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제가 함께 있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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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제가 함께 있어 드리겠습니다
2023.06.01.
푸른빛을 띤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그 미세한 진동이 멎어 들어갈 때쯤 이안이 내게 물었다.
“그렇다는 건 선배님이 소드마스터라는 뜻입니까?”
“그래, 그런데 어느 순간 오러가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고, 그 이후부터 오러를 쓸 때마다 부작용이 있어. 그게 네가 목격한 그날의 진상이야.”
“그러니까 마수 때문에 내상을 입어서가 아니라 오러를 사용한 부작용 때문에 피를 토하신 거라고요?”
아주 깔끔한 정리였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안이 성마른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그때 제가 본 건 뭡니까? 숙소에서…….”
“그것도 부작용 때문이었어. 오러가 불안정하다고 느낀 이후로 연습하고 있었거든. 몰래 연습하고 돌아오던 길에 너를 마주친 거고.”
이안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수긍한다는 듯 위아래로 작게 고갯짓을 했다. 이윽고 내내 굳어져 있던 그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소드마스터라니……. 역시 그랬군요.”
“내가 소드마스터라는 걸 알고 있었어?”
“알았다기보다는 굳은살이 없는 손을 보고 선배님이 혹시 소드마스터가 아닐까 추측했습니다. 일전에 오러에 관한 책을 읽은 적 있었거든요.”
나와 같은 책을 본 건가?
오러에 대해서 잘 아는 것처럼 설명하다가 정작 오러를 다루는 방법에 대해선 모른다고 했던 그 책.
저자가 빈츠? 뭐, 그런 이름이었던 거 같은데…….
“아무튼 내 몸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마수와 싸울 땐 손끝 하나 다치지 않았으니까.”
“…….”
“확실한 게 좋다면 오러를 사용하는 걸 직접 보여줄 수도 있어.”
다 털어놓은 마당에 쐐기를 박는 편이 좋겠지. 더는 내상이니 뭐니, 의심하지 않게.
“……직접 보여주신다고요.”
이안이 낯빛을 흐렸다. 틈만 나면 대련하자고 하던 때처럼 냉큼 보고 싶다고 할 줄 알았더니, 왜인지 망설이는 모양새였다.
“싫으면 말고…….”
“그게 아니라 선배님의 말대로라면 오러를 쓰고 피를 토한다는 거잖습니까.”
이안은 마치 내 고통에 이입한 사람처럼 미간을 찌푸린 채였다.
“그게 눈으로 볼 땐 모양새가 좀 그런데 사실 별로 아프진 않거든. 그래서 괜찮아.”
“좋습니다. 정말 괜찮으신 건지 직접 봐야겠습니다.”
따라오라는 눈짓을 보낸 나는 이전에 오러를 연습했던 곳으로 향했다. 기사단 구석에 자리한 연무장을 지나쳐 조금 더 걷자 이내 나무로 우거진 숲길이 보였다.
“그날 밤에도 여기서 연습했었어.”
그 말을 뱉자마자 이안이 주위를 빠르게 휘둘러보았다. 호기심 어린 눈이라기보다는 어딘가 경계하는 눈빛에 가까웠다.
검을 뽑아 든 나는 곧장 오러를 운용했다. 이윽고 검 쪽으로 오러를 밀어내자 하얀빛이 감도는 게 보였다.
돌아서서 그대로 나무 한 그루를 베어냈다. 역시나 울컥 토기가 밀려들었다. 내가 입을 틀어막자 이안이 내게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그냥 피만 토할 뿐…….”
순간 눈앞이 빙글 도는 듯한 감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허리에 단단한 팔이 감겨든 건 그때였다.
“이게 정말 괜찮은 거라고요?”
슬며시 눈을 뜨니 굳게 다물린 이안의 입매가 보였다. 서서히 확장되는 시야에 단단히 화가 난 듯한 얼굴이 가득 들어찼다.
“피를 토할 때만 아주 잠깐의 고통만 있을 뿐이야. 어지럼증도 마찬가지고.”
“오러를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까? 선배님은 소드마스터가 아니어도 충분히 강하십니다.”
“……알아, 나도.”
내가 이렇게 로즈벨리아의 검술을 구현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 제국에서 최고의 검술 실력을 지닌 검사일 거라고 자부했다.
검술의 경지에 올랐기 때문에 오러를 운용할 수 있는 거니까.
이안의 말대로 오러가 없어도 로즈벨리아는 분명 강하다.
“근데 난 오러를 꼭 다시 운용하고 싶어.”
로즈벨리아가 소드마스터라는 걸 몰랐다면 이 정도에 만족하고 살았을 수도 있지만…….
나는 원작에서 ‘로즈벨리아’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가 바로 로즈벨리아가 소드마스터였다는 게 알려지면서 제국이 들썩이는 구간이었다.
조연인데도 이렇게나 특별한 삶이라니, 동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이 몸에 들어왔기 때문에 더는 오러를 쓸 수 없는 거라면? 그건 결단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계속 이렇게 연습하실 거라고요?”
“마수 토벌에 가기 전까지 해야지.”
다른 사람은 모른다고 해도 나는 안다.
로즈벨리아의 이전 삶이 어땠는지, 내가 읽은 로즈벨리아의 과거가 어땠는지.
소드마스터가 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숨기려 했던, 그저 묵묵히 기사로서 제게 주어진 길만을 걸으려 했던 그녀의 긍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부작용이 없었던 겁니까?”
“응. 그땐 오러가 안정된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뭐랄까. 날뛰는 듯한 느낌이야. 그래서 어떻게든 다시 안정화하려고 노력하는 거고.”
차라리 내가 이 몸에 들어온 이후로 오러를 아예 운용할 수 없었다면 모를까.
불안정한 오러라도 쓸 수는 있기에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로즈벨리아’를 내 손으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부작용은 피를 토하고 어지럼증이 있는 게 답니까?”
“몸이 나른해지면서 졸음이 밀려오기도 해. 근데 잠깐 그러는 거라 괜찮아.”
그 찰나 내 허리를 감싸 안은 팔에 힘이 실렸다. 놀라서 고개를 들어 올리자, 깊은 심해에 잠긴 듯한 눈동자가 보였다.
“그 말.”
“…….”
“습관처럼 하는 거 아십니까.”
잇새가 절로 앙다물어졌다.
눈썰미가 좋다고 해야 할지. 사람을 간파하는 능력이 은근 뛰어나단 말이야.
이안의 말대로 이전 삶에서부터 난 늘 그래왔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게 편했고, 익숙했으니까.
괜찮다는 말을 습관처럼 늘어놓곤 했지만 그걸 알아주는 이나 지적하는 이는 없었다.
심지어 내가 가족이라고 칭할 수 있는 사람들마저도.
“…….”
“그래서 선배님이 하는 괜찮다는 말은 제게 신빙성이 없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선배님이 정말로 괜찮으신지 아닌지는 제가 판단할 겁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냐는 물음이 입안에 맴맴 돌기만 했다. 목을 간질거리는 느낌에 애꿎은 헛기침만 하는데, 그가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낮에만 연습하십시오.”
“그건 불가능해. 이런 몰골을 누구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안 되잖아.”
어지럼증이 완전히 가신 걸 느낀 나는 허리를 감싸고 있는 팔을 슬쩍 밀어냈다. 순순히 한발 물러선 이안은 한쪽 눈썹을 찌푸린 채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늘 밤에 연습하셨습니까?”
“그래야 마음 놓고 연습할 수 있어서. 근데 나 진짜 괜찮…….”
습관처럼 괜찮다고 말하려다 나도 모르게 이안의 눈치를 살폈다.
그 역시 나와 눈이 마주치자 허탈한 웃음을 짓다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어?”
“연습할 때 제가 함께 있어 드리겠습니다.”
응? 지금 뭐라고…….
내가 뭘 잘못 들었나?
“그러니까 앞으로는 제 앞에서만 연습하십시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을 거 같은데……. 피를 토하는 건 잠깐이고, 지금은 어지럼증도 다 가셨어.”
“그게 싫으시다면 지금이라도 선배님의 상태에 대해 단장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기껏 비밀을 털어놓았더니 치사하게.
아마 가브리엘 단장님이라면 마수 토벌에 못 가게 하거나 가더라도 오러가 안정화될 때까지 오러를 사용하지 말라고 하겠지.
“너 좀…….”
얄미운 거 알아?
혀끝까지 차오른 그 말을 애써 내리누르고 천천히 입매를 끌어올렸다.
“클라인, 네가 귀찮지 않을까?”
무어라 입술을 달싹이던 이안이 내 얼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닿을 듯 말 듯 느릿하게 가까워지던 그의 엄지가 입술 가장자리에 닿았다.
“그냥 오늘처럼 제가 옆에 있는 것뿐입니다. 어차피 이제 저는 선배님의 비밀을 다 알지 않습니까.”
부드러운 손길 때문일까. 걱정스러운 기색이 가득한 눈빛 때문일까.
입술 께에 닿았던 감각이 멀어지고 나서야 내가 숨을 잠시 멈추었다는 걸 깨달았다.
“…….”
밭은 숨을 작게 몰아쉬는 사이, 제 손끝에 묻어난 피를 내려다보던 이안이 길게 한숨을 내쉬는 게 보였다.
“선택은 선배님이 하시는 겁니다.”
누군가 곁에 있어 준다면 마음이 편하긴 할 터였다.
졸음이 얼마나 밀려들지 몰라 연습할 때 늘 조심했었는데, 앞으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거잖아?
“제게 선배님을 만류할 권한은 없다는 거 압니다. 그러니 연습할 때만이라도 제가 곁을 지키게 해주십시오.”
나를 응시하는 이안의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그 눈을 마주한 순간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알겠어.”
“연습할 때를 미리 일러주시면 숙소에 머물겠습니다.”
이안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비밀을 털어놓은 건 나인데, 어째 본인이 더 후련해 보이는 얼굴이네.
“……어쨌든 고마워.”
“별말씀을요.”
이렇게 흘러가도 되나 싶지만, 마음 한구석이 기묘할 정도로 편해졌다. 원작은 분명 바뀌고 있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이안은 원작 속 냉혈한 황태자 이안이 아니라 내가 아는 기사단 후배인 이안이니까.
“슬슬 갈까?”
“잠시만요.”
나를 불러 세운 이안이 품속에서 꺼내든 건 손수건이었다.
이런 걸 들고 다닐 이미지는 아닌데.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자 이안이 큼큼거리며 대답했다.
“어머니가 어렸을 때 주신 거라, 내내 몸에 지니고 다니던 겁니다.”
이안의 모친인 바이올렛이 준 손수건이라고?
“근데 이걸 왜…….”
그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내 손바닥을 조심스럽게 부여잡았다.
설마 지금 내 피를 닦으려는 건가? 바이올렛이 남긴 손수건으로?
그대로 손끝을 말아 쥐려는데, 이안의 움직임이 한발 빨랐다. 그는 손수건으로 내 손바닥을 꼼꼼히 닦고 나서야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제 된 거 같습니다. 지금은 정말로 아프지 않습니까?”
“그래, 멀쩡해. 그리고 이건 내가 깨끗하게 해서 돌려줄게.”
피가 얼룩덜룩 묻은 손수건을 뺏어 내 주머니에 넣었다.
그냥 모른 척해도 되는데 미련하다고 해야 할지. 착하다고 해야 할지.
풀숲에서 나와 얼마쯤 걷자 거리에 하나둘 오가는 단원들이 보였다. 나와 이안은 자연스레 그 틈 속에 섞여들었다.
“선배님은 수련장으로 가실 겁니까?”
“아, 나는…….”
뒤따르는 이안에게로 고개를 돌린 찰나였다.
“로즈벨리아 님!”
울먹이는 듯한 음성과 함께 누군가 내 품에 폭 안겨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