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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결투를 신청하는 바입니다 (27/54)


27화. 결투를 신청하는 바입니다
2023.05.04.



“어디가 어떻게 아픈데?”

“머리가 아픈 것 같습니다.”

“다른 증상은?”

물끄러미 나를 응시하던 이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따금 숨이 잘 쉬어지지 않습니다.”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면 심각한 거 아닌가?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가슴께를 부여잡고 있었던 거 같은데.


“의원을 봐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너 같은데?”

“몸에 별다른 이상은 없……다고 들었습니다.”

“확실한 거야? 일단 처치실부터 가자.”

“저는…….”

이안의 눈동자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이안이 멈칫한 틈을 타 손을 빼낸 나는 내 어깨 위에 걸쳐진 망토를 그에게 둘러주었다.


“그리고 망토도 네가 입어.”

“아니, 저는…….”

아프긴 한데 처치실에는 가기 싫은 건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던 나는 멀뚱히 서 있는 이안의 팔을 덥석 잡아 처치실로 향했다.


“아무도 없네. 어디 가셨나?”

본관 건물에 있는 처치실에는 의원이 상주해 있는데, 오늘은 문만 열려 있을 뿐 의원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저는 이제 괜찮아진 것 같습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나는 살짝 상기된 듯한 이안의 뺨을 흘긋 살피곤 그의 이마 위에 손을 올렸다. 아직 미열이 있었다.


“아직 열이…….”

이마 위에서 살짝 미끄러져 내린 시선 끝에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가 있었다. 시선이 마주쳤을 뿐인데, 손끝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미안, 내가 또……. 이 버릇을 고쳐야 하는데…….”

내가 손을 떼어내려는 걸 눈치챘는지, 이안이 제 손으로 내 손등 위를 덮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잖습니까.”

“어?”

“얼마든지 만지셔도 된다고요.”

빤히 바라보는 저 시선 때문일까. 아니면 내 손가락 위로 재차 얽혀드는 단단한 감각 때문일까.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괜스레 목을 가다듬던 나는 이안의 얼굴 너머로 보이는 창문 쪽으로 슬쩍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열은 쟀으니까 손은 내려도 될 거 같은데.”

“선배님……. 좋습니다.”

응? 뭐라고 한 거지?

읊조리는 듯한 말소리라 기껏 들은 건 선배님이라는 단어와…….

좋습니다?


“바, 방금 뭐라고 했어?”

“선배님의 손이 닿는 게 좋다고요.”

“아아.”

깜짝이야.


“시원해서 좋습니다.”

눈을 지그시 감은 이안이 내 손바닥에 제 머리를 살짝 기댔다.

마치 내게 응석을 부리는 것 같은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묘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왜인지 안쓰럽기도 하고. 조금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여기서 마냥 기다릴 순 없으니, 숙소에 가서 좀 쉬는 게 어때?”

내 말에 이안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어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해서 피로한 것뿐입니다.”

“물론 결정은 네 몫이지만, 내일도 이런 상태라면 대련 안 해줄 거니까 알아서 해.”

이안이 눈을 번쩍 뜬 건 그때였다.


“예? 내일이요?”

“그래.”

“내일 저와 대련해주신다고요?”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대련이라는 패가 통하는구나.


“하지만 네가 내일도 이렇게 열이 나거나 피로하다면 곤란하지. 나도 간만에 몸을 좀 풀고 싶은데, 아픈 사람을 봐주면서 대련하고 싶진 않거든.”

“저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언제 아픈 사람처럼 굴었냐는 듯 이안의 눈동자에 생기가 어렸다.


“그래, 푹 쉬고 내일 좋은 상태로 봐.”

고개를 끄덕여 보인 이안은 그대로 처치실 문으로 향하는 듯하다 다시 내 앞으로 돌아왔다.


“감기는 아니니, 이건 선배님이 걸치는 게 좋겠습니다.”

내 어깨 위에 제 망토를 다시 걸쳐준 이안은 망토 매듭까지 야무지게 묶어준 뒤, 서둘러 처치실을 빠져나갔다.


“……나도 괜찮다니까.”

실없는 웃음을 흘리던 나는 시선을 내려 어깨 위를 보았다.

내 망토와 별다를 게 없어 보이는데 왠지 조금 더 따뜻한 거 같기도 하고.


 

*



“그러니까, 부단장님 말씀은 백색기사단 여기사에게도 ‘경’이라는 호칭을 써야 한다는 겁니까?”

연무장으로 향하던 나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날 선 음성에 우뚝 멈춰 섰다.

별관 쪽인가?


“여기사도 기사 아닌가. 여기사를 부르는 별다른 호칭이라도 있나?”

리나트의 목소리였다. 호칭 문제로 수호기사단 내에서 실랑이가 있는 건가?

하기야 열 명 남짓한 기사들이 왔는데, 그들 모두가 여기사에게 ‘경’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라는 걸 쉽게 받아들일 리 없었다.

리나트가 특이한 케이스일 뿐.


“그건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여자에게 ‘경’이라는 호칭을 씁니까.”

“경들이 잊은 모양인데 우리 수호기사단 기사들이 마수를 처치하지 못해 백색기사단에 지원을 요청했고, 그 마수를 처치한 게 바로 이 백색기사단의 로즈벨리아 윈터스 경이다. 황제 폐하께서도 ‘경’이라는 호칭으로 부르셨는데, 자네들이 그렇게 부르지 못하겠다는 건가?”

황제 폐하라는 말에 웅성거림이 커졌다. 뜻밖의 말에 잠시 놀란 내가 뒤돌아서려던 찰나였다.


“저는 그렇게 부르지 못하겠습니다.”

아니, 황제 폐하가 그렇게 불렀다는 데도 못 하겠다고?

그대로 정리되는 줄 알았더니만.

작게 한숨을 내쉰 나는 하는 수 없이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그 이유가 뭔가요?”

“로즈벨리아 경.”

리나트가 내 이름을 입에 담자, 수호기사단 기사들 사이에서 큰 소란이 일었다.

저 여기사가 정말로 마수를 처치한 게 맞냐, 말이 되냐 이런 대화들이 내 귀에도 또렷하게 박혀 들었다.


“수호기사단 일이지만, 저와 같은 여기사에 대한 호칭 문제로 시끄러운 것 같으니 제가 잠시 발언권을 가져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십시오.”

리나트의 옆에 선 나는 진갈색 머리의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황제 폐하가 ‘경’이라고 칭했다는 데도 끝까지 부를 수 없다고 주장한 남자가 바로 이 남자였다.


“여기사를 ‘경’이라고 부를 수 없는 연유가 대체 무엇입니까?”

“그야…….”

남자는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매를 보고 있자니 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마땅한 명분도 없고, 그냥 그렇게 부르기 싫으신 거죠?”

그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하나같이 뻔했다.

기사라는 직업이 남자들의 전유물이었으니, ‘경’이라는 호칭도 애초에 남자에게만 허락된 호칭이라고 생각하는 것일 터였다.


“그 호칭은 존중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데, 나에게는 여기사를 존중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왜죠?”

“강하지 않으니까요.”

아아, 그러니까 강한 상대에게는 존중하고자 하는 마음이 든다는 거네.

남자는 강해서 ‘경’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게 마땅하고, 여자는 아무리 기사라고 한들 약하니까 존중할 수 없어서 ‘경’이라는 호칭으로 부를 수 없다?

얘 진짜 어이없네.

속에서 불길이 확 일었다. 분노를 애써 내리누르며 입을 떼려는 찰나, 누군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 말 취소하십시오! 로즈벨리아 선배님은 아주 강하십니다.”

“시몬?”

씩씩거리며 내 옆으로 다가온 시몬은 허리춤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저희 선배님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백색기사단 역사상 최연소 입단에, 혹시나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는 건데 남녀 통틀어 최연소 입단이란 겁니다. 그리고 입단하자마자 신입 기사 신분으로 마수 토벌에 가셨습니다. 이것 또한 최초입니다.”

로즈벨리아의 소문을 듣고 줄곧 흠모해왔다더니, 정말이었구나?


“이번에 수호기사단 기사들이 처치하지 못한 마수를 홀로 처치한 것도 저희 선배님이시고요. 저는 백색기사단에 입단하기 전부터 로즈벨리아 선배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선배님을 흠모해 이곳에 들어온 겁니다.”

“나는 직접 본 적 없으니 믿을 수 없습니다. 백색기사단에서 작정하고 꾸며낸 이야기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뭐라고요?”

나는 금방이라도 남자의 앞으로 뛰쳐나갈 기세인 시몬의 망토 자락을 붙잡았다. 그 미약한 힘에 나를 돌아본 시몬의 눈꼬리가 축 처졌다.


“여기사의 명성을 듣고 흠모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 말입니다. 차라리 아름다운 여기사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얼굴을 보러 들어왔다는 쪽이 신빙성 있겠습니다.”

“콘라드 경, 그만…….”

보다 못한 리나트가 중재하려 나서자, 나는 리나트를 향해 손을 올려 보였다. 나서지 말아 달라는 내 의사 표현을 알아챘는지 그가 입을 다물었다.


“여기사가 어떻게 싸우는지 제대로 본 적은 있으십니까?”

내 물음에 남자는 대번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여기사가 생긴 것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남자가 여자보다 약할 리가 없는데, 여기사를 뽑아서 대체…….”

“그럼 경께서는 남자고 저는 여자니, 저보다 본인이 강하다고 생각하시겠네요.”

“그건 당연한 겁니다. 여자와 남자는 기본적인 힘 차이부터…….”

그깟 힘 차이?


“좋습니다.”

“예? 뭐가 좋다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피어스 가문의 콘라드입니다. 갑자기 제 이름은 왜…….”

아무런 대꾸도 없이 콘라드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다가가자 콘라드가 큼큼거리며 시선을 슬쩍 피했다.

피하면 후회할 텐데?

검집에서 칼을 꺼내든 나는 콘라드의 발끝에 그대로 칼을 내리꽂았다. 칼은 아슬아슬한 간격을 두고 바닥에 꽂혔다.


“지,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나는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른 콘라드를 향해 한껏 입꼬리를 끌어올려 보였다.


“콘라드 피어스 경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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