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몰라서 물으시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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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몰라서 물으시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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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몰라서 물으시는 겁니까?
2023.05.29.
“누구세요?”
몸을 뒤로 돌린 나는 어둠이 내려앉은 방 안을 빠르게 살폈다. 눈에 보이진 않았지만, 이 공간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기묘한 감각은 분명 전해지고 있었다.
“널 여기로 데리고 온 존재라고 하면 알려나?”
나를, 여기로 데리고 온 존재라면…….
‘네가 원했던 인생을 한번 살아 볼래?’
그러고 보니 내가 죽기 직전에 들었던 그 목소리잖아?
‘내가 너에게 다시 살 기회를 주겠다는데 싫다는 거니?’
그리고 로즈벨리아에게 다시 살 기회를 주었던 바로 그 목소리.
“나한테 묻고 싶은 게 많을 줄 알았는데.”
입이 좀처럼 떨어지질 않았다. 어디서부터 얘기를 꺼내야 하나, 머릿속이 그저 새하얬다.
“……맞아요.”
간신히 그 말을 뱉자 옅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근원지가 어딘지 도통 가늠할 수 없었다. 허공에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고, 내 귀에만 또렷하게 전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내게 묻고 싶은 게 뭔데?”
“꿈……. 제가 보는 꿈들의 의미가 궁금해요.”
“내가 너에게 보여주는 그 꿈들은 그 몸에 있던 로즈벨리아가 과거에 겪었던 일이야.”
역시나 내 예상이 맞았다.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원작 밖의 이야기.
“이걸 왜 제게 보여주시는 건가요? 시간은 왜 돌리신 거예요?”
“그 아이가 내 계획을 망쳐버렸거든. 그렇게 빨리 끝나버리면 안 되는데 말야. 뭐, 능력이 아깝기도 했고.”
“망쳤다는 게 무슨…….”
“나는 네가 그 아이와 다른 선택을 하길 바라. 그리고 그건 그 아이도 마찬가지였단다.”
처음엔 긴가민가했지만 목소리가 지칭하는 ‘그 아이’는 역시 진짜 로즈벨리아였다.
로즈벨리아가 계획을 망쳤다고? 빨리 끝나버리면 안 되는 일을 로즈벨리아가 끝내버렸다는 건가?
“……왜 하필 저를 이곳으로 데리고 오신 거죠?”
“너희 두 사람의 영혼의 결이 비슷했거든. 그래서 그 몸과 네 영혼의 상성이 맞았고, 이곳으로 널 데려올 수 있었어. 아마 네가 아니었다면 이 세계에 큰 균열이 생겼을 거야.”
로즈벨리아의 기억을 흡수했을 때, 나와 꽤 비슷한 환경이라고 생각하긴 했었다. 그래서 그 영혼의 결이라는 게 비슷했던 걸까.
“너희 둘이 꽤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우습게도 결정적인 순간에 너는 그 아이와 다른 선택을 하더구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가셨을 뿐인데 잇새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내가 긴장한 걸 눈치라도 챈 건지 금세 키들거리는 웃음소리가 전해졌다.
“이미 많은 것이 바뀌고 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심하라고 일러주는 거야. 어쨌든 널 이곳으로 데려온 건 나니까.”
“그럼 이 몸에 들어 있던 진짜 로즈벨리아의 영혼은…….”
“그 아이는 좋은 곳에서 편히 쉬고 있단다. 이제 진짜 로즈벨리아가 너라는 걸 명심하렴.”
또렷하게 들려오던 목소리가 점차 희미해져 갔다. 미지의 존재가 이곳을 떠나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챈 나는 다급히 그녀를 불렀다.
“잠시만요!”
“……무슨 할 말이 더 남았니?”
“원래 제 몸은 어떻게 되었죠?”
“안타깝게도 유재이는 그곳에서 죽을 운명이었어. 네 영혼이 소멸되기 직전에 내가 이곳으로 널 데리고 온 거야.”
유재이.
무려 20년 넘게 그 이름으로 살았는데. 얼마 전까지도 그 이름으로 불렸던 나인데.
새삼 어색한 기분이 든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혹시 제게 이름을 알려주실 수 있나요?”
“흐음, 내 이름 말이지? 그건 곤란한데…….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지금처럼 네가 조심해야 할 것들을 꿈으로 보여주는 것뿐이야.”
“……알겠어요.”
“앞으로는 눈치 보지 말고 너다운 로즈벨리아로 살아 봐. 너를 대신할 사람은 없으니까.”
잠시 멈칫했던 내가 고개를 슬며시 끄덕이려는 찰나였다.
“포르투나.”
“네?”
“그게 내 이름이야.”
바람결에 흩어지는 웃음소리를 끝으로 사위가 고요해졌다. 훈기가 머물렀던 방 안이 언제 그랬냐는 듯 싸늘해졌다. 그녀가 이곳을 완전히 떠난 것이었다.
포르투나, 라고 했지.
창문 앞에 다가선 나는 커튼을 열어젖혔다. 바깥에는 어느새 여명이 스며들어 있었다. 새벽빛이 어둠을 완전히 몰아낼 때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
저 멀리 솟아오른 태양을 보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어제와는 분명 다른, 하루의 시작이었다.
*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네 눈이 이상한 거면 내 눈도 이상하다는 건데…….”
마수 대비 수업에 참여한 수호기사단 기사들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모여들었다. 백색기사단 기사들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선 그들은 하나같이 눈을 끔뻑거리고 있었다.
“내 눈에도 보이는데……. 모두의 눈이 이상하진 않을 거 아냐?”
“그렇다면 저기 계신 분은…….”
“그래, 그대들이 생각하는 분이 맞다.”
리나트의 긍정에 몇몇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틀어막았고, 몇몇은 얼빠진 듯한 얼굴로 이안을 힐끔거렸다.
“그렇다면 정말 황자님께서…….”
“쉿, 목소리 낮추도록. 이곳에서 그분의 신분을 알고 있는 건 가브리엘 단장님과 우리뿐이다. 그분이 신분을 노출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해오셨으니, 경들도 실수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그럼 호칭은 어떻게…….”
“이곳에서는 ‘클라인’이라는 이름을 쓰시니 알아서들 부르도록. 나라면 마주치는 걸 되도록 피하려고 할 테지만 말이야.”
“역시 부단장님은 현명하십니다.”
무어라 대꾸하려는 찰나, 야외 수련장이 시끄러워졌다. 수련장 한가운데 홀로 우두커니 서 있던 교관 옆에는 어느새 로즈벨리아가 함께였다.
‘조금 전 교관이 호명한 건 에드윈이라는 이름이었던 거 같은데 어째서 로즈벨리아 경이 나와있는 거지?’
“맨트랩은 끈끈한 줄기로 인간을 공격해 오는 마수다. 간혹 독성이 있는 것들이 있어 곧바로 잘라내지 않으면 몸에 독이 번질 수 있지. 오늘 맨트랩 대비 훈련은 로즈벨리아가 친히 시범을 보이겠다.”
맨트랩에 대비한 실전 수업은 팔 하나를 제외한 몸 곳곳에 묶인 끈끈한 밧줄을 끊어내는 것이었다. 빠르고 정확하게 끊어내는 것이 관건이었다.
교관이 호각을 불자 로즈벨리아가 칼을 든 팔을 움직였다. 칼이 허공을 가르는 모습을 보며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을 뿐이었다.
‘이게 지금…….’
순간 정적에 휩싸였던 장내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백색기사단 기사들은 익숙한 일이라는 듯 환호했지만 수호기사단 기사들은 마치 제자리에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마수를 혼자서 처치했다는 게 뜬소문이 아니었군요.”
한 기사가 내뱉은 말에 리나트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움직임은 군더더기 없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아주 가볍게 칼을 휘둘렀을 뿐인데, 그녀를 속박하던 모든 밧줄이 단번에 사라졌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완벽한 결과를 냈다. 더욱더 놀라운 건, 이 모든 게 그저 눈 깜짝하는 사이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었다.
누군가 따라 하려고 해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경지.
‘저런 걸 보고…….’
잇새로 자꾸만 실소가 터져 나왔다.
로즈벨리아 윈터스는 천재였다. 그녀를 바라보는 리나트의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빛났다.
*
“로즈, 다음부터는 네가 나서지 않아도 돼. 내가 충분히 할 수 있었어.”
실전 수업이 막 끝난 터라 주위에 듣는 귀가 많았다. 눈짓으로 별관 뒤쪽을 가리키자 에드윈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곤 내 뒤를 따랐다.
“네 상태 끝까지 숨길 생각인 거야?”
“진통제 먹으면 괜찮다니까. 이것 봐. 지금도 멀쩡해.”
“토벌 떠났는데 갑자기 진통제가 안 들으면? 그런 가정은 안 해봤어?”
“그전에 약을 구할 수도 있잖아.”
“황실 일이라면 모를까. 라일리 가문에서 그런 의뢰를 우선순위로 생각해줄 거 같아? 단장님이 공식적으로 요청해야 그나마 서두를걸.”
에드윈이 애꿎은 돌멩이를 발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기사단에 보탬이 되고 싶은데 이대로는 짐이 될 수 있다는 걸 본인이 가장 잘 알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고 싶지 않은 거다. 오기를 부려서라도 가고 싶은 거다.
에드윈은 토벌에 참여하는 걸 누구보다 자랑스럽게 여겼으니까.
“네가 미련하게 굴지 않았으면 해서 그래. 이번 마수 토벌이 다가 아니잖아.”
“나도 아는데…….”
“적어도 단장님께는 네 상태에 대해 말씀드려야 하지 않을까?”
딜런 라일리에게 서신을 보내놓았단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괜한 희망에 기댔다가 실망하는 얼굴까지 보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래야겠지.”
“같이 가줘?”
유난히 가브리엘을 어려워하던 에드윈이었다. 자신에게 유독 엄격했던 조부를 꼭 빼닮았다나 뭐라나.
“그래 주면 고맙고.”
나는 곧장 에드윈을 이끌고 본관으로 향했다. 순순히 잘 따라오는 듯했던 에드윈은 본관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대뜸 멈춰 섰다.
“로즈, 나 망토를 놓고 온 거 같은데……. 여기 잠깐만 있어.”
잠깐만 있으라던 에드윈은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망토를 만들어서 오는 거야? 설마 도망친 건 아니겠지?
“……선배님?”
인기척이 들려온 곳에 클라인이 서 있었다.
“아, 클라인.”
“본관에 가시는 겁니까?”
“응. 단장님을 좀 뵈려고.”
고개를 작게 끄덕여 보인 이안이 옅은 미소를 보였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제 생각에도 선배님은 이번 토벌에 합류하지 않는 편이 좋을…….”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 말씀을 드리려고 단장님을 찾아뵙는 게 아니었습니까?”
이안이 한쪽 눈썹을 움찔거렸다. 그는 다소 혼란스러운 듯한 낯빛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 당황한 건 네가 아니라 나거든?
“에드윈의 발목 상태에 대해 의논드리려고 단장님께 가는 길이었어. 넌 내가 이번 토벌에서 빠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왜?”
“……정말 그걸 몰라서 물으시는 겁니까?”
“그래. 나는 아무 이상이 없는데 내가 왜 토벌에서 빠져야 하지?”
“정말 아무 이상이 없다고 장담하십니까? 그렇다면 제가 권하는 의원에게 진료를 받으시죠. 선배님께 아무런 내상이 없다는 게 확인되면…….”
“클라인, 그날 일은…….”
“체리파이라고 하셨죠. 이미 지난 일이라 확인할 길이 없으니 그 말을 애써 믿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전에 마수를 상대하시고 피를 토하셨던 것까지 없던 일이 되진 않습니다.”
“…….”
답답하다는 듯 이마를 매만지던 이안이 제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그의 얼굴에는 이전과 다르게 결연한 빛이 역력했다.
“제게 확인시켜주면 끝나는 일입니다. 거부하신다면 그동안 제가 목격한 걸 단장님께 말씀드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판단은 단장님이 하시겠죠.”
“나는 진짜 괜찮…….”
“둘이 여기서 뭐 하는 게야? 싸우는 게야?”
불쑥 끼어든 목소리에 황급히 몸을 돌렸다. 시야에 가득 들어오는 얼굴을 확인한 나는 절로 마른침을 삼켰다.
가브리엘 단장이었다.
“단장님.”
“단장님을 뵙습니다.”
가브리엘에게 인사를 하면서도 이안의 시선은 내 눈치를 살피는 듯, 내게 고정된 채였다. 나는 아무런 얘기도 꺼내지 말라는 눈짓을 보내곤 슬며시 그의 망토 자락을 붙잡았다.
“싸우긴요. 그런 거 아닙니다, 단장님.”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싸우지들 말고 사이좋게 지내도록 해.”
왜인지 웃음기가 섞인 듯한 목소리였지만 지금은 그것에 깊은 의미부여를 할 때가 아니었다. 다급하게 이안의 망토 자락을 끌어당긴 나는 외곽에 다다라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니까…….”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이안이 말했다.
“의원에게 진맥만 받으시면 됩니다. 저는 그저 선배님께 아무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싶을 뿐이니까요.”
만에 하나 내게 내상이 있다는 결론이 나오면?
그렇게 되면 이안이 가브리엘에게 말하겠다는 걸 말릴 명분도 없는 거 아냐?
결국 토벌에 못 가게 될 수도 있다는 거잖아!
“저기, 클라인.”
“말씀하십시오.”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랫입술을 잘근 물었다가 놓길 반복하던 나는 이안의 눈을 마주 보았다. 완강한 고집이 담긴 눈빛이었다.
의원에게 진맥을 받는 건 혹시 모를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니 내겐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솔직하게 털어놓는 수밖에.
“……사실 나는 오러를 운용할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