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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직접 확인해봐도 되겠습니까 (30/54)


30화. 직접 확인해봐도 되겠습니까
2023.05.15.



“어?”

“괜찮지 않습니다.”

“…….”

“아직 많이 아픕니다.”

나는 눈동자를 힐긋 내려 이안의 안색을 살폈다. 낯빛도 본래의 색을 찾았고, 열이 떨어진 것도 확인했는데, 많이 아프다고?


“열은 내렸는데…….”

“선배님이 이대로 가시면 다시 열이 날지도 모릅니다.”

이안은 눈매를 축 늘어뜨린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뒤이어 다소 뻣뻣한 움직임으로 제 머리를 부여잡기까지 했다.

설마 지금 아픈 척하는 건가?

초조해 보이는 얼굴을 힐긋 살핀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아냈다.

원작 속에서 철벽남으로 유명했던 이안에게 이런 요망한 구석이 있었을 줄이야.


“집에 가겠단 뜻은 아니었어.”

“예?”

내 마음을 약하게 하려는 게 의도였다면 어찌 됐건 성공이었다. 나는 반쯤 내려온 이안의 이불을 끌어 올려주며 대답했다.


“나도 오늘은 숙소에서 자고 가겠다고 했거든. 네 상태가 좀 괜찮아진 거 같아서 마실 거라도 좀 가져오려던 건데…….”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던 이안의 입술이 이내 작게 벌어지는 게 보였다.


“그럼 다녀오십시오.”

“다시 열이 날지도 모른다며.”

내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든 탓인지 이안이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잠깐은 괜찮을 겁니다.”

이안의 모친인 황비는 일찍 죽었고, 부친은 제국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황제라 편하게 응석을 부릴 상대도 없었을 터였다.

내게 이런 행동을 보인다는 건 그만큼 나를 편하게 여긴다는 뜻일 테고…….

이런 식으로 계속 신뢰를 쌓아가면 원작처럼 최악으로 치닫는 결말만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안 가십니까?”

“이제는 내가 갔으면 좋겠어?”

“아뇨.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그의 만면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웃음기 번진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나는 문득 원작에서 책봉식 이후로는 이안의 웃음 한 자락 볼 수 없었다던 데이지의 독백을 떠올렸다.


“저기, 클라인…….”

“말씀하십시오.”

황가에 내려온다는 저주에 대해 아는지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원작에서 데이지도 이안의 입에서 흘러나온 ‘저주’라는 단어를 흘려넘기지 않았고, 저주가 뭔지 알아내려 했지만 끝내 알지 못했다.

그 저주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 자체를 찾을 수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출처를 명확하게 댈 수 없는 말을 함부로 입에 올렸다간 기껏 쌓아 올린 신뢰가 무너질지도 몰라.


“아니야, 아무것도.”

그새 정이 많이 들었는지,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이안이 다르게 바뀔 수도 있다는 가정만으로도 가슴 한편이 조여들었다.

원작을 그렇게나 많이 읽어댔는데 도움을 주기는커녕 제대로 된 정보조차 알지 못하다니.

불쑥 밀려든 회의감과 무력감이 나를 덮치려는 찰나, 이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결투는 어떠셨습니까.”

“아아, 결투…….”

오늘 결투를 했었지.

돌이켜보니 유독 길게 느껴진 하루였다. 새삼스럽게 놀라운 점은, 아직도 하루가 다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수호기사단 실력자라고 하던데.”

“실력자는 무슨.”

“아닙니까?”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너보다 힘도 훨씬 약하고, 스피드도 느렸어. 특히 공격 자세에서 허점이 너무 많이 보인다는 게 단점인데, 그래도 장점이 아예 없는 건 아니고…….”

“선배님.”

“어?”

“또 열이 나는 것 같습니다.”

“열이 난다고?”

아픈 척하는 거 아니고?

잠시 멈칫한 나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있는 이안의 이마 위로 손을 올렸다. 열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미열에 가까웠다.


“미열이긴 한데, 두통도 다시 시작된 거야?”

이안이 눈을 지그시 감으며 대꾸했다.


“시원해서 다시 괜찮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이럴 게 아니라 시원한 물에 린넨을…….”

다급히 손을 떼어내려 하자, 이안이 내 손등을 가벼이 눌렀다.


“선배님의 손이 닿는 편이 더 좋습니다.”

이러다 아주 습관 되겠어.

잠깐? 오러에 관한 책을 봤을 때, 자가 치유 기능이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자가 치유가 아니라 남도 치유할 수 있는 건가? 그래서 내 손이 닿는 편이 좋다고 하는 건가?

이안의 입가에 어린 희미한 미소를 발견한 나는 그의 이마를 가볍게 다독였다.


“한숨 더 자.”

“곁에 있어 주실 겁니까.”

“응. 그럴게.”

 

 

*

이안이 잠에 푹 빠진 걸 확인한 나는 로브를 걸치고 숙소 밖으로 나왔다. 비는 갰지만 구름이 달빛을 가린 채였다.

이렇게 사방이 어두운 날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오러 연습을 할 좋은 기회였다.

기사단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연무장을 지나 으슥한 숲길로 들어선 나는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밝은 대낮에도 이곳까지 오는 이가 드무니, 이렇게 늦은 시간에는 이곳을 찾는 이가 더욱더 없을 터였다.


“여기가 최적의 장소이긴 하네.”

빛 하나 스며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주위를 쓱 둘러본 나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오러를 운용했다.

내 몸속에 있는 오러는 여전히 불안정하고 거칠었다. 그만큼 강도도 거셌다. 마치 주체할 수 없다는 듯 날뛰어댔다.

로즈벨리아가 느끼던 오러와는 분명 다른 양상이다.

처음에는 미약하게 느끼다가 점차 감지하는 양이 많아진다고 했는데…….

나는 처음부터 로즈벨리아가 컨트롤해오던 많은 양의 오러를 접해서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걸까?

마치 나가고 싶다고 제멋대로 요동치는 듯한 오러를 검 쪽으로 밀어 넣자, 검이 하얗게 빛났다. 이내 허공을 향해 짧게 휘두르자 울컥 토기가 치밀었다.


“대체 왜…….”

내가 이 몸에 완벽하게 적응할 수 있게끔 도와줄 땐 언제고, 어째서 오러는 제대로 다룰 수 없게 한 거지?

다시 오러를 밀어낸 내가 검을 휘둘렀다. 목이 뜨거워졌지만 잇새를 앙다물고 토기를 삼켜냈다.

로즈벨리아가 회귀를 거부했다고 해서, 내가 이 몸에 들어온 게 정당화될 수 없다는 거야?

그래서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렇게 날뛰는 거야?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나는 돌아갈 곳이 없어.

어떻게든 살아가고 싶을 뿐이야. 그저 그뿐인데.

찰나 눈앞이 빙 돌았다.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자, 참고 참았던 피가 쏟아지듯 흘러나왔다.


“후, 이번엔 좀 아프네.”

불행 중 다행인 건 오러를 아예 쓸 수 없는 건 아니란 거였다. 이 상태를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는 게 관건이었다.

피를 닦아낸 나는 흙바닥에 몸을 눕혔다. 통증은 곧바로 가셨지만 어지럼증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앞으로 오러 연습을 계속하려면 어지럼증이 언제까지 지속되는지도 정확히 알아야겠네.

나는 눈을 부릅뜬 채로 멀리 보이는 밤하늘을 응시했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마실 때마다, 빗물을 머금은 흙냄새가 코로 스며들었다. 아득히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는 마치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여기서 자면 안 돼.”

불굴의 정신력으로 버틴 나는 잠시 뒤에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허공에 대고 검을 베어내 그나마 이 정도에서 그친 건가.

치맛자락에 묻은 흙을 털어내려던 나는 손바닥에 가득 묻은 피를 보곤 손끝을 그러쥐었다.

주위를 휘둘러본 나는 숲길 끄트머리에 다가가 고목 나무를 툭 건드렸다. 이윽고 나뭇잎에 고여 있던 빗물이 내 손 위로 후드득 쏟아졌다.

입가와 손에 묻은 피를 대충 닦아낸 나는 그제야 숙소 건물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단 방에 가서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 이안이 머무는 방으로 가봐야겠네.

숙소 앞에 다다른 나는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모두가 다 잠들었을 야심한 시각인데, 누군가 숙소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대로 돌아서려는 찰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선배님?”

이안이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나는 다급히 로브로 얼굴을 가리며 물었다.


“왜 나와 있어?”

“선배님이 안 보이셔서요. 어딜 다녀오시는 겁니까?”

“잠깐 산책을 다녀왔어.”

단숨에 거리를 좁힌 이안이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았다.


“방에 먼저 들어가 있어. 난 내 방에 들렀다가 갈게.”

다급한 걸음으로 이안의 옆을 지나치려는데, 그가 내 어깨를 덥석 붙잡았다.


“팔을 잠깐 내려보십시오.”

“어? 팔은 왜…….”

찰나 미간을 좁힌 이안이 내 팔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왜 그러는데.”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오신 겁니까?”

“말했잖아. 산책하러 갔다가…….”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그의 엄지가 내 입술을 스쳤다. 금세 멀어진 그의 손에 묻어난 건 붉은색, 그러니까 내 피였다.


“그럼 이건 뭡니까.”

“난 잘 모르겠는데? 그게 뭐지?”

이안이 손가락 위로 입술을 갖다 대려 하자, 나는 다급히 그의 손을 쥐었다.


“잠깐! 지금 뭐 하려는 거야?”

“확인해보려고요.”

나는 그의 손끝에 묻어 있는 피를 내 옷자락에 벅벅 닦았다. 그런 내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던 이안이 낮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혹시 피를 흘리신 겁니까?”

“아니야.”

“아니라고요?”

“내가 피를 흘릴 일이 없잖아.”

“선배님이 제게 거짓말을 하신 거라면요.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이안은 내가 피를 흘리며 쓰러진 모습을 유일하게 본 사람이었다.

그럴싸한 변명을 둘러대야 하는데.

머리를 쥐어 짜내던 나는 불현듯 내 숙소에 들렀을 때, 테이블 위에 무언가 올려져 있던 걸 떠올렸다.

그게 뭐였지?

접시 위에 놓여 있었고, 붉은색이었던 것도 같은데…….


“선배님은 대체 왜……. 자신을 돌보지 않는 겁니까.”

“오해야, 클라인. 사실 아까 체리파이를 먹었는데 그때 묻었나 봐.”

“체리를 드셨다고요?”

찡그리며 웃던 그가 고개를 내렸다. 그의 눈동자는 정확히 내 입술 위에서 멈추었다. 마치 입술을 더듬는 듯한 집요한 시선에 입매가 절로 움찔거렸다.


“출출하다고 하면 숙소에 상주하는 하인들이 간식을 가져다주거든. 오늘은 체리파이였어.”

“…….”

“그럼 이제 오해 풀린 거지? 난 먼저 들어갈게.”

이안을 지나쳐 숙소 문을 잡아당기려는 찰나.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다시 닫혔다.

문을 열어젖히려 했지만 어느새 내 뒤로 다가온 이안이 힘을 주어 누르고 있는 터라 요지부동이었다.


“클라인? 뭐 하는…….”

몸을 돌린 나는 그대로 말을 멈추었다. 툭 불거진 그의 목울대가 코앞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그는 반쯤은 힘겨운 듯 찡그린 얼굴로, 반쯤은 화가 난 듯 굳어진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해한 거라면 제대로 풀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눈을 깜빡이자, 격렬하게 진동하던 그의 눈동자가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그 찰나 그가 얼굴을 깊숙이 겹쳐오며 말했다.


“제가 직접 확인해봐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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