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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절대 안 됩니다 (24/54)


24화. 절대 안 됩니다
2023.04.24.



 


“에드…….”

에드윈을 부르려던 내 목소리는 뒤이어 들려오는 비명과도 같은 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카, 카밀라 님!”

“카밀라 님, 괜찮으세요?”

카밀라의 뒤를 지키고 있던 여자 두 명이 재빠르게 그녀를 일으켰다.

원작에서도 늘 같이 다니더니 카밀라 수호단인가?


“카밀라 님, 드레스가…….”

“파우더룸으로 가셔야겠어요.”

카밀라가 입고 온 흰 드레스는 온갖 파티 음식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넘어지면서 붙잡을 것이 없던 카밀라가 급하게 테이블보를 잡아당긴 모양이었다.

저런 걸 보고 자업자득이라고 하는 거지.


“데이지 님, 오늘 일은 잊지 않겠어요.”

카밀라의 악의 가득한 목소리에 데이지가 움찔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제가 데이지 님을 발견하고 너무 반가워서 팔을 잡아당겼는데, 하마터면 두 분 모두 크게 다칠 뻔하셨네요.”

내 목소리에 힐긋 나를 돌아본 데이지의 눈이 커졌다. 데이지는 아, 하고 낮은 탄성을 뱉더니 다시 카밀라를 바라보았다.


“오늘 일이라는 게 카밀라 님이 넘어지신 걸 말하는 거라면……. 카밀라 님이 갑자기 제 쪽으로 넘어지셔서 저도 함께 넘어질 뻔했는데, 도리어 제게 사과를 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지금 나보고 사과를 하라고요?”

카밀라가 발끈하며 언성을 높이자, 에드윈이 돌연 겉옷을 벗었다.


“레이디. 많이 놀라셨겠습니다.”

“뭐, 크게 놀라진…….”

당연히 에드윈이 제게 물은 줄 알았던 카밀라가 대답하려는 찰나, 그의 겉옷은 데이지의 어깨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괜찮으십니까, 레이디.”

그 모습을 코앞에서 지켜본 카밀라가 어이없다는 듯 머리를 쓸어올렸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하는 눈빛으로 에드윈을 쏘아보던 카밀라의 시선은 이내 나에게로 닿았다.


“당신은 누구죠?”

카밀라의 물음에 나는 바로 가면을 벗었다. 그러자 카밀라와 그녀를 지키는 카밀라 수호단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졌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윈터스 가문의 장녀, 로즈벨리아 윈터스입니다.”

“어머, 그 제국 내 최고 미인이라던…….”

“여자의 몸으로 백색기사단에 들어갔다던 그 귀족 영애 맞으시죠?”

나를 못마땅한 기색으로 훑어보는 카밀라와는 다르게 카밀라 수호단은 내게 큰 관심을 보였다.


“맞습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건 처음인데 정말 미인이시네요.”

“백색기사단 입단 시험은 웬만한 실력자들도 입단하기 힘들다던데, 몇 년 전에 귀족 영애가 들어갔다기에 한동안 소란스러웠잖아요.”

두 사람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카밀라가 입가에 조소를 머금었다.


“백색기사단에는 여기사가 더러 있다던데, 백색기사단 기사가 된 게 뭐 대수인가요? 귀족 영애라면 좋은 혼처를 찾는 게 더 중요하죠. 아무리 미인이라고 해도 검을 들고 설치는 여자를 누가 좋아하겠어요?”

“카밀라 님,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로즈벨리아 님이 얼마나 멋있는…….”

금방이라도 카밀라의 앞으로 뛰쳐나갈 기세인 데이지의 팔을 부드럽게 잡아당긴 나는 입매를 한껏 끌어당겨 보였다.


“모두의 가치관이 다르니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죠. 카밀라 님은 아주 좋은 아내가 되실 것 같네요. 부디 카밀라 님도 좋은 남편감을 얻으시길 바랄게요.”

“지금 누가 누구 걱정을 하는 건가요? 나는 2황자님과 결혼을 약속한 사이에요. 제국 내에 이보다 더 좋은 혼처는 없을걸요?”

“그렇군요.”

나는 뒷말을 덧붙이는 대신, 카밀라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한 남자에게 시선을 두었다. 흐물거리는 녹색 머리를 가진 남자가 웬 여자에게 치근덕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 남자가 2황자인 거 같은데.

로즈벨리아의 기억 속에서 본 적 있었다. 연회에서 잠깐 마주쳤던 2황자는 안하무인에 여성 편력이 심해 로즈벨리아가 치를 떨며 싫어하던 이였다.


“지금 나와 얘기하는 도중에 어딜 그렇게 보는…….”

내 시선 끝이 멈춘 곳을 확인한 카밀라의 얼굴 위로 당황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어머, 저기 2황자님 아니에요?”

“카밀라 님, 저기 2황자님…….”

“얼른 파우더룸으로 가야겠어요.”

카밀라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와 데이지를 흘겨보았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 앞을 교묘히 막아서고 있는 에드윈까지 노려보곤 돌아섰다.

거기서 카밀라를 한 방 먹이고 데이지에게 겉옷을 주다니 아주 잘했어, 에드윈.

내가 눈으로 에드윈에게 칭찬의 메시지를 날리는 사이, 미약한 손길이 내 드레스 자락을 붙잡아왔다.


“로즈벨리아 님, 이번에도 저를 구해주셨네요.”

“네?”

응? 내가 원한 그림은 이게 아닌데?


“로즈벨리아 님이 아니었다면 분명 카밀라 님과 함께 넘어졌을 거예요. 어쩌면 저만 넘어졌을지도 모르고요.”

“아, 그……. 제가 구해줬다기보다는 도움을 조금 드리긴 했는데, 저희를 구해준 건 여기 있는 분이 아닐까요? 하마터면 저희 드레스가 포도주로 뒤덮일 뻔했잖아요.”

나는 우두커니 서 있는 에드윈의 팔을 슬쩍 잡아끌었다. 그러자 한쪽 무릎을 꿇은 에드윈이 데이지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저는 에드윈 홀튼이라고 합니다, 레이디.”

“아아, 홀튼 경이시군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전에 기사단에서도 한 번 뵌 적 있습니다만.”

몸을 일으킨 에드윈이 가면을 벗자 데이지가 알은체했다.


“아아, 그때 로즈벨리아 님 옆에 계셨던 기사님이시군요.”

“네, 그렇습니다.”

이제는 두 사람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차례였다. 슬쩍 뒷걸음질 치며 빠지려는데 왜인지 움직일 수 없었다.

시선을 흘긋 내려보니 내 드레스 자락을 여전히 꼭 붙들고 있는 데이지의 손이 보였다. 이만 가봐야겠다고 말하려는데 데이지가 나를 보며 대뜸 말했다.


“로즈벨리아 님은 정말 대단하세요.”

“네? 제가요?”

“카밀라 님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으시고 할 말을 다 하셨잖아요.”

“그건 데이지 님도 그러셨잖아요.”

데이지는 다소 민망하다는 듯 뺨을 매만졌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한 건, 오늘이 처음이에요. 저 로즈벨리아 님을 닮고 싶다고 생각해서……. 로즈벨리아 님은 검으로 남자들도 제압하는데 나는 고작 이런 말다툼도 이기지 못하면 안 될 거 같아서.”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원작에서는 보지 못했던 최애의 각성을 눈앞에서 마주하다니.

그것도 나로 인해 변해야겠다고 생각한 거라니!

카밀라에게 당하면서도 제대로 반격 한 번 하지 않던 데이지였다. 원작에서 데이지가 느껴왔던 설움을 알기에 감동은 배가 되었다.


“아주 멋있었습니다, 레이디.”

나와 데이지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에드윈이 나지막이 뱉은 말에, 데이지가 얼굴을 붉혔다.


“그런 말은 저와 어울리지 않아요.”

“아뇨, 저도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빈말이 아니었다. 오늘 카밀라에게 또박또박 제 할 말을 전하던 데이지는 내가 원작에서 보던 것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어쩌면 데이지에게도 아주 큰 변화의 바람이 시작…….


“그럼……. 제게도 검을 가르쳐주시겠어요?”

네?

결론이 왜 그렇게 흘러가죠?

*



“황자님, 파티에 가신다더니 왜 이렇게 빨리 오신 겁니까?”

“에녹과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예? 그럴 거면 애초에 안 가시는 편이…….”

다소 굳은 듯한 이안의 표정을 살핀 네이슨이 입을 꾹 다물었다.


“가브리엘 단장님과는 많이 친해지셨습니까?”

눈치껏 화두를 돌리려던 네이슨이 화들짝 놀라며 제 입을 막았다.


‘아차, 노골적으로 물어보면 언짢아하시려나?’

“가브리엘 단장님이라니?”

“예? 황자님께서 친분을 쌓으려고 간다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그 상대가 가브리엘 단장님 아니었습니까?”

한쪽 눈썹을 작게 일그러트린 이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내가 왜 단장님과 친분을 쌓아야 하지?”

“예?”

‘그냥 요새 무언가가 얹힌 것처럼 가슴이 좀 답답해.’

‘어떤 사람 옆에 다른 사람이 붙어 있으면 짜증이 나. 속이 뒤집히는 것도 같고.’

그간 이안이 제게 했던 말을 떠올리던 네이슨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상대가 가브리엘 단장님이 아니었다고? 가브리엘 단장님을 동경해서 가까워지려던 게 아니었어? 그럼 황자님이 말한 상대는 대체 누구지?’

황자님과 대련을 했으며 심지어 황자님께 상처를 입힌 실력자였다. 거기에 백색기사단 기사라면…….

사고회로는 거기서 뚝 멈추었다.


‘설마, 우리 황자님이! 여자에게는 도통 관심이 없으시더니 결국…….’

네이슨은 다짜고짜 이안의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곤 연회복 단추를 풀던 이안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황자님, 절대 안 됩니다!”

“갑자기 뭐가 안 된다는 거야?”

“당장 그 마음을 접으십시오. 폐하께서 이 사실을 아시는 날에는…….”

1황자의 집무실이 벌컥 열린 건 그때였다.


“내가 알면 안 되는 일이라니, 그게 무어냐.”

모습을 드러낸 건, 폰네스 제국의 황제 칼리스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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