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정식 결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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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정식 결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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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정식 결투
2023.05.08.
“결투라니요? 나보고 여자를 상대로 검을 들라는 겁니까?”
“원한다면 목검으로 결투해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게 겁이 나십니까?”
콘라드는 황당하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 얼굴 위로, 문득 대련해주겠다는 내 말에 기뻐하던 이안의 얼굴이 떠올랐다.
만약 이 자리에 이안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 반응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왜인지 웃음이 나려 했다.
“지금 내가 겁을 내는 것처럼 보입니까? 나는 지금 그쪽을 배려하려는 겁니다.”
“아아, 배려요?”
그건 내가 너에게 베풀어야 할 미덕인 거 같은데?
“그렇습니다. 나는 수호기사단 내에서도 실력이 있다고 꼽히는…….”
“좋습니다. 결투할 때는 피차 배려하지 않는 걸로 하죠.”
콘라드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들기며 말했다.
“나는 그쪽과 결투를 할 생각이…….”
“정식 결투는 대련장에서 해야 하지만 거기까진 갈 생각이 없어 보이시니 어쩔 수 없네요.”
바닥에 꽂아둔 검을 가뿐히 집어 들자, 콘라드가 싸울 의사가 없다는 듯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정말 나와 결투를 하겠단 겁니까? 대체 무슨 자신감인 건지.”
“검을 맞대보면 모든 게 명확해지지 않겠습니까.”
콘라드가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수호기사단 기사가 그의 팔을 툭 건드리며 말했다.
“콘라드 경과 검을 맞대는 게 소원이라는데, 한번 들어주십시오.”
그 말에 발끈하고 나선 건 시몬이었다.
“그쪽이야말로 로즈벨리아 선배님과 검을 맞대는 걸 영광으로 여기셔야 할 겁니다.”
“콘라드 경이 영광으로 여겨야 한다고요?”
“로즈벨리아 선배님은 대련을 받지 않으시거든요.”
“실력이 들통날까 봐 그런 거 아닙니까?”
“그 반대입니다! 너무 강하셔서 대련을 피하시는 겁니다.”
수호기사단 기사는 반박할 가치도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여차하면 백색기사단과 수호기사단의 기 싸움으로 번질 기세라 콘라드가 리나트의 눈치를 흘긋 살폈다. 그러자 내내 굳은 얼굴로 서 있던 리나트가 입을 열었다.
“로즈벨리아 경의 말대로 검을 맞대면 모든 게 명확해지지 않겠나. 모든 건 경의 선택이지만 기사가 결투를 거절하는 건, 내가 보기에도 경이 도망치는 걸로 보이는데.”
“도망치는 게 아니라…….”
콘라드가 말꼬리를 흐리는 사이 리나트가 재차 입을 열었다.
“여기서 콘라드 경을 제외하고 여기사를 ‘경’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달리 불만을 가진 이가 있는가.”
리나트의 물음에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수호기사단 기사들의 얼굴을 살펴보니 썩 내키는 눈치는 아니지만, 콘라드처럼 전면에 나설 용기가 있는 기사들은 없는 듯했다.
황제 폐하까지 ‘경’이라고 칭했다고 하니 거부하긴 애매한 거겠지.
“콘라드 경이 이긴다면 여기사에 대한 호칭을 마음대로 불러도 좋습니다. 하지만 내가 이긴다면 모든 여기사에게 ‘경’이라는 호칭으로 제대로 불러야 할 겁니다.”
콘라드가 실력으로는 인정받는 듯하니, 내가 콘라드를 이겨 보이면 분명 다른 기사들은 군말 없이 따라올 것이다.
그 판단이 서자 머릿속에 이 결투를 빨리 끝내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
나는 여전히 망설이는 기색인 콘라드를 향해 말했다.
“콘라드 경, 지금 검을 꺼내 들지 않으면 후회할 겁니다.”
한숨을 푹 내쉬어 보인 콘라드가 검집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주변에 있던 수호기사단 기사들이 눈치껏 뒤로 물러나면서 제법 넓은 공간이 생겼다.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을 힐긋 올려다본 내가 검을 고쳐잡으려는 찰나였다.
“지금 여기서 뭣들 하는 건가.”
설마, 이 목소리.
“가브리엘 단장님을 뵙습니다.”
뒤이어 들려온 리나트의 목소리에 눈을 질끈 감았다.
“로즈벨리아, 어찌 된 일인지 네가 설명해 보아라.”
“제가 콘라드 피어스 경에게 결투를 신청했습니다.”
“결투?”
“여기 있는 콘라드 경께서 여기사에게 ‘경’이라는 호칭으로 부를 수 없다기에…….”
가브리엘은 내게 그만 말해도 좋다는 듯 손을 올려 보였다. 그러곤 곧장 콘라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한데 왜 이곳에서 이러고 있는 게냐. 대련장으로 가지 않고.”
뜻밖의 말에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콘라드는 가브리엘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단장님, 저는 수호기사단의 콘라드 피어스라고 합니다. 백색기사단 소속 여기사가 다칠 수도 있는데 어째서 말리지 않으시는 겁니까?”
“허허. 누가 다친단 말인가. 그럴 일 없으니 쓸데없는 걱정은 말게.”
“예?”
“자네는 이 결투를 하지 않으면 분명 후회하게 될 테야. 그러니 진심으로 임하게.”
웃음기가 어려 있던 가브리엘의 눈초리가 단숨에 매서워졌다.
“그게 무슨…….”
가브리엘은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듯 리나트 쪽으로 몸을 홱 돌렸다.
그 찰나 가브리엘의 망토가 콘라드의 얼굴 위로 나부끼자, 반대편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몬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하여간 못 말린다니까.
“결투는 대련장에서 정오에 하는 게 어떤가. 로즈벨리아의 입회인은 내가 하겠네.”
“그렇다면 콘라드 경의 입회인은 제가 하겠습니다.”
가브리엘이 이어 리나트까지 나섰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 몰랐는지 콘라드의 얼굴은 시시각각으로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아니, 저는…….”
“그럼 대련장에서 뵙죠, 콘라드 경.”
입이 떡 벌어진 콘라드에게 쐐기를 박은 나는 본관 쪽으로 향하는 가브리엘을 따라나섰다.
“죄송합니다, 단장님.”
“죄송할 게 무어야. 수호기사단 부단장에게 단단히 일러두라 했는데, 저런 기사들이 한둘쯤은 있을 줄 알았지. 차라리 잘 됐다. 기선 제압은 초반에 필요한 법이니까.”
무어라 대답하려는 찰나,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졌다. 날이 흐리더니 기어이 비가 쏟아지려는 모양이었다.
“코를 납작하게 해주거라.”
*
“황자님, 오늘은 왜 이렇게 빨리 오셨…….”
서류 너머로 보이는 이안의 모습을 발견한 네이슨이 두 눈을 끔뻑거렸다.
분명 멀쩡한 모습으로 황궁을 나선 이안이 물에 흠뻑 젖은 몰골을 하고 서 있었다.
“네이슨.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줘.”
“꼴이 그게 뭡니까? 설마 비를 맞고 오신 겁니까?”
“어쩔 수 없잖아.”
네이슨이 건넨 천을 받아든 이안이 머리를 가볍게 털었다. 천이 금세 젖어 들자, 네이슨이 곧바로 새 천을 건넸다.
“마차를 부르셨어야죠. 아니면 망토라도……. 망토는 또 어디 간 겁니까?”
“잔소리 그만하고, 갈아입을 옷이나…….”
이안이 돌연 말을 멈추었다. 집무실 문밖에서 짧은 노크 소리가 들려온 탓이었다.
“들어와.”
“이걸 황자님께 전해달라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이는 친위대장인 카를이 부리는 자였다.
몸이 괜찮다는 로즈벨리아의 말을 온전히 신뢰할 수 없어 카를에게 로즈벨리아를 멀리서 지켜보란 명령을 내렸는데, 그에 대한 보고를 올린 모양이었다.
“그만 나가 봐.”
남자가 전하고 간 서신을 읽던 이안의 미간이 서서히 좁아졌다.
“무슨 일입니까, 황자님.”
‘내가 기사단에서 나오자마자 이런 일이 있었단 말이지.’
수호기사단 내 실력자로 꼽히는 콘라드 피어스라는 자가 로즈벨리아와 결투를 한다고?
당연히 그녀가 이길 거라고 확신하면서도 입안이 바짝 말라왔다.
그도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마치 들불처럼 번져갔다. 이안은 기껏 풀었던 단원복 단추를 다시 채우기 시작했다.
“황자님?”
“말해.”
“옷을 왜 다시 입으시는 겁니까?”
“기사단에 가봐야겠어.”
그녀가 누군가와 결투를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안 이상, 이곳에 가만히 있을 순 없다는 것만은 명확했다.
“안 됩니다. 밖에 비가 많이 옵니다. 가시려면 마차를 타고…….”
“그럴 시간 없어.”
네이슨은 붙잡을 새도 없이 집무실을 뛰쳐나가는 이안의 뒷모습을 그저 망연히 쳐다볼 뿐이었다.
*
나와 수호기사단 기사가 결투를 한다는 소문이 그새 퍼진 건지, 대련장에는 제법 많은 인원이 모여들었다.
대부분 아는 얼굴들이었다. 바네사, 시몬, 루카스, 에드윈…….
약 기운이 밀려오는 건지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는 에드윈의 얼굴을 보자마자 웃음이 터졌다.
에드윈이 이런 자리에 빠지면 섭섭하지.
만약 이안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자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결투하는 것을 반가워하지 않았으려나.
그 생각을 하니 일찍 보낸 게 아쉽다는 생각도 들었다. 질투하는 모습이 꽤 귀여웠을 테니까.
“백색기사단 소속 로즈벨리아 윈터스 경이 수호기사단 소속 콘라드 피어스 경에게 결투를 신청한 바, 콘라드 피어스 경의 의견에 따라 손에서 먼저 검을 놓친 자가 결투에서 패한 걸로 하겠다. 로즈벨리아 경은 동의하는가.”
나를 보는 리나트의 시선에 일말의 불안감이 섞여들었다. 반면, 가브리엘의 얼굴에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동의합니다.”
정식 결투는 로즈벨리아의 꿈에서 본 것이 전부인데, 하나도 떨리지 않았다.
내게는 지금 이 대련이 마치 펜싱 경기 같았다. 심장박동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을 거세게 울려대는 이 감각.
그래, 나는 이 긴장감을 누구보다 즐기던 사람이었지.
“장비는 두 사람 모두 투구를 쓰고, 방패 없이 롱소드로 대결하는 걸로 정해졌다. 불만은 없겠지.”
“없습니다.”
내가 천천히 검을 뽑아 들자, 콘라드 역시 검을 뽑아 들었다.
검을 들고 있는 모양새를 보니 결투를 하는 척 시늉만 내다가 내 검을 날릴 생각인 건가?
웃기지도 않아, 진짜.
눈앞의 남자가 퍽 가소로워 절로 웃음이 배어났다.
입회인인 가브리엘과 리나트가 뒤로 물러서는 것으로 결투는 시작되었다.
콘라드와 검을 맞댄 나는 검의 뒷날로 그의 검을 슬쩍 밀어내고, 곧바로 그의 목을 겨냥했다.
내 검 끝이 그의 목 언저리를 빠르게 파고들자 화들짝 놀란 콘라드가 부랴부랴 검을 고쳐 드는 게 보였다.
“진심으로 응하는 게 좋을 겁니다. 이번에는 내가 멈췄지만, 다음에는 진짜로 벨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