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이상 행동
(32/54)
32화. 이상 행동
(32/54)
32화. 이상 행동
2023.05.22.
“……클라인?”
그러니까 클라인의 이름이 있다는 건, 이안이 토벌대에 뽑혔다는 거잖아?
이안은 엄연히 황자 신분인데 마수 토벌에 가도 되는 건가?
원작을 떠올려 보면 이안이 곧 백색기사단을 떠나긴 하는데…….
지금 이안이 하는 행동들을 봐선 원작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곳을 홀연히 떠날 것 같진 않았다.
변수는 이안에게 발현되는 저주의 정체였다. 저주가 발현되는 시기를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백색기사단을 떠난 이후, 황태자 책봉식 이전 시점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역시 클라인도 뽑혔네.”
“에드, 넌 예상했어?”
에드윈이 우쭐거리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랑 대련해서 클라인이 이겼잖아. 그러니 실력으로는 증명된 거고 뽑힐 만하지.”
다소 이상한 논리였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마수와 싸우는 건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검술 실력만큼은 이안이 에드윈보다 확실히 우위니까.
“그나저나 신입 기사 신분으로 토벌대에 뽑힌 건 여태 너뿐이었는데, 네 뒤를 잇는 신입이 이렇게 빨리 등장할 줄 몰랐네. 소감이 어때?”
“지금 내 소감이 중요한 건 아닌 거 같은데.”
“에이, 그러지 말고…….”
에드윈이 장난스럽게 내 어깨를 툭 건드렸다. 해맑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아하니 자신의 발목 상태는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넌 어떻게 할 거야?”
“어? 뭘?”
내가 눈짓으로 다리를 가리키자 에드윈이 당황한 듯 콧등을 움찔거렸다.
“로즈, 그 얘긴 나중에 하는 게 어때?”
“미룬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지 않아? 바네사 선배님도 분명히 네 다리 상태…….”
은근히 모여드는 시선을 느낀 나는 그대로 말을 멈추었다.
에드윈에게 다음에 얘기하자는 눈짓을 보낸 나는 단원들 틈 속에서 슬며시 빠져나왔다. 그러곤 별관으로 향하는 척 외곽의 성벽으로 향했다.
주위를 빠르게 휘둘러본 나는 성벽 위로 가볍게 뛰어올랐다.
마치 내가 오길 기다렸다는 듯 시원한 해풍이 전신을 휘감았다. 너른 바다 위로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 마치 데칼코마니 같았다.
여기만 오면 머릿속에서 엉켜 들던 내 고민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단 말이야.
나는 눈꺼풀 지그시 내리누른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원작을 바꿀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두근거리던 때가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변화가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원작과 달라진 점을 목격할 때마다 반가우면서도 내심 불안했다.
이 작은 변화들이 모여 나를 어떤 결말로 이끌지 알 수 없기에. 행여 원작보다 더 안 좋은 결말로 가는 지름길이 되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이따금 나를 덮쳐오곤 했다.
애초에 원작 자체가 새드 엔딩인데, 그보다 더 안 좋은 결말이라고 해봤자 빨리 죽기밖에 더하겠어?
자조 섞인 웃음을 바람결에 흘려보내며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잔물결의 움직임만이 존재하는 그 정적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아직 원작 초반일 뿐이잖아. 내가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수밖에…….”
잠깐,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원하는 게 뭐지?
문득 떠오른 그 의문에 여러 얼굴이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데이지, 에드윈, 케이든, 비비안.
그리고 이안.
이 몸으로 막 눈을 떴을 때와는 다르게 지금은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을 찾고 싶어졌다.
물론 나도 행복해져야 하고.
“원작에서 로즈벨리아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원작과 비교했을 때 이미 많은 부분이 바뀌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행복해지려면 궁극적으로 데이지의 죽음을, 윈터스 가문의 멸문을, 전쟁터에서 벌어지는 이안과 로즈벨리아의 결투를 막아야 했다.
“전쟁이라…….”
내가 레노르 왕국으로 망명하지 않고 어떻게든 이곳에서 버텨내면, 적어도 이안과 전쟁터에서 만날 일은 없는 거 아닌가?
원작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원작 자체에 집착할 필요 또한 없어졌다. 아직 바뀌지 않은 부분이 있을 수 있으니 적절히 참고만 하면 될 터였다.
‘저를 죽여주실 수 있으십니까?’
꿈속에서 보았던 그 일만은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는데…….
고개를 들어 올린 나는 평화로운 풍경을 재차 눈에 담았다.
하나하나 내 방식대로 해결해나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
햇빛이 느른하게 내려앉은 정원에서 모처럼 여유롭게 보내는 티타임이었다. 손에 든 부채를 내려놓은 올리비아는 찬찬히 주위를 살폈다.
‘마가렛은 대체 어딜 간 거지?’
그녀의 시선은 본관 앞에서 멈추었다. 메인 홀에서 나오는 마가렛의 모습을 발견한 올리비아가 찻잔을 들어 올렸다.
이내 찻잔을 다시 내려놓았을 때는 마가렛이 그녀의 옆에 다가와 있었다.
“마님, 잠시만.”
인자한 미소를 입가에 올린 올리비아가 몸을 살짝 기울이자, 마가렛이 무어라 소곤거렸다. 고개를 가벼이 끄덕인 올리비아가 귀부인들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잠깐 실례 좀 해도 될까요?”
“그럼요.”
“편히 다녀오세요, 후작 부인.”
귀부인들의 웃음소리를 뒤로한 채 올리비아는 마가렛과 정원을 거닐었다.
“마님의 예상대로였습니다.”
“그래? 한결같은 게 참 미련하다고 해야 할지.”
자신을 볼 때마다 굽신거리는 이들과는 다르게 묘하게 꼿꼿했던 슐츠의 태도를 떠올린 올리비아가 입매를 비틀었다.
“케이든 도련님께서 어젯밤부터 옷을 혼자 갈아입으셨대요.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시중들지 말라고 하셨답니다.”
“어떻게든 숨기려고 하겠지. 몸에 상처가 있다는 걸 들키면 곧바로 내 귀에 전해질 테니.”
“슐츠 쪽은 어떻게 할까요?”
부채 끝을 만지작거리던 올리비아가 입매를 한껏 당겨 웃었다.
“적당히 때를 봐서 접근해.”
슐츠의 약점은 이미 파악한 뒤였다. 덫은 놨으니 밟기만을 기다리면 그만이었다.
“알겠습니다, 마님.”
*
마치 자석처럼 발길이 이끌린 곳은 별관 근처 수련장이었다. 단원들의 발길이 드문 곳이라 늘 그렇듯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클라인?”
놀랍게도 수련장 안에 이안이 있었다.
어젯밤 도망치듯 숙소로 들어간 이후, 반나절 만에 마주한 얼굴이었다.
어째 잘 피해 다닌다 싶었는데.
아니지, 이제 증거도 없겠다. 그게 피가 아니었다고 잡아떼면 되는 거잖아?
“이곳에 계실 거 같아서 왔습니다.”
마치 취조를 당하는 듯했던 어제와는 사뭇 달라진 목소리였다. 어떻다고 딱 잘라서 정의할 순 없지만 조금은 흐물거리는 목소리라고 해야 하나.
설마 대련하자고 찾아온 건가?
“맞다, 오늘 대련하기로 했잖아. 그거 때문에 온 거야?”
“그것보단……. 토벌대 명단 보셨습니까?”
“응. 봤어.”
찰나 이안의 목울대가 크게 출렁이는 게 보였다. 그는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기만 할 뿐 달리 무슨 말을 더 꺼내진 않았다.
저 눈빛은 마치 내게 뭔가를 기대하는 것처럼…….
“혹시나 해서 말인데, 토벌대 명단에서 네 이름 봤냐고 물은 거야?”
“네. 정석대로 수업에 열심히 참여해서 제 실력으로 뽑혔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어서요.”
‘백색기사단에 들어온 기사라면 누구나 마수 토벌을 꿈꿀 거야.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네 실력이 좋다는 걸 안다고 해서 널 데려갈 순 없어. 정석대로 수업에 열심히 참여해서 단장님 눈에 띄도록 해.’
마수 때문에 수도 외곽으로 향할 때였나. 함께 가겠다던 이안에게 했던 말을 떠올린 나는 작게 헛기침했다.
“그래, 너라면 뽑힐 줄 알았어. 내가 너 실력 좋다고 했잖아.”
“그런데 선배님도 이번 토벌에 가시는 겁니까?”
“응. 당연히 가야지.”
무슨 말을 할 것처럼 달싹이던 이안의 입술이 이내 다물렸다. 그가 속으로 삼킨 말이 뭔지 알 것 같아, 재빠르게 화두를 전환했다.
“대련이나 할까? 내가 오늘 대련해주겠다고 했잖아.”
“……괜찮으시겠습니까?”
역시나 이안은 어젯밤 일을 의식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 컨디션 아주 좋은데?”
나는 문제없다는 듯 어깨를 가볍게 들어 보였다. 보관통 속에 있는 목검 하나를 집어 들자 이안도 바닥에 떨어진 목검 하나를 주워들었다.
목검을 든 채 거리를 좁히다가 발끝이 맞닿기 직전, 서로의 검을 쳐내고 한발 물러서며 대련이 시작됐다.
이안의 검 끝이 내게로 향하는 건 제법 익숙해졌는데, 그의 시선이 내게로 향할 때면 자꾸만 멈칫거렸다.
어제 있었던 일 때문인가?
집중하자. 경기든 대련이든 생각이 많은 건 쥐약이니까.
그 다짐이 무색하게도 발이 점차 느려지는 게 느껴졌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이안의 검을 날리는 걸로 대련을 끝내려던 찰나였다.
잠깐, 이대로는 타이밍이 늦을 거 같은데?
이안의 검을 날리긴 했지만, 반쯤은 힘으로 밀어낸 거라 그 반동으로 손목이 찡하고 울렸다.
“괜찮으십니까.”
이안이 재빠르게 다가와 내 손목을 살폈다.
“괜찮아. 내가 집중을 제대로 못 해서 그런 거니까…….”
내 손목을 살피던 이안이 흘긋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무슨 고민거리라도 있으신 겁니까.”
원작과는 다르게 네가 토벌대에 뽑힌 일로 머리가 잠시 복잡했다는 얘기는 차마 할 수 없었다. 나는 가볍게 둘러댈 만한 일을 떠올리다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을 끄집어냈다.
“너도 봤겠지만 에드윈도 토벌대 명단에 뽑혔거든. 근데 아무래도 에드윈의 다리가 좀 이상한 거 같아서.”
그 말을 뱉자마자 이안의 표정이 굳어지는 게 보였다. 꼭 뭔가를 기대했다가 실망한 사람처럼…….
“선배님은 늘…….”
“어?”
“남 걱정은 그렇게 하시면서 왜 본인 일에는 그렇게 무신경하신 겁니까.”
유난히 낮은 음성엔 옅은 화기가 실려 있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는 사이, 이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손목이 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치실에 가시죠.”
“아니야, 돌아가서 찜질하면 돼.”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쉰 이안은 잠깐 기다리라는 말을 남겨놓곤 수련장을 빠져나갔다. 금세 돌아온 그의 손에 들린 건 얇고 긴 린넨이었다.
“괜찮다니까.”
내 손목을 붙잡은 채로 시선을 내리깔고 있던 이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말…….”
눈이 마주쳤다. 이안 또한 말을 멈추었다. 작게 진동하던 그의 눈동자까지 멎어 들자 온전한 정적의 순간이 찾아왔다.
마치 공기의 흐름마저 느려진 듯한 그 찰나, 내 얼굴을 지그시 응시하던 그가 내 쪽으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뭐가 묻기라도 했냐고 묻으려는데 돌연 그의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 그가 다급히 손을 내린 건 그때였다.
“제가 한 건 그저 가벼운 압박에 불과합니다.”
“어어.”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이안은 분명 당황하고 있었다.
아니, 내가 손을 갖다 댄 것도 아니고 본인이 내 얼굴 위로 손을 뻗은 거면서.
왜 저렇게 얼빠진 얼굴인 거지?
“그러니 돌아가서 꼭 치료하십시오.”
뭐라고 대답할 새도 없이 그가 몸을 돌렸다. 이안은 그대로 수련장을 나가는 듯하다가 다시 돌아와 내 앞에 섰다. 그의 손에는 내가 수련장 구석에 벗어둔 망토가 들려 있었다.
“이건 왜…….”
이안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소 고집스러운 얼굴로 내 어깨 위에 망토를 둘러줄 뿐이었다.
매듭까지 야무지게 묶고 나서야 돌아선 그는 내게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이곤 돌아섰다. 이윽고 그의 발소리가 수련장 내부를 가득 메웠다.
마치 이곳에서 당장 벗어나려는 사람처럼 어딘가 조급하게 들려오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