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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둘이 같이 있었던 거야? (31/54)


31화. 둘이 같이 있었던 거야?
2023.05.18.


직접 확인할 방법이라는 게…….

무어라 입술을 떼려는 찰나, 이안이 얼굴을 깊숙이 겹쳐왔다. 좁혀진 거리만큼 한층 선명해진 그의 눈동자가 물결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설마 체리 냄새가 나는지 맡으려는 건가?


“자, 잠깐만.”

다급히 입가를 가린 채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숙소 안에서 인기척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점차 가까워지는 듯한 발소리를 들은 나는 재빠르게 이안의 가슴팍을 밀쳐냈다. 그와 동시에 출입문이 벌컥 열렸다.


“로즈벨리아?”

문틈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건 평상복 차림의 에드윈이었다.


“에드윈.”

“로즈, 너 오늘 숙소에 머물러?”

“어. 그렇게 됐어.”

고개를 끄덕이려던 에드윈의 눈이 동그래졌다. 내게 잠시 머물렀던 그의 시선은 곧장 이안에게로 옮겨갔다.


“설마 둘이 같이 있었던 거야?”

에드윈의 입꼬리가 움찔거리는 걸 발견한 나는 재빠르게 대꾸했다.


“잠깐 산책 다녀오는 길이었는데 우연히 숙소 앞에서 클라인을 만났어.”

이안에게 무언의 눈짓을 보내자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곤 입을 열었다.


“네, 맞습니다. 저도 오늘 숙소에서 머물거든요.”

“그래?”

그게 다냐는 듯 가늘어진 눈초리가 나와 이안을 차례로 살폈다.

또 엉뚱한 소리 하기 전에 화두를 돌려야 하는데.


“에드윈, 너는 좀 괜찮아진 거야?”

에드윈의 두 눈이 그제야 내게로 고정됐다. 대답을 기다리는 사이 입가를 만지는 척하며 자연스레 입술을 가렸다.


“응. 쉬니까 나아졌어.”

에드윈이 가뿐하다는 듯 씩 웃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오후까지만 해도 파리했던 에드윈의 낯빛은 본래의 혈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다행이네.”

“안에만 있었더니 좀 답답해서 산책 다녀오려고.”

“그래, 다녀와. 그럼 나는 먼저 들어가 볼게.”

집요하게 나를 따라붙는 클라인의 시선을 애써 무시한 채, 숙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곧장 방으로 들어온 나는 거울부터 살폈다. 입술 끝에 피가 살짝 남아 있었다.

한 번 닦아낸 걸 생각하면 처음에는 눈에 띌 정도로 묻어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체리파이가 통할지 모르겠네.”

이마를 매만지던 나는 테이블 위로 다가갔다. 그러곤 체리 파이를 집어 들어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이안이 설마 내 방까지 쫓아와서 체리 파이를 먹었는지 확인하진 않겠지만,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끝까지 잡아떼면 자기가 뭘 어쩌겠어.”

방 안에 비치된 자그마한 욕실에서 씻고 나온 뒤, 곧장 침대에 몸을 눕혔다.

조금 딱딱한 느낌이었지만 불편하진 않았다. 아니, 도리어 편했다.

작긴 해도 온전히 나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이라 그런가.


“1인 1실이 이 정도면 훌륭하지.”

방 안에 개인 욕실까지 달린 걸 고려하면 그리 작은 크기도 아니었다. 숙소로 쓰는 건물을 워낙 크게 지어놔서 방이 남는 터라, 한 번 배정받은 방은 기사단을 떠나기 전까지 바뀌지 않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내가 머물든 머물지 않든, 이 방은 내가 기사단을 나가기 전까지 오롯이 나만 쓸 수 있는 공간인 셈이었다.

황제가 외곽에 있던 백색기사단 본부를 수도로 옮기도록 회유하기 위해 노력했다더니, 기사단 시설에 투자를 많이 한 티가 나네.

유난히 가깝게 느껴지는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불현듯 이안의 말이 떠올랐다.


‘제가 직접 확인해봐도 되겠습니까.’

“직접 뭘 어떻게 확인한다는…….”

순식간에 겹쳐졌던 이안의 얼굴이 아른거리자 생각이 그대로 멎어 들었다.

이안과의 일을 잠시 상기시켰을 뿐인데, 서늘한 밤공기 사이에 스며든 온기가 이마를 간질이던 감각까지 되살아났다.

반쯤 몸을 일으킨 나는 재차 간질거리는 듯한 이마를 괜스레 매만지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철벽남인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훅 다가온단 말이야.

그래서 더 당황스러운 건가? 먼저 다가오지 않을 거 같던 사람이라서?


“혹시 나를 여자로 안 봐서 거리낌이 없는 건가?”

그럴 수도 있겠네. 이안이라면 그쪽이 더 어울리긴 하지.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침대에 모로 누웠다. 이불을 품 안에 가득 끌어안은 나는 애써 잠을 청했다.

*



‘누님, 지금 돌아오시는 겁니까?’

‘그래.’

로즈벨리아의 목소리였다. 이곳이 꿈속이라는 걸 알아챈 나는 주위를 빠르게 인식했다.

후작저의 본관으로 향하는 길목이었고, 대화를 나누는 이는 로즈벨리아와 케이든이었다.


‘나한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거야?’

‘아닙니다, 아무것도.’

‘혹시 지난번에 했던 대련 얘기를 또 하려는 거라면…….’

케이든이 애써 긴장한 기색을 감추려는 듯 손끝을 움츠렸다가 놓길 반복했다. 그 모습을 흘긋 살핀 로즈벨리아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술을 뗐다.


‘너와 영영 대련을 안 하겠다는 말은 아니었어. 지금은 네가 너무 어리고……. 우리 기사단 내에서도 나와 대련하는 사람은 없어.’

뒤이어 들려 온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단호했지만, 한결 부드럽게 들려왔다.


‘단 한 사람도요?’

‘그래, 단 한 사람도 없어. 나는 기사단 내에서도 모든 대련을 거절하고 있거든.’

로즈벨리아는 정말 끝까지 이안과 대련해주지 않았구나.


‘저도 당장 누님과 대련하겠다는 건 아니었습니다. 제가 열심히 하면 나중에 누님과 대련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작은 희망이라도 갖고 싶어서…….’

‘지도 대련이라도 좋다면.’

로즈벨리아가 툭 뱉은 말에 케이든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런 반응을 보일 만도 하지. 나도 내심 놀랐으니까.

이안에게 그랬던 것처럼 케이든도 단호히 거절할 줄 알았는데, 로즈벨리아는 확실히 동생들에게 약했구나.


‘예? 정말이십니까?’

‘나도 지금 당장 한다는 건 아니야. 지도 대련이어도 엄연히 대련이니까 먼저 슐츠에게 네 실력을 인정받도록 해.’

‘알겠습니다, 누님.’

꿈은 그렇게 끝이 났다. 눈을 몇 번 깜빡이자 암흑이 아닌 낯선 천장이 보였다.


“뭐지? 내가 본 게 원작 속 이야기인가?”

아직은 추측일 뿐이지만 꿈을 꿀수록 원작 속 이야기를 보는 거라는 확신이 생겨갔다.

그도 그럴 게, 꿈에서 본 로즈벨리아의 모습과 그녀의 기억 속 모습과 똑 닮아 있었으니까.

근데 이걸 왜 보여준 거지? 내가 케이든에게 했던 말도 원작과 비슷한 뉘앙스였던 거 같은데.

결국 원작과 달라진 점이 없는 거 아닌가?


“원작 속 이야기를 알려주는 의도가 있을 거 같은데…….”

내가 너무 깊이 생각하는 건가?

이런저런 가정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자 가벼운 두통이 일었다. 관자놀이를 지압하듯 꾹 누른 나는 애써 눈꺼풀에 힘을 실었다.

*

언제 폭우가 쏟아졌냐는 듯 하늘이 맑게 개 있었다. 한결 상쾌해진 공기를 있는 힘껏 들이마시려는데, 저 멀리 붉은 머리가 보였다.

곧바로 에드윈을 부르려던 나는 잠시 멈춰 서서 그의 걸음걸이를 유심히 살폈다.

어째 왼쪽 다리의 움직임이 더 둔해진 거 같은데?

오른쪽 다리는 거침없이 내딛는 듯한데 왼쪽 다리는 지면에 닿기 직전 움츠리는 기색이었다. 그 모습이 언뜻 절뚝거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에드윈.”

“로즈.”

“네 다리 말이야. 살짝 삐끗한 거 아니지?”

에드윈이 제 다리를 힐긋 내려다보았다. 다소 부자연스러운 기침을 하는 걸 보니 의심은 곧 확신으로 바뀌었다.


“지난 마수 토벌에서 다친 발목에 이상이 생긴 거지?”

마수의 독에 당한 거라 의원은 최소 3개월 정도 치료와 회복에 전념해야 한다고 했는데, 에드윈은 두 달 만에 기사단에 모습을 드러냈었다.


“……그래, 내가 누굴 속이겠냐.”

에드윈이 힘없이 웃어 보이곤 이어 말했다.


“네가 짐작한 대로 그때 다친 발목에 통증이 다시 도지고 있어. 진통제로 버티고 있었는데 아, 평소엔 이 정도는 아니고……. 숙소에 머물 줄 몰라서 진통제를 안 챙겨왔더니 오늘 유독 상태가 안 좋은 거야.”

“의원은 만나봤어?”

“여럿 만나보긴 했는데 그때 완전히 다 해독된 게 아닌 거 같다는 의견이더라고.”

로즈벨리아의 기억이 흘러들어왔을 때, 감정적으로 힘들었던 구간이 몇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마수 토벌을 떠났을 때였다.

로즈벨리아가 다치는 일은 없었지만 동료들이 다치거나 죽는 모습을 마주한 기억이 흘러들어왔을 땐…….

손바닥에 아릿한 감각이 느껴져 흘긋 시선을 내렸다. 나도 모르게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풀자 잇새로 옅은 숨이 흘러나왔다.


“어떻게 해야 한대?”

“약을 다시 구해보고 있어.”

에드윈이 내 눈치를 살피는 게 느껴졌다. 마수의 독에 당하는 게 흔한 일은 아니라, 시중에서 제대로 된 약을 구하기는 어려울 터였다.

그렇다면 에드윈이 약을 구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라일리 가문에서 구하고 있어?”

라일리 가문. 그러니까 올리비아의 친정이자 현 황후의 친정인 라일리 대공가는 약초 재배와 배합술로 유명한 가문이었다.

여태까지 마수의 독을 해독할 수 있는 약을 제대로 만들어낸 건 라일리 가문뿐이었다.


“그렇지, 뭐. 의뢰는 해놨으니까 기다려보려고.”

“너 어제 아팠던 것도 혹시…….”

“아니야, 그건 관련 없어. 진짜야.”

내가 의심의 눈빛을 거두지 않자, 에드윈이 결백하다는 듯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아래로 한껏 휘어진 눈썹을 보니 억울해 보이긴 하네.


“너희 여기서 뭐해?”

불쑥 말을 건네온 건 루카스였다.


“왜? 무슨 일 있어?”

에드윈이 눈을 반짝이며 되묻자 루카스가 으스대며 대답했다.


“소식이 느리네, 에드. 이번 토벌 명단 떴어.”

“명단?”

“본관 앞에 가서 확인해봐.”

에드윈과 눈빛을 교환한 나는 곧장 본관으로 달려갔다. 게시글 상단에 단장인 가브리엘이 토벌단을 이끌 것이라고 적혀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토벌에 뽑힌 단원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백색기사단에서는 신분이 중요치 않기에 이름만 나열되어 있는 거구나.

가브리엘 이름 아래 ‘로즈벨리아’라는 이름을 확인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에드윈, 바네사, 루카스 등 익숙한 이름들을 흘려보내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붙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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