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아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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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아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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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아픈 것 같습니다
2023.05.01.
“에드윈, 여기 백색기사단 본부 맞지? 내가 잘못 온 거 아니지?”
“그래, 너 제대로 온 거 맞아.”
절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파비안과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는 리나트의 뒤로 붉은 망토를 걸친 수호기사단 기사들이 열을 맞춰 서 있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백색기사단 본부를 둘러보는 기사들이 대부분이었지만, 탐탁지 않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기사들도 더러 보였다.
인원은 열 명 남짓인가?
마수 토벌은 최정예 인원으로, 되도록 소규모로 구성하는 걸 감안하면 적은 숫자는 아니었다.
“진짜로 왔네.”
“오늘부터 수업을 같이 듣는다는데?”
마을에 마수가 나타난 일로 마수 토벌 일정이 앞당겨지기라도 한 건가?
“아무리 그래도…….”
다짜고짜 기사들을 데리고 와서 오늘부터 수업을 듣겠다니.
나는 파비안과 이야기를 막 끝내고 수호기사단 기사들 앞으로 향하는 리나트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데이지의 오빠라 좋게 봐주려고 했더니만.
“괜찮겠어?”
“뭐가?”
“너 수호기사단 기사들 별로 안 좋아하잖아.”
아직도 남성 귀족만이 입단할 수 있는, 그야말로 오만함과 아집으로 똘똘 뭉친 집단.
그것이 로즈벨리아가 평가하는 수호기사단이었다.
로즈벨리아가 여기사라고 업신여기던 이들 중 대부분이 수호기사단 기사였는데, 한 공간에 같이 있어야 한다니.
“에드, 나 먼저 간다.”
“어디 가려고? 설마 단장님한테 가려는 건 아니지?”
에드윈이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거……. 좋은 생각인데?”
“가서 단장님께 따지기라도 하려고?”
단장님께 따지다니. 그럴 리가.
나는 어깨를 가볍게 들어 보이곤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보단 정리해야 할 게 있어서. 그럼 다녀올게.”
백번 양보해서 수호기사단과 함께 수업을 듣는 건 용납할 수 있었다. 마수에 대해 기본 지식도 없는 것보단 뭐라도 아는 사람들을 데려가는 편이 수월할 테니까.
그렇다면 남은 건, 백색기사단과 수호기사단 내 호칭 문제였다.
기수를 따지는 백색기사단은 선배에게만 선배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고, 동기나 후배는 이름으로 불렀다.
하지만 기수가 존재하지 않는 수호기사단은 서로에게 ‘경’이라는 호칭을 썼다.
그러니 서로의 호칭은 ‘경’으로 통일하는 게 옳았다. 물론 그 호칭은 여기사에게도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하고.
서둘러 본관 앞에 도착한 나는 익숙한 뒷모습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바네사 선배님?”
“로즈벨리아?”
바네사는 안으로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처럼 본관 앞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여기서 뭐 하세요?”
“수호기사단 놈들이랑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걷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 너는 무슨 일로 온 거야?”
로즈벨리아가 백색기사단 단원복에 망토를 입고 다니면, 시비를 걸어오는 수호기사단 기사들이 한둘은 꼭 있었다. 바네사도 분명 그런 경험이 있을 터였다.
“저도 그 일로 단장님을 좀 뵈려고요.”
“단장님을?”
“그냥 오가며 마주치는 거야 피한다지만, 백색기사단에서 함께 수업을 들으면 계속 마주쳐야 하잖아요. 제대로 호칭 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요.”
여기사에 대한 호칭 정립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에 대해 로즈벨리아도 한때는 분한 마음을 가졌었다.
백색기사단 신입 기사가 되었을 땐 자신을 기사가 아닌 레이디로 대하는 수호기사단 기사와 몇 번 싸운 적도 있었다.
로즈벨리아가 그러한 소모전을 멈춘 건, 그들의 사고 깊숙이 자리한 신념과도 같은 편견을 마주한 이후였다.
조롱하려는 의도가 담긴 게 아니라, 여기사지만 여자니 레이디로 대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그녀의 상상 이상으로 많았다.
그들 속에 자리한 편견은 너무 깊고 단단한 뿌리 같아서 단번에 뽑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걸 깨달은 로즈벨리아는 수호기사단 기사들이 바뀔 거란 기대를 버렸고, 대놓고 조롱해오는 이들만 간혹 혼쭐을 내주곤 했다.
“하기야 저것들은 어쭙잖은 레이디 타령을 하거나 애매한 호칭으로 부르겠지. 하지만 단장님께 말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상대는 수호기사단이야. 특권의식으로 똘똘 뭉쳐 있는 위선자들이라고.”
여태 묵은 감정을 토해내는 바네사의 얼굴에는 환멸이 가득했다.
“그들이 아쉬워서 여기까지 수업을 들으러 오는 건데, 우리가 왜 그들 때문에 불편해야 하죠? 기사는 응당 경으로 불리는 게 맞잖아요.”
“나도 네 생각에 전적으로 동감하지만, 저 꼰대들은 절대 그렇게 부르지 않을걸? 여자한테 경이니, 뭐니 어떻게 부르냐며 안 봐도 뻔하지.”
수호기사단 기사들이 있던 별관 쪽을 쏘아보던 바네사의 입가에 냉소가 어렸다.
평민 출신의 여기사인 바네사는 어쩌면 로즈벨리아보다 더한 가혹한 취급을 당해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자, 덩달아 분한 마음이 일었다.
“그래도 저는 말씀드리겠어요. 수업이 끝이 아니라 마수 토벌도 같이 가야 하잖아요. 거기에서까지 호칭으로 인한 피로감을 느끼고 싶진 않아요.”
“우리 단장님이야 허락하시겠지. 하지만 수호기사단 기사들이 그걸 따를 리가…….”
다가오는 인기척에 바네사가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여기 계셨던 겁니까.”
나와 바네사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뜻밖에도, 리나트였다.
“안녕하십니까, 부단장님.”
“안녕하십니까.”
서둘러 리나트에게 인사를 건넨 나와 바네사의 눈이 정면에서 마주쳤다.
설마 우리 얘기를 들은 건 아니겠지?
“한참 찾았습니다, 로즈벨리아 윈터스 경.”
응? 방금 뭐라고…….
“역시 성까지 다 붙여서 부르기엔 길군요. 백색기사단에서는 서로 이름을 부른다고 하니, 앞으로 로즈벨리아 경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
“로즈?”
“어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뭐, 그냥 아까 있었던…….”
리나트는 내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지난날 아둔했던 자신이 호칭으로 내 심기를 불편하게 한 거 같다나 뭐라나.
앞으로는 두 번 다시 그런 실수를 하지 않을 거라고, 수호기사단 기사들에게도 호칭 문제가 불거지지 않도록 단단히 일러놓겠다며 거듭 사과하고 자리를 떠났다.
역시 데이지의 오빠라 그런지, 좋게 봐줄 구석이 있긴 하네.
“아까 무슨…….”
돌연 말을 멈춘 에드윈이 소매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연신 재채기를 했다.
“너 아까부터 계속 재채기하던데 감기 걸린 거 아니야?”
“그런가?”
어째, 목소리도 이상한데.
망토도 없이 단원복만 입고 있는 에드윈을 위아래로 살펴보던 나는 곧장 어깨에 걸치고 있던 망토 매듭을 풀었다.
“내 거 망토 줄까? 이거라도 걸칠래?”
“로즈, 아무리 그래도 내가 네 망토를 뺏어 입을 정도로…….”
또, 또 저 허울뿐인 말.
은근히 기대하는 눈빛이면서.
“너 지금 춥잖아.”
“괜찮다니까.”
“어때? 따뜻하지?”
어깨에 망토를 걸쳐주며 묻자 에드윈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로즈, 망토가 이렇게 따뜻한 거였어?”
망토에서 전해지는 온기에 잠식당한 건지 에드윈은 금방이라도 망토에 얼굴을 파묻을 기세였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 아니면 숙소에서 쉬든가.”
“그래야겠어.”
코를 훌쩍이던 에드윈은 이내 숙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괜찮으려나?
어느새 까만 점으로 변한 에드윈에게서 시선을 떼어내고 막 돌아선 때였다.
“선배님.”
분명 아까까진 근처에 아무도 없었는데, 내게 다가온 건 이안이었다.
“클라인?”
“그…….”
“나한테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이안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내 눈이나 얼굴을 보는 건 아닌 거 같은데, 어딜 보는 거지?
목 언저리에 머무는 듯한 그의 시선을 힐긋 따라 고개를 아래로 내리려는 찰나, 이안이 입을 열었다.
“오늘 해가 뜨지 않아 날이 제법 쌀쌀합니다.”
“그런가? 나는 괜찮은 거 같은데.”
슬쩍 위를 올려다보자 이안의 말마따나 구름이 가득 낀 하늘이 보였다.
날이 꽤 흐리긴 하네.
햇살 한 점 내리지 않는 하늘을 구석구석 살펴보던 나는 어깨 위에 와닿는 이질적인 감각에 황급히 고개를 내렸다.
다소 황량했던 단원복 위로, 조금 전까지 이안이 걸치고 있던 망토가 걸쳐져 있었다.
“잊으신 겁니까? 선배님은…….”
“클라인, 내 걱정을 해주는 건 고마운데 나는 괜찮아.”
“그럼 제가 그때 말씀드렸던 의원에게 진맥을 받아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아아, 그 저명하다는 의원?
마수로 인한 내상은 당연히 없겠지만 만에 하나 오러로 인한 내상이 있는 거라면?
원작에서 로즈벨리아가 소드마스터라는 게 알려진 건 원작 초중반 부 그러니까, 겨울 초입이었다.
보통 가을에 마수 토벌을 떠나니 시기적으로는 마수 토벌에서 돌아온 이후였다.
로즈벨리아는 소드마스터라는 걸 드러내려 하지 않았는데, 공교롭게도 마수 토벌을 다녀온 후 그녀가 소드마스터라는 게 알려졌다?
만약 토벌에서 로즈벨리아가 오러를 쓸 일이 필연적으로 생겼고, 그걸 가브리엘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들킨 거라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토벌에 참여해야 한다.
“내가 말했지? 내 몸은 내가 더 잘 안다고……. 너야말로 괜찮은 거야?”
“예?”
손끝으로 한껏 좁아진 이안의 미간을 가리키자, 그가 얼떨떨한 얼굴로 되물었다.
“찡그리고 있어서. 혹시 너도 어디 아픈 거야?”
“아닙니다, 저는…….”
그러고 보니 얼굴이 조금 상기된 것 같기도 한데?
그 생각이 스치기 무섭게 손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감기 걸린 거 아니야? 열이 조금 있는 거 같은데…….”
이안의 이마를 뒤덮은 내 손등 아래로 살짝 커진 눈동자가 느릿하게 깜빡였다.
내가 또 스스럼없이 만진 건가?
황급히 이안의 이마 위에서 손을 떼어내려는데, 왜인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마치 무언가가 내 손을 누르는 듯한…….
재차 고개를 들어 올린 내 눈에 들어온 건 내 손등을 뒤덮은 커다란 손이었다.
“저기, 클라인?”
이안의 손바닥 안에 꼼짝없이 갇힌 모양새인 손끝을 움찔거리자 그의 손가락이 덩달아 움찔거렸다.
따라 하라는 게 아니라 놔주라는 뜻이었는데?
하는 수 없이 힘으로 손을 빼내려는 순간, 단단한 손마디가 내 손가락 사이로 깊숙이 얽혀 들어왔다.
“저 아픈 것 같습니다, 선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