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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첫사랑을 시작하셨습니다 (25/54)


25화. 첫사랑을 시작하셨습니다
2023.04.27.



“가브리엘 단장님 오셨습니까.”

수호기사단 본관에 들어선 가브리엘이 시선을 들어 리나트를 보았다.


“란돌프는 안에 있는가.”

“예, 기다리고 계십니다.”

리나트가 눈짓으로 가리킨 곳은 단장실이었다. 가브리엘은 옅은 숨을 토해내더니 이내 걸음을 옮겼다.


“자네도 따라 들어오게.”

고개를 숙여 보인 리나트는 가브리엘의 뒤를 따르다가, 한발 앞서 단장실의 문을 열어주었다.


“어서 들어와 앉게, 가브리엘.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 오는 길인가?”

“그렇네만. 내게 할 이야기라는 게 무언가.”

찻잔을 내려놓은 란돌프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자네는 수호기사단에 머무는 게 여전히 싫은가 보군,”

“피차 서로가 불편한 건 마찬가지 아닌가,”

란돌프의 입가에 웃음기가 멎어 들었다.

한때는 두 사람 모두 수호기사단 소속 기사였다.

서로 단장이 되겠다며 아웅다웅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열린 사고를 가진 가브리엘은 변화를 꿈꾸었고, 보수적인 수호기사단은 그에 응답하지 않았다.

결국 가브리엘은 제 발로 수호기사단을 떠났고, 여전히 귀족 신분을 지닌 남자만 입단할 수 있는 수호기사단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건 단순한 차별을 넘어서 신분과 성별에 가려진 인재를 놓치는 꼴이거늘.’

수염을 매만지던 가브리엘이 쓴웃음을 삼켰다.


“……황제 폐하의 우려가 크니 마수 토벌을 앞당겨야 할 거 같은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란돌프가 넌지시 말했다.


“동감하는 바네.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으니,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출발하는 게 좋을 거 같군.”

“수호기사단에서는 이미 명단을 꾸렸습니다.”

소파 옆에 우두커니 서 있던 리나트가 조심스럽게 건넨 말에 가브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색기사단에서도 조만간 명단을 꾸리겠네.”

“그나저나 이번에 마수를 처치한 게 백색기사단의 여기사라던데, 그게 사실인가?”

“맞네. 우리 소속의 로즈벨리아 윈터스 경이라네.”

두 사람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리나트의 눈이 크게 뜨였다.


‘로즈벨리아 윈터스라면…….’

광장에서 데이지를 구해준 윈터스 가문의 영애였다.


“혹시 윈터스 가의 귀족 영애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자네는 내심 다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역시 수호기사단 기사의 생각은 하나같이 똑같군.”

“예?”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는 듯한 리나트의 표정을 살핀 가브리엘이 실소를 터뜨렸다.


“나는 지금 귀족 영애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마을에 나타난 마수를 처치한 로즈벨리아 윈터스라는 기사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네. 공적인 자리에서는 호칭을 똑바로 했으면 좋겠는데.”

“호칭을 똑바로 하라니. 여기사를 칭하는 호칭이라도 따로 있는 겐가. 알다시피 우리 수호기사단에는 여기사가 없어서…….”

란돌프가 수염을 쓸어내리며 한 말에 리나트의 미간이 서서히 좁혀졌다.


“여기사라고 호칭이 다를 건 없네. 기사에게는 일반적으로 경이라는 호칭을 붙이지 않나.”

“그거야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레이디에게 어떻게 경이라고 부른단 말인가.”

란돌프가 곤란하다는 듯 이마를 매만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가브리엘이 낮은 한숨을 삼키었다.


“로즈벨리아 윈터스가 여자임은 분명하나 엄연히 기사네. 그리고 황제 폐하께서도 로즈벨리아 윈터스 경이라고 칭하셨는데, 자네들이 그렇게 못 부르겠다는 건가?”

가브리엘의 일갈에 단장실 내부가 고요해졌다. 란돌프는 딱딱하게 굳어진 가브리엘의 표정을 살피곤 빠르게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도 그렇게 칭하셨다면 우리도 그렇게 불러야지. 한데 듣는 레이디의 기분이 언짢지 않을지.”

“걱정하지 말게. 내가 아는 우리 백색기사단 소속의 기사들이라면 레이디라는 호칭보다 경이라는 호칭을 훨씬 더 반길 테니.”

그 순간 리나트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자신이 로즈벨리아를 어떻게 불렀는지 떠올린 리나트가 제 이마를 짚었다.


 


‘호칭을 생략하거나 윈터스 영애라고 불렀었지.’

그 자신도 모르게 로즈벨리아를 기사가 아닌 귀족 영애로 대하고 있었다. 무의식중에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다 귀족 영애로 대한 걸지도 모른다.

사실 리나트도 여기사를 제대로 마주한 건 로즈벨리아가 처음이었다.

치안대나 백색기사단에 여기사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워낙 수가 드물어 마주칠 일 자체가 없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경이라는 호칭으로 불러야 했는데, 대체 왜 그랬지?’

로즈벨리아를 처음 마주했던 게 연회여서? 드레스 차림의 로즈벨리아가 잔상에 깊게 남아서라고 하기엔…….

리나트는 고개를 짧게 내저었다. 어떤 이유를 들이밀어도 그저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명백한 실수 아니, 이건 제 편견이 만든 고의였다.

데이지가 검을 배우겠다는 걸 무작정 말리려던 것도 제 기저에 레이디는 검과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여자는 남자가 지켜줘야 할 존재라고 배워왔고, 그 가르침을 당연하게 여겼다.


“자네, 왜 그러고 있는 겐가.”

뺨을 거칠게 어루만지던 리나트는 가브리엘에게 고개를 깊숙이 숙여 보였다.


“단장님께 크나큰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수호기사단과 치안대에서도 처치하지 못한 마수를 홀로 처치한 게 로즈벨리아 윈터스 경이라니, 정말 뛰어난 실력자인가 봅니다.”

리나트의 입에서 로즈벨리아의 칭찬이 나오자, 가브리엘의 얼굴에 처음으로 화색이 돌았다.


“이번에 함께 마수 토벌을 가보면 알게 될 걸세.”

 

*



“허허, 네이슨 네가 그런 오해를 하다니.”

“나보다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 여자일 리 없다는 편견이 있었던 거지?”

이안의 물음에 네이슨이 얼굴을 붉혔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여성분일 거라곤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황자님.”

“가브리엘 단장에게 듣자 하니, 이번에 마을까지 내려온 마수를 처치한 것이 백색기사단의 여기사라던데…….”

칼리스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안이 대답했다.


“맞습니다. 네이슨에게 오해를 받은 그 로즈벨리아 윈터스 경이 처치한 겁니다.”

반성의 의미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네이슨이 어느새 머리를 빼꼼 들어 올리며 물었다.


“황자님, 아무리 기사라고 해도 경이라는 호칭은 레이디께 실례가 아닐까요?”

“여자라고 해서 기사가 아닌 건 아니잖아.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지?”

이안이 미간을 좁힌 채로 되물었다.


“……그것도 그렇네요.”

“허허, 대련에서 너를 가뿐히 이기고, 마수까지 홀로 처치하다니 아주 대단한 실력을 지닌 기사로구나. 여기사도 기사인데 마땅히 경이라는 호칭으로 불러야지.”

“역시 현명하십니다.”

칼리스토는 어느새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는 이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안.”

“예, 폐하.”

이안 역시 제 앞에 앉아 있는 칼리스토를 마주 보았다. 저를 바라보는 눈빛 속에 짙은 불안감이 배어 있다는 걸,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안 자신은 느낄 수 있었다.


“몸은 괜찮으냐. 혹 어딘가 이상하진 않으냐.”

“괜찮습니다.”

“그럼 됐다. 스물두 번째 생일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금만 더 지켜보면 되겠구나.”

칼리스토는 이렇듯 알 수 없는 말을 종종 해왔다.

오늘처럼 은밀히 찾아와 몸에 어떠한 변화가 있지 않냐고 물어보았고,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면 눈에 띄게 안도한 기색을 보이며 돌아갔다.


“아직도 제게 말씀해주실 수 없는 겁니까.”

“때가 되면 다 말해주마.”

다소 후련한 얼굴로 몸을 일으킨 칼리스토가 다시 이안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엔 웃음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네가 누군가를 마음에 두었다니, 아비로서 기쁘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음에 두었다는 게…….”

칼리스토는 얼떨떨해 보이는 이안의 표정을 살피곤 이마를 짚었다.


“설마 네 마음도 여태 모르고 있던 게야?”

“…….”

“바이올렛이 살아 있었으면 분명 좋아했을 테지.”

바이올렛이라는 이름에 이안의 눈동자가 애틋하게 가라앉았다.

바이올렛은 정략혼 상대였던 현 황후와는 다르게 칼리스토가 손수 들인 유일한 황비이자 이안의 친모였다.


“너는 부디 잘 지켜내거라.”

칼리스토는 이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준 뒤,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인사를 올려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이안은 홀로 침잠했다.


“내 마음이라는 게…….”

“설마 정말 모르시는 겁니까?”

네이슨이 불쑥 건넨 말에 이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대체 뭘 모른다는 거야?”

보다 못한 네이슨이 한달음에 이안의 앞으로 달려왔다. 네이슨은 답답하다는 걸 어필하려는 듯 가슴을 두들기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로즈벨리아 님을 떠올리면 어떠십니까?”

“로즈벨리아 님?”

이안이 한쪽 눈썹을 찌푸린 채로 되묻자 네이슨이 큼큼거리며 대답했다.


“저는 기사단 소속도 아니고, 엄연히 귀족 영애기도 하시니 그렇게 불러도 되잖습니까. 경이라는 호칭은 아직 입에 붙지 않습니다.”

“그럼 풀네임을 부르도록 해.”

“예예. 로즈벨리아 윈터스 님을 떠올리면 어떠시냐고요.”

툭 불거진 이안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제 품 안에서 동그래진 눈으로 올려다보던 얼굴이었다.

뒤이어 한쪽 팔에 쏙 안겨 오던 자그마한 몸과, 입술 께에 머물렀던 그녀의 숨결이 떠오르자 심장이 마치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날뛰어댔다.


‘또 왜 이러지.’

이안이 가슴을 부여잡자마자 네이슨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건 필시 기적입니다.”

“기적?”

“저는 제가 죽기 전까지 황자님이 누군가를 마음에 품는 모습은 보지 못할 줄 알았거든요.”

“……마음에 품어?”

그러니까.

마음에 품는다는 게.


“경하드립니다, 황자님.”

“…….”

동경을 말하는…….


“첫사랑을 시작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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