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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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대면
2023.06.05.
“데이지 님?”
내 부름에 데이지가 훌쩍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로즈벨리아 님, 마수 토벌을 떠나시는 게 사실인가요?”
“네. 토벌 명단에 뽑혀서…….”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데이지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설마 지금 나 때문에 우는 건가? 내가 토벌 명단에 뽑혀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손끝만 움찔거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투명한 원석처럼 빛나는 눈동자를 마주하며 멋쩍은 미소를 짓는 것뿐이었다.
“로즈벨리아 님이 강하다는 건 알지만 마수라니 너무 위험할 거 같고……. 그래서 걱정되고…….”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기세인 데이지 뒤로 에드윈이 쭈뼛거리며 다가오는 게 보였다.
“저는 무사히 돌아올 거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여태 그래왔고 이번에도 손끝 하나 다치지 않을 거예요.”
“레이디, 아까도 제가 말씀드렸지만 로즈는 백색기사단 내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랍니다. 그러니 크게 상심하지 마세요.”
한쪽 팔에 망토를 안고 있던 에드윈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로즈요?”
되묻는 데이지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뭐지, 이 반응?
“아, 로즈는 로즈벨리아의 애칭입니다.”
“두 분이 친하신가 봐요.”
내 품에 안겨 있던 데이지가 에드윈을 휙 돌아보았다. 가늘어진 눈매며, 비죽 내민 입술이며 무언가가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설마 데이지가 에드윈에게 벌써 관심이 생긴 건가?
하기야 연회에서 에드윈이 데이지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긴 했지.
“그럼요, 저랑 로즈가 또 기사단 입단 동기거든요. 그래서 친분이 두텁답니다.”
에드윈 너 데이지에게 직진할 마음이 있긴 한 거니?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앞에 두고 다른 여자 애칭을 부르면서 친하다고 하면, 데이지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겠어!
“데이지 님, 저희가 보통 동기끼리는 다 친하게 지내서 에드윈과 저만 각별하게 친하거나 그러진 않아요.”
“아아, 그렇군요. 그럼 로즈벨리아 님은 누구와 친하세요?”
샐쭉했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눈을 아래로 흘긋 내리니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이는 눈망울이 보였다.
“저는……. 글쎄요.”
지금의 나에게 친한 사람을 굳이 꼽으라고 한다면…….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마치 그림자처럼 내 옆에 가만히 서 있던 이안이 슬쩍 나를 보는 게 느껴졌다.
뭐야, 저 기대하는 듯한 눈빛은.
“그럼 저랑 친해져요, 로즈벨리아 님.”
“네?”
에드윈이 아니라요?
“데이지?”
불쑥 끼어든 목소리에 데이지가 놀란 듯 입을 작게 벌렸다. 아까부터 이곳을 힐끔거리는 몇몇 단원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건 리나트였다.
“오라버니.”
“여긴 또 무슨 일로 온 거니.”
“아, 그게……. 로즈벨리아 님에게 망토를 가져다드리려고 왔어요.”
데이지가 에드윈 쪽을 힐끔 보았다. 그러자 에드윈이 싱긋 웃으며 망토를 흔들었다.
아아, 에드윈이 들고 있던 게 데이지가 가져온 내 망토였나 보네.
“그런 건 내게 부탁해도 됐을 텐데.”
“제가 신세를 진 거니까 직접 오고 싶었어요.”
어느새 리나트 앞으로 다가선 데이지가 입술을 비죽 내밀며 말했다. 리나트는 데이지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이내 내게 시선을 돌렸다.
“제 동생이 경에게 무슨 무례를 저지르진 않았습니까.”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에 데이지가 움찔하며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뇨, 그저 데이지 님과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리나트가 돌연 말을 멈추었다. 놀란 듯 커진 눈동자를 보아하니 내 옆에 있는 이안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오라버니?”
잠시 얼어붙은 듯했던 리나트가 움찔하며 데이지를 돌아보았다. 정작 내 옆에 있는 이안은 태연하기만 했다.
“그럼 저는 동생을 데리고 먼저 가보겠습니다.”
“가볼게요, 로즈벨리아 님.”
“나중에 또 봬요, 데이지 님.”
꼬리가 축 처진 강아지처럼 풀이 죽어 있던 데이지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네!”
씩씩하게 대답하는 그녀의 얼굴에 천진한 미소가 어렸다.
뭐야, 저렇게 귀여워도 되는 거야?
“로즈, 저 미소 봐. 너무 아름답지 않니?”
소리도 없이 내 옆에 쓱 다가온 에드윈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래.”
정신없는 와중에도 한 가지 확신할 수 있었던 건, 데이지가 이안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는 거였다.
데이지는 바로 내 옆에 있던 이안에게 단 한 번의 눈길도, 눈곱만큼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적어도 이번 삶에선 데이지가 이안을 짝사랑하면서 고통받을 일은 없다는 거네.
데이지의 병이 심해지지 않게, 적어도 지금보다 더 나빠지지 않게 관리해주려면…….
“나도 또 뵐 수 있을까?”
이미 저만치 멀어진 데이지의 뒷모습을 보던 나는 에드윈 쪽으로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에드윈과 데이지.
둘이 만날 수 있는 구실이 생긴다면 좋을 텐데…….
주기적으로 운동이 필요한 데이지와 발목이 다친 에드윈.
“어쩌면…….”
“응?”
“가능할지도 몰라.”
나는 고개를 갸웃하는 에드윈을 향해 씩 웃어 보였다.
*
달그락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유난히 거슬렸다. 올리비아가 이마를 꾹 누르자 옆에 앉아 있던 마가렛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마님, 많이 불편하세요?”
“조금.”
오늘처럼 제 사촌 언니이자 현 황후인 이블린을 알현하고 올 때면 간혹 두통이 도지곤 했다.
“마부에게 조금 천천히 가라고 이를까요?”
“그 정도는 아니야. 차라리 저택에 빨리 가는 편이 낫겠어.”
애써 마차 밖 풍경에 눈을 돌려보려 했지만 두통은 가시지 않았다. 질끈 눈을 감은 올리비아가 옅은 숨을 내쉬었다.
‘올리비아, 넌 아직도 전 후작 부인을 의식하는구나.’
‘황후 폐하, 저는…….’
‘지금 그 자리에 있는 건 너야. 긴 시간 동안 잘 지키고 있잖니. ’
‘…….’
‘죽은 사람은 아무런 힘이 없단다. 그러니 이제는 조금 더 여유를 가지렴.’
‘의식하는 게 아니라 거슬리는 거예요. 릴리아나는 죽었지만 그 딸은 버젓이 남아서 저택을 휘젓고 다니니까요.’
올리비아는 어린 로즈벨리아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직감했다. 저 아이가 제게 거슬리는 존재가 될 거란 걸.
헤르만과 닮은 구석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품어주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로즈벨리아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릴리아나를 쏙 빼닮은 외모였다.
커갈수록 그 미모는 빛을 발했고, 이따금 로즈벨리아와 릴리아나가 겹쳐 보일 정도였다.
찬란한 금발과 녹색 눈동자를 마주할 때마다 올리비아는 자기합리화를 해야 했다.
이 자리는 내가 빼앗은 게 아니라고. 내 자리를 되찾은 것뿐이라고.
‘그 아이 이름이 로즈벨리아라고 했던가. 지금쯤 혼처를 구할 나이겠구나.’
‘네. 안 그래도 조만간 혼인시켜 내보낼 생각이에요.’
‘아주 좋은 생각이구나. 올리비아, 너는 조금 더 현명한 후작 부인이 되어야 해. 우리 라일리 가문을 위해서도 말이야.’
‘네, 황후 폐하.’
‘내가 너에게 늘 당부한 게 있지?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란다. 그러니 조급하게 굴어선 안 돼. 네가 그 자리를 어떻게 손에 쥘 수 있었는지 늘 명심하렴.’
이블린은 제게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조급하게 굴어선 안 된다고.
그래서 여태 참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슬슬 한계에 내몰리는 기분이랄까.
로즈벨리아를 볼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살아 돌아온 릴리아나를 다시 마주하는 것 같아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마가렛.”
“예, 마님.”
“내가 저번에 얘기했던 거 있지? 그거 빨리 진행해야겠어.”
“알겠습니다.”
*
이안이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툭툭, 태연한 표정과는 다르게 어딘가 초조한 기색이 묻어나는 소리였다.
“황자님, 마수를 연구하는 황실 연구원은 왜 부르신 거예요?”
“물어볼 게 있어서.”
이안은 기사단에서 돌아오자마자 황실 연구원 한 명을 호출했다. 공식적으로는 마수를 연구하는 부서에 속해 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오러에 오랜 기간 관심을 보인 이였다.
“혹시 마수 토벌에 가실 건 아니죠? 폐하께서 아시면…….”
“내가 간다고 하면 말리실 분은 아니야.”
“그렇기야 하지만,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날 걱정하는 거야? 아니면 혼자서 업무를 처리해야 할 네 걱정이 되는 거야?”
이안의 장난기 섞인 물음에 네이슨이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당연히 황자님 걱정…….”
1황자 집무실에 노크 소리가 울려 퍼진 건 그때였다. 이안의 눈짓에 네이슨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문 앞에 서 있는 건 보랏빛의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남자였다.
“1황자님을 뵙습니다.”
“들어오시죠.”
남자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집무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습니까, 황자님.”
“공식적으로는 마수를 연구하는 부서에 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오랜 기간 오러에 관심을 가져왔다던데, 맞나?”
“예, 그렇습니다. 황실 연구원 빈센트 글레이저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