 해가 중천에…….”

힐긋 창밖을 살핀 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바깥은 어느새 저녁 어스름이 짙어가고 있었다.

언제 해가 졌지?

허리를 숙인 이안이 내 옆에 굴러다니는 목검을 집어 들었다. 보관통에 목검을 넣고 돌아온 그의 팔에는 내 망토가 들려 있었다.


“이만 가시죠.”

망토를 건네받은 나는 이안의 뒤를 따르며 입을 열었다.


“근데 말이야. 땀 좀 흘려서 얼굴이 엉망이었다고 해도 갑자기 망토를 내던진 건 좀 지나치지 않아?”

“누구 얼굴이 엉망이었단 겁니까?”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자 이안이 어이없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그럼 왜 그런 건데?”

이안은 대답 대신 내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곧 작게 헛웃음을 터뜨린 그가 머리를 쓸어올렸다. 내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굳게 다물린 입술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가시죠.”

뭐야, 싱겁긴.

*



“괜찮으십니까?”

검을 검집에 넣은 로즈벨리아가 입가를 급히 틀어막았다.


“괜찮아.”

비틀거리는 로즈벨리아를 품에 안은 이안이 주머니에서 린넨을 꺼냈다. 그 모습을 보던 로즈벨리아의 눈매에 희미한 웃음기가 어렸다.


“……지금 웃음이 나오십니까.”

“나 잠깐 눈 좀 감고 있어도 될까?”

“혹시 아프신 겁니까?”

린넨으로 입가를 대충 닦아낸 로즈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네가 있으니까 마음이 놓여서.”

“…….”

그 말을 듣고 차마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없었다. 이안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왜 그런 표정이야? 아프지 않다니까. 오히려 네 덕분에 마음껏 연습할 수 있어서 좋아.”

둥글게 말린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이내 눈꺼풀의 움직임이 점점 느려지는 듯하더니 어느 순간엔 두 눈이 굳게 닫혔다.


“저는…….”

이안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고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잇새로 흘러나가는 건 한숨뿐이었다.

주위를 가만히 둘러보던 그는 큰 나무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품에 안고 있던 그녀의 등을 먼저 나무에 기대게 하고, 그 옆에 조심스레 앉았다.

로즈벨리아의 머리를 제 어깨 위로 기대게 한 이안이 밭은 숨을 내쉬었다. 로즈벨리아가 오러를 운용하는 내내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괜찮다고 하는데도, 피를 토하는 그녀를 볼 때마다 매번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던 그는 며칠 전, 빈센트 글레이저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제가 온갖 기록을 살펴보긴 했지만 그런 경우를 본 기억은 없습니다. 오러를 운용한다는 건 감지하는 오러의 양이 많다는 거고, 그 경지에 이르렀다면 이미 안정된 오러를 지녔을 텐데요.’

‘처음에는 아무런 부작용 없이 오러를 운용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오러를 사용하고 나면 피를 토하고 어지럼증이 생긴다고 들었어. 몸이 나른해지면서 졸음이 밀려오기도 하고.’

‘희귀한 케이스인 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건 제 추측이지만 피를 토한다는 건, 내상일 확률이 높습니다. 오러에 자가 치유 능력이 있어 금방 멎는 것일 수 있거든요. 그런 상태가 장기적으로 지속된다면 몸에 무리가 갈 겁니다. 어쩌면…….’

빈센트가 생략한 뒷말을 알 것 같았다.

「오러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면 오히려 검사의 생명력을 갉아먹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

그가 집필한 책을 꽤 인상 깊게 봤었으니까.


‘오러를 안정화할 방법을 찾아야 해.’

‘제가 연구해보겠습니다. 대신 그분을 꼭 한 번 만나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소드마스터의 실물을 영접하는 건 제 평생의 꿈이거든요.’

‘좋아. 시간이 많지 않으니 서둘러줬으면 하는데.’

‘알겠습니다. 제가 미처 살피지 못한 기록이 있을 수 있으니, 오러에 관한 모든 기록을 다 뒤져서라도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내상이니 생명이니 신경에 거슬리는 부분들이 있었지만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방법이 됐든 오러를 다시 안정시킬 수만 있다면 모든 게 다 해결될 터였다.

이안은 제 어깨에 기댄 채로 곤히 잠든 로즈를 내려다보았다.

정말 아프다면 이렇게 편안한 미소를 지을 순 없겠지.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 애써 시선을 돌렸다가, 또다시 속절없이 고개가 내려앉았다.

안 보고 있으면 보고 싶은데, 보고 있으면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으음.”

찰나 로즈벨리아가 무어라 웅얼대자 이안은 곧바로 그녀의 안색부터 살폈다.


‘불편한 기색은 없어 보이는데 잠꼬대를 한 건가?’

로즈벨리아는 더 깊은 잠을 청하려는 사람처럼 이안의 어깨에 더 깊숙이 고개를 맞붙여왔다. 그 순간 상체가 기우는 듯싶더니, 그녀의 손이 그의 허벅지 위로 툭 내려앉았다.

움찔하고 놀란 이안이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그저 손끝이 닿았을 뿐인데 마치 화상을 입은 것처럼 뜨거웠다. 아니, 온몸의 세포가 날뛰는 것 같았다.

피가 쏠리는 듯한 감각에 잇새를 앙다물었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떨어뜨려 놓은 뒤에야 제대로 된 호흡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나무에 바짝 등을 기댄 채로 차분히 숨을 골랐다. 문득 네이슨의 물음이 떠오른 건 그때였다.


‘황자님은 로즈벨리아 님과 어떤 관계가 되고 싶으세요?’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어 그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는데.

이안의 시선이 로즈벨리아의 얼굴 위로 재차 내려앉았다. 그저 잠든 얼굴을 보는 것뿐인데 마음 한구석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내가 바라는 건 그저…….’

그녀의 올곧은 시선이,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가 향하는 곳이 늘 나이기를.

그녀가 기댈 수 있는…….

찰나 사고의 흐름이 삐걱거렸다.

애써 떨어뜨려 놓은 로즈벨리아의 손이 이번엔 그의 손등 위로 툭 내려앉은 탓이었다.


 
고개를 뒤로 젖힌 이안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까마득한 밤하늘을 오롯이 새겨넣은 듯한 눈동자가 거칠게 일렁였다.

……그녀에게 닿을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오직, 나 하나뿐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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