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닿고 싶었단 뜻이야
(33/54)
33화. 닿고 싶었단 뜻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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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닿고 싶었단 뜻이야
2023.05.25.
서류 더미 사이로 이안을 흘긋거리던 네이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오늘은 왜 저러고 계시는 거지?’
여느 때처럼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이안의 손엔 그 흔한 펜을 비롯해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그가 하는 것이라곤 천천히 손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황자님?”
“…….”
손끝을 그러쥔 이안이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또 무슨 일이 있으신 겁니까?”
표정이라곤 드러나지 않던 얼굴 위로 미세한 균열이 생긴 건 그때였다. 혼란스러운 듯 앞머리를 가볍게 흩트린 이안이 눈꺼풀을 지그시 눌러 감았다.
“일이라기보단……. 아무래도 내가 이상한 거 같아서.”
자신도 모르게 조각 같은 얼굴을 감상하던 네이슨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그는 곧장 이안의 책상 앞으로 달려갔다.
“뭐가 이상하신데요?”
입술을 떼려던 이안이 멈칫하며 옅은 숨을 내쉬었다.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하나.’
괜찮다고만 하는 로즈벨리아를 보면서 화가 났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고…….
그 뒤로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보석처럼 빛나는 투명한 눈동자를 마주했을 뿐인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손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무언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지금 뭐 하는 거냐는 듯한 그녀의 눈을 마주했을 때는 마치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그래서 도망치듯 수련장을 빠져나온 것이었다. 뜬금없는 행동을 한 자신이 낯설어서.
“아니면 손이 이상한 건가.”
“로즈벨리아 윈터스 님과 관련된 일입니까?”
시선을 들어 올린 이안이 비로소 네이슨과 제대로 눈을 마주했다. 고개를 작게 끄덕여 보인 그는 기사단에서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건 이상한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겁니다.”
“자연스러운 거라고?”
“황자님, 사랑이란 건 말입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하게 만드는 감정입니다. 내가 알던 내가 아닌 거 같고, 평소에는 안 하던 이상한 행동을 하고……. 뭐,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만지고 싶은 것도?”
한껏 거들먹거리던 네이슨이 당황한 듯 짧은 기침을 토해냈다.
“예?”
“그러니까 내 말은……. 그 사람에게 닿고 싶었단 뜻이야. 이게 네가 말하는 그 사랑이 맞아?”
“예, 뭐……. 황자님의 감정이 제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꽤 급진적이긴 하지만, 그거야말로 아주 충실한 사랑의 감정이죠. 사랑이란 건 결국 본능적인 이끌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
이안의 눈동자가 작게 일렁였다. 그 모습을 코앞에서 지켜보던 네이슨이 웃음을 꾹 삼킨 채 말했다.
“그렇다고 동의 없이 레이디를 만지거나 그러시면 안 되는 겁니다.”
“내가 그런 것도 모를까 봐?”
“황자님이 이성에게는 워낙 관심이 없으셨잖아요. 여태 누군가에게 가벼운 눈길 한 번 준 꼴을 못 봤는걸요.”
이안도 이런 저 자신이 낯설었다. 사실 머릿속엔 아직도 의문 한 자락이 남아 있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었나?’
황후보다 먼저 아들을 낳은 황비, 그리고 그 황비의 아들인 1황자.
황후 세력의 견제 때문에 이안은 어릴 때부터 제 감정을 죽이고 사는 것에 익숙했다.
어떤 일이든 일희일비하지 않으려 했고, 무언가를 크게 욕심을 내려고 하지도 않았다.
정확히는 욕심나지 않는 척 군 것에 가까웠다. 그래야만 제게서 뺏으려 들지 않았으니까.
제 것이 아닌 척하는 것만이 궁극적으로 제 것을 지킬 방법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감정을 티 내지 않으려고 굴다 보니 점점 무던한 사람이 되어갔다. 감정의 폭이 점차 좁아지는 게 느껴졌고, 어떤 일이든 어떤 사람에게든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마치 녹슨 칼처럼 그렇게 무뎌졌고 그런 삶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런 자신이 백색기사단에 입단한 건, 짧은 일탈에 가까웠다.
왜, 그런 날 있지 않은가. 늘 가던 익숙한 길이 아닌, 엉뚱한 길로 발을 들이고 싶은 그런 날.
그렇게 백색기사단에 들어갔고, 우연히 전야제에서 로즈벨리아와 검을 맞부딪혔다.
처음엔 그저 다시 한번 검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어쩌다가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 걸까. 아직도 명확한 답은 알 수 없었다. 결정적인 순간은 없었던 것 같은데…….
‘이게 동경이 아니라 사랑이란 말이지.’
이안의 목울대가 크게 출렁거렸다. 그녀를 떠올렸을 뿐인데 왜인지 입안이 바싹바싹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예요?”
“…….”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이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네이슨이 재차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제 말은……. 황자님은 로즈벨리아 님과 어떤 관계가 되고 싶으세요?”
*
“아가씨, 설마 다치신 거예요?”
“아, 이거 살짝…….”
앤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손목에 감겨 있던 린넨을 풀었다. 부어 있는 손목을 살피던 앤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많이 아프시죠?”
“이 정도는 괜찮아.”
앤의 눈썹이 아래로 축 늘어지는 게 보였다. 괜찮다는 내 대답에 도리어 속이 상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앤은 로즈벨리아가 자잘한 상처를 달고 올 때마다 호들갑을 떨곤 했으니까.
“잠시만 기다리세요. 얼른 찜질할 거 가져올게요.”
다급한 발소리가 멀어지고 이내 방문이 닫혔다. 소파 끝에 걸터앉아 있던 나는 반쯤 몸을 눕혔다.
‘제가 한 건 그저 가벼운 압박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돌아가서 꼭 치료하십시오.’
“이안이 아니었다면 더 부었겠네.”
여긴 그래도 로즈벨리아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사람이 꽤 있구나. 그 사람들 속에 이안이 들어간 건 조금 의외지만.
내가 본 꿈속에서 이안과 로즈벨리아는 별다른 친분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이 정도면 이안과 유대감은 잘 쌓고 있는 거 같긴 한데…….
“당분간은 이 정도 선에서 친분을 유지하고, 앞으로 내가 신경 써야 할 건 토벌이려나.”
토벌이라…….
오러, 마수, 이안, 리나트, 그리고 에드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생각은 거기서 멈추었다.
방 이곳저곳을 표류하던 시선이 문득 한 곳에 닿았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나는 내 키보다 살짝 큰 수납장 앞에 다가섰다. 가장 상단에 있는 문을 벌컥 열어젖히자 은색의 작은 단지가 몇 개 보였다.
“이 연고를 준 사람이 딜런 라일리란 말이지.”
딜런 라일리는 올리비아의 오라버니로 그녀가 꽤 의지하고 있는 인물이지만, 라일리 가문에서 로즈벨리에게 가장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던 인물이기도 했다.
어린 로즈벨리아가 몰래 검을 배우고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에 딜런과 마주친 적 있었다. 그때 딜런은 로즈벨리아가 검을 배운다는 걸 눈치챘지만 누구에게도 발설치 않았다.
그러곤 상처에 좋은 연고와 약을 몰래 가져다주었다. 백색기사단에 들어갔다는 걸 알고도 처음으로 축하한다고 했었고.
요새도 후작저에 들를 때면 종종 앤에게 약을 전해준다고 들었으니, 에드윈 일로 도움을 청하기엔 이 사람이 적격이었다.
그대로 돌아서서 책상 앞에 앉은 나는 딜런 라일리에게 보낼 서신을 간단히 적어냈다.
짤막한 인사말로 시작해서 에드윈의 일을 적어내고 막 펜을 내려놓을 무렵, 앤이 들어왔다. 소파에 얌전히 앉아 있을 줄 알았던 내가 책상 앞에 있자 앤이 황당하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앤, 이건 내가 설명…….”
“아가씨, 그새 또 뭘 하시는 거예요. 가뜩이나 부어 있는 손목을 자꾸 쓰시면 내일 퉁퉁 부을지도 모른다고요.”
얼음이 담긴 주머니같이 생긴 걸 품에 안고 있던 앤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어쩔 수 없었어. 서신을 보낼 일이 있어서.”
“서신이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나는 서신을 앤에게 내밀었다. 봉투에 적힌 이름을 확인한 앤의 눈이 살짝 커지는 게 보였다.
“이거 믿을 만한 이에게 줘야 해. 꼭 직접 전하라고 해.”
“네, 아가씨.”
*
이상하리만큼 잠이 들지 않는 밤이라고 생각했다. 기사단 숙소에서 하루 자고 왔다고 그새 이 푹신푹신한 침대가 낯설어진 건가,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애써 잠을 청하려고 노력했다.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눈을 길게 감았던 것 같은데.
‘어머니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심하게 다친 것도 아니고, 슐츠와 수련하다가 상처가 생긴 것뿐이에요.’
‘아론이 네 몸 곳곳에 멍이 있는 걸 봤다는데 심하게 다친 게 아니라니…….’
가장 먼저 보인 건 케이든과 올리비아였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자 로즈벨리아와 헤르만, 그 뒤로 모여 있는 후작가의 고용인들이 보였다.
여긴 메인 홀 같은데.
‘네가 가서 슐츠를 데려오도록 해.’
내내 이마를 짚고 있던 헤르만이 케이든을 보좌하는 남자 시종인 아론에게 손짓했다.
‘안 그래도 제가 어찌 된 영문인지 들어보려고 데려오라고 했어요.’
올리비아의 손짓에 기다렸다는 듯 슐츠가 모습을 드러냈다. 로즈벨리아의 기억 속에서 마지막으로 봤던 모습보단 살짝 야윈 듯한 얼굴이었다.
‘슐츠, 자네가 설명해보게. 케이든이 대체 어떤 수련을 받았기에 몸이 멍투성이가 된 건가?’
‘그건……. 제가 훈련을 빙자해 케이든 도련님 몸에 상처를 냈기 때문입니다.’
‘뭐라고?’
미간을 찌푸린 채로 되묻는 헤르만의 뒤로 큰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비틀거리는 올리비아의 모습이 보였다. 마가렛에게 몸을 기댄 올리비아가 목소리를 쥐어 짜내는 사람처럼 힘겹게 입을 열었다.
‘대체 왜 그런 짓을…….’
‘……로즈벨리아 님의 사주를 받았습니다. 케이든 도련님이 곧 저를 찾을 일이 생길 테니, 보이지 않는 곳에 교묘히 상처를 입히면서 괴롭히라고…….’
그 말에 몇몇 고용인들이 로즈벨리아를 힐끔거렸다. 로즈벨리아는 무슨 생각인 건지 그저 묵묵히 슐츠를 바라볼 뿐이었다.
‘슐츠,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오히려 너는 나를 말렸잖아. 내가 무리하게 수련하다가 입은 상처란 걸 네가 가장 잘 알면서 왜 갑자기 누님을 모함하는 거야?’
케이든이 슐츠의 말에 발끈하고 나서자 올리비아가 슬금슬금 움직이는 게 보였다. 어느새 케이든 옆에 바짝 다가선 올리비아는 케이든을 와락 품에 안았다.
‘가여운 것. 너도 감쪽같이 속았구나, 케이든.’
‘그게 아니에요, 어머니. 지금 슐츠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라고요.’
소란은 좀처럼 멎어 들지 않았다. 그때 헤르만이 로즈벨리아에게 물었다.
‘저게 다 사실이냐, 로즈벨리아?’
‘…….’
슐츠는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바닥에 고개를 파묻을 기세였다. 그 모습만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로즈벨리아의 시선이 차츰 헤르만의 얼굴 위로 옮겨갔다.
‘사실이냐고 묻잖느냐.’
‘어떤 대답을 듣고 싶으세요?’
언젠가는 이런 상황이 올 줄 알았다는 듯 태연한 낯빛이었다. 아니, 애초에 아무런 기대도 없어 일찌감치 체념한 사람 같다고 해야 하나.
‘뭐?’
‘슐츠와 케이든의 말이 정반대인데, 사실이냐고 따져 묻는 게 어느 쪽인지 저도 궁금해서요. 이미 어느 한쪽 말을 굳게 믿고 계신 듯하니 좋을 대로 생각하세요.’
돌아서서 나가는 로즈벨리아의 뒤를 케이든이 다급히 쫓았다.
‘누님!’
케이든의 외침에 퍼뜩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을 확인한 나는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꿈속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찌나 긴장했는지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내가, 아니, 로즈벨리아가 케이든을 때리라고 사주했다고?
“무슨 그런 터무니없는 모함을…….”
올리비아가 슐츠를 포섭해 로즈벨리아를 모함한 건 분명한데, 다른 누군가가 아닌 슐츠가 올리비아와 손을 잡은 게 다소 의문이었다.
로즈벨리아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슐츠라면 그럴 리가 없는데.
끝까지 제대로 눈을 못 마주쳤던 거 보면 무언가 사정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나저나 아버지란 사람이 돼서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슐츠와 케이든의 말이 정반대였는데, 로즈벨리아한테 그렇게 추궁하듯이 물어보면 나 같아도…….”
그 상황에 제대로 몰입한 건지 뺨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애써 숨을 고르던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누가 나한테 이걸 보여주는 건가? 대체 왜 이런 꿈을 꾸는 거지?”
속에서 맴맴 돌던 의문이 불쑥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누군가에게 답을 기대하고 던진 게 아닌 가벼운 혼잣말 같은 것이었는데, 찰나 허공에서 다소 익숙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거야 네가 과거의 로즈벨리아와 다른 선택을 하길 바라기 때문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