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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가지 마십시오 (29/54)


29화. 가지 마십시오
2023.05.11.



“기사님? 왜 다시 오셨습니까.”

이안을 발견한 백색기사단 마구간지기가 서둘러 뛰쳐나왔다.


“내 말을 좀 돌봐줘.”

“기사님도 비를 다 맞으신 것 같은데 괜찮으십니까.”

마구간지기에게 고삐를 건넨 이안은 대답할 새도 없이 대련장으로 달려갔다. 이윽고 대련장 앞에 멈춰 선 이안이 숨을 골랐다.

마구간에서 대련장까지 그리 짧은 거리가 아님에도 마주치는 이 하나 없었단 걸 떠올린 이안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아직 결투는 끝나지 않았다. 이 문을 열면 콘라드라는 기사와 결투를 하는 로즈벨리아가 있다.

밭은 숨을 내뱉은 이안은 문을 쥔 손에 힘을 실었다. 대련장 안은 검끼리 부딪치는 스산한 소리를 제외하곤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문 앞에 우두커니 선 이안의 시선은 곧장 대련장 한가운데로 향했다.


‘저걸 결투라 칭할 수 있을까.’

결투는 일방적이었다. 몰아붙이는 쪽은 로즈벨리아였고, 콘라드는 막아내기 급급했다.

내내 밀리던 콘라드가 공격 자세를 취하자 이안이 찰나 주먹을 그러쥐었다.

그의 기우를 비웃기라도 하듯, 로즈벨리아는 콘라드의 공격을 쉽게 허물어버리고 도리어 그 빈틈을 파고들었다.

콘라드의 실력은 객관적으로 나쁘지 않아 보였지만, 로즈벨리아의 검술은 그야말로 차원이 달랐다.

마치 상대의 움직임을 미리 예견하는 것처럼 모든 판단이 한발 앞섰다.

특히나 한발 물러서는 척하며 찌르는 동작은 알고도 대처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결투의 승패는 진즉 결정된 것 같은데, 왜 끝나지 않는 거지?’

콘라드의 허점을 하나하나 짚어주는 듯했던, 마치 대련 같은 결투는 로즈벨리아가 콘라드의 검을 허공에 날리면서 끝이 났다.


“결투는 로즈벨리아 경의 승리다.”

리나트의 선언에 숨을 죽이고 결투를 지켜보던 백색기사단 단원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검을 제 검집에 꽂은 그녀는 콘라드와 악수를 하고 투구를 벗었다.

이내 물결치듯 흘러내리는 황금빛 머리칼 사이로 그녀의 얼굴이 드러나자, 이안이 숨을 거칠게 삼키었다.

그녀의 웃음을 마주했을 뿐인데 심장이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뛰어대고 있었다.

그는 제 가슴께 위로 천천히 손을 올렸다. 거센 심장박동이 손바닥을 타고 전신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 요란한 울림에 귀가 먹어버릴 것만 같았다.


 


‘첫사랑을 시작하셨습니다.’

이안은 네이슨이 선언하듯 제게 뱉은 그 말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아니,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지 못하기에 그의 말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적어도 이 순간, 그는 한 가지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세상에서 그녀의 웃는 얼굴보다 더 환히 빛나는 건 없을 거라고.

*



“콘라드 경, 결과에 승복하십니까.”

“예? 다, 당연히 승복합니다.”

승복한다는 말과는 다르게 콘라드의 표정은 아직 얼떨떨해 보였다.


“다행이네요. 앞으로는 여기사에 대한 호칭을 똑바로 불러야…….”

문득 던져둔 시선 끝에 다소 이질적인 그림체가 보였다.

이안?

대련장 문 앞에 서 있는 건 분명 이안의 얼굴이 맞았다. 문제는 대련장 안에 있는 이들과는 다르게 흠뻑 젖은 몰골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황궁으로 돌아간 게 아니었나?

나는 무어라 중얼거리는 듯하던 콘라드를 지나쳐 대련장 문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곤 다시 빗속으로 뛰어드는 이안의 뒤를 쫓았다.


“클라인? 너 맞지?”

내 물음에 이안이 우뚝 멈춰 섰다.


“들어가십시오. 비가 많이 옵니다.”

“너 집에 돌아간 거 아니었어?”

“놓고 간 게 있어서 돌아왔다가…….”

놓고 간 걸 찾으러 왔다가 내가 결투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대련장까지 온 건가?


“나중에 가져가면 되지. 이 비를 다 맞고 온 거야?”

가까이에서 본 이안의 모습은 더욱더 처참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어 있었고, 단원복 어깨에 달린 견장에서 빗방울보다 굵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가뜩이나 잠도 못 잤다면서…….”

왜 이렇게 미련한 짓을 했냐는 말이 혀끝까지 차올랐다.


“지금 제 걱정해주시는 겁니까?”

“그럼 걱정을 안 해?”

나는 재빠르게 이안의 이마 위로 손을 올렸다. 미열이 있던 오전과는 다르게 이마가 불덩이였다.


“너 열 나는데? 돌아갈 땐 마차를 불러서……. 아니다, 오늘은 기사단 숙소에서 자는 게 어때?”

갈 때부터 비를 맞았을 텐데, 돌아오는 동안 이 비를 또 맞았다면 멀쩡한 게 이상하지.


“숙소요?”

“그래. 가서 옷부터 갈아입는 게 좋겠어.”

 

*



“로즈가 오늘 기사단 숙소에 머문다고 했다고?”

“예.”

온통 잿빛인 하늘을 바라보며 우울해하던 올리비아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차라리 영영 그곳에서 머무르라지.”

주위를 살핀 마가렛이 소곤거리며 말했다.


“마님, 누가 듣습니다.”

“데이비드 콜린을 안 거쳐 간 여자가 없다던데, 목석같은 로즈벨리아 하나 꼬여내지 못하다니.”

데이비드 콜린에 대한 소문이 부풀려진 건지, 로즈벨리아가 만만치 않은 상대인 건지.


“마님, 로즈벨리아 아가씨는 기사단에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기사단에는 남자들이 많으니, 분명 허우대만 멀쩡한 남자들도 있겠죠. 로즈벨리아 아가씨가 목석같아도 남자 보는 눈이 없진 않을 것 같습니다.”

제법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올리비아가 계속 얘기해보라는 듯 손을 흔들자 마가렛이 뒷말을 이었다.


“데이비드 콜린 경이 로즈벨리아 아가씨가 웬 남자랑 같이 가버렸다고 했다면서요.”

“그랬지. 아마도 기사단 사람일 거야.”

로즈벨리아가 연회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종종 써먹는 수법이었다.

주로 에드윈 홀튼, 그 남자가 로즈벨리아가 곤란에 처할 때 도와주었고 다른 기사들도 몇 번 도와주는 걸 본 적 있었다.


“로즈벨리아 아가씨를 빨리 결혼시키고 싶으신 거면, 차라리 기사단 사람과 맺어주시는 건 어떠십니까?”

기사단 사람이라.


“생각 좀 해봐야겠어. 아, 그리고 아놀드를 불러오도록 해.”

“예, 마님.”

 

*

기사단 숙소로 끌려 온 이안은 내가 지시하는 대로 순순히 따랐다. 뜨거운 욕탕에 몸을 담그고, 옷을 갈아입고, 의원에게 받아온 약을 먹은 뒤 잠에 빠졌다.


“열이 좀 더 내려야 할 텐데.”

린넨으로 이안의 땀을 닦아주던 나는 무심코 그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황궁으로 돌아가게 두는 게 나았으려나? 나는 왜 굳이 이안을 기사단 숙소에 붙잡아둔 거지?

황궁에 그를 돌봐줄 사람이 없을 리가 없는데.

거세게 쏟아지는 빗물을 아무렇지 않게 견뎌내는 그의 모습을 마주한 순간, 왜인지 붙잡아야 할 것 같았다.


“너 참……. 사람 신경 쓰이게 하는 거 알아?”

지체 높은 황자에다가 나보다 연상인 주제에, 꼬박꼬박 선배님이라고는 잘도 부르고.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보던 나는 돌연 깊은숨을 내쉬었다.

원작에서는 이안이 조만간 백색기사단을 떠나고, 머지않아 황태자 책봉식이 열린다.

그래서 이안을 만나러 백색기사단에 또 찾아갔던 데이지가 허탕을 치고 돌아왔었지.

그 뒤에는 이안의 행방을 궁금해하며 시름시름 앓던 데이지를 보다 못한 리나트가 황태자 책봉식에 데이지를 데리고 가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데이지는 황태자 책봉식에서 이안의 정체를 비로소 깨닫지만 감히 다가갈 수 없었다고, 이안을 감싸고 있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했다.

너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내가 알고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저를 죽여주실 수 있으십니까?’

불현듯 꿈에서 본 장면을 떠올린 나는 바짝 마른 입술을 매만졌다. 굳게 닫혀 있던 이안의 눈꺼풀이 열린 건 그때였다.


“좀 괜찮아?”

“선배님?”

눈을 끔뻑이던 이안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나는 빠르게 그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일어날 거 없어.”

“괜찮습니다.”

“너 괜찮지 않아.”

내 단호한 어투에 살짝 놀란 듯한 이안은 고분고분하게 침대에 등을 기댔다.


“선배님은 언제부터 여기 계셨던 겁니까?”

“네가 열감기 걸린 거에 내 책임도 조금은 있으니까.”

“선배님 책임이라뇨?”

“네가 나한테 주고 간 망토 말이야. 그거라도 있었으면 이렇게까지 심한 감기에 걸릴 일은 없었을 거 아냐.”

나를 올려다보던 이안의 입꼬리가 찰나 크게 움찔거렸다.


“지금 웃음이 나와? 너 열 엄청 높았어.”

옅은 웃음기를 보이는 이안을 흘겨보곤 재차 그의 이마를 짚었다. 의원이 지어준 약이 효험을 보인 건지, 열이 그새 떨어져 있었다.


“……계속 제 곁에 있어 주신 겁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보다시피. 너 여기에 그대로 두고 갔다간 혼자 끙끙 앓을 거 같아서.”

“…….”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이안의 눈동자가 바로 눈앞에서 일렁였다. 여차했다간 그 깊은 바닷속으로 그대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아,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이제 괜찮은 거 같으니까 나는 이만…….”

의자에서 다급히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손목 위로 열기가 얽혀들었다.

시선을 흘긋 내리자 내 손목을 붙잡은 커다란 손이 보였다.


“가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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