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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제가 더 있길 바라십니까? (23/54)


23화. 제가 더 있길 바라십니까?
2023.04.20.



“괜…….”

무심코 괜찮냐고 물으려던 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놀란 듯 커진 동공이 바로 내 눈앞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눈꺼풀을 느릿하게 움직이던 이안은 이내 거칠게 숨을 들이켰다.


“죄송합니다.”

코끝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 있던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멀어져갔다. 내 위에서 먼저 몸을 일으킨 이안은 곧장 나를 일으켜주었다.


“사과는 내가 해야지. 내가 갑자기 중심을 잃어서…….”

문득 입술 위를 스쳤던 그의 숨결이 떠오르자 민망함이 스멀스멀 밀려들었다.

하마터면 내가 이안의 입술을 뺏을 뻔했잖아?


“아닙니다. 제가…….”

이안은 다소 힘겨워 보이는 얼굴로 제 머리칼을 헝클이다가, 돌연 내게로 시선을 두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내리는 눈동자에는 초조한 기색이 가득했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구두 때문에 왼쪽 발목이 조금 삐끗한 것 빼고는 멀쩡했다. 이안이 재빠르게 내 머리와 등을 보호해준 덕분이었다.

어라?

왼쪽 발바닥이 유독 시원하다 했더니 맨발이었다.


“나는 괜찮아. 너는 다친 곳 없어?”

나는 애써 태연한 척 물으며, 눈으로는 분주히 구두를 찾았다. 벗겨진 구두 한쪽은 발코니의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이안의 외투를 줍곤 슬그머니 걸음을 옮기려는데 어느새 이안이 내 앞에 있었다.


“이걸 찾으셨던 겁니까?”

돌아선 이안의 손에 들린 건 내 구두였다. 내 앞으로 다가온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내가 신을게.”

“불편하십니까?”

“그건 아닌데…….”

조금 민망하다고 해야 하나.


“그럼 제가 신겨드려도 되겠습니까.”

얘 오늘 뭐 잘못 먹었나?

원작 초반을 떠올려 봐도 여자에게 자상하게 구는 타입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고개를 갸웃거린 내가 드레스 자락을 살짝 걷어 올리자,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이 내 발목에 닿았다가 이내 멀어졌다.


“그리고 저는 괜찮습니다.”

“응?”

아아, 내가 다친 곳 없냐고 물어본 거에 대한 답이었구나.

나는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이안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괜찮다는 대답과는 다르게 표정은 어딘가 모호했다.


“진짜 괜찮은 거 맞아?”

내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묻자, 이안이 어깨와 팔을 돌려 보였다.

설마 이거 내가 레이먼 앞에서 했던 거 따라 하는 건가?


“저는 선배님의 염려처럼 그렇게 약하지 않습니다.”

농담인 줄 알았더니 제법 진지한 얼굴이었다. 잇새로 웃음을 터뜨린 나는 이내 그의 눈을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고마워.”

싱긋 웃어 보이자 이안의 눈매에도 희미한 웃음기가 어렸다.


“그나저나 바깥에 누가 있길래 나가면 안 되는 겁니까?”

“내 어머니.”

“선배님의 어머니라면…….”

“정확히 말하자면 새어머니라고 해야겠지.”

온전히 닫히지 않은 커튼의 미세한 틈 사이로 올리비아와 데이비드가 보였다. 그와 약간의 거리를 둔 채로 이야기를 나누던 올리비아는 이내 먼저 돌아섰다.

아무래도 올리비아가 데이비드라는 패를 벌써 버린 모양이네.

홀로 남겨진 데이비드는 당황한 듯 제자리에서 빙빙 돌며 어쩔 줄 몰라 하더니, 황급히 자리를 떴다.


“이제 나가도 될 거 같지? 아, 맞다. 이거 돌려줄게.”

내게서 외투를 받아든 이안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벌써?”

내가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오늘 이 파티에 무려 데이지가 와 있었다. 만약 에드윈까지 참석했다면 두 사람이 친분을 쌓을 절호의 기회가 될 테니, 이안은 그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하거나 빨리 보내야 했다.

그래야 이안으로 인해 생길 변수를 막을 수 있을 테니까.


“제가 더 있길 바라십니까?”

어느새 가면을 쓴 이안이 내 손끝을 맞잡으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부드러운 곡선처럼 흐물거렸다.


“금방 온 거 같은데 생각보다 빨리 돌아가는 거 같아서 물어본 것뿐이야.”

“사실 오늘 이 자리에서 만나면 안 될 사람이 있거든요.”

“그게 누군데?”

“뭐가 됐든 제게서 무작정 뺏으려 드는…….”

이안의 뒷말은 중얼거림에 가까워 들리지 않았다.


“응?”

내가 되묻자, 이안은 그저 내게 가만히 시선을 둘 뿐이었다.


“가면을 써도 저를 알아볼 테니, 마주치기 전에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어서 가 봐.”

“기사단에서 뵙겠습니다, 선배님.”

이안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듯한 발길을 돌리는 사람처럼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그대로 테라스에서 뛰어내렸다.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불쑥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만나면 안 될 사람이 있다면서 굳이 파티에 왜 온 거지?

어찌 됐건 무말랭이 같은 데이비드를 잘 떼어냈으니, 이안이 이곳에 온 건 나에겐 호재였다.


“오늘 고마웠어, 이안.”

그에게는 닿지 않을 내 자그마한 목소리는 허공을 부유하다 이내 사그라졌다.


 

*



“빨간 머리. 빨간 머리…….”

어느덧 2부가 시작된 터라 모두가 가면을 쓴 채였다. 평소의 로즈벨리아였다면 이미 자리를 뜨고도 남았겠지만, 내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에드윈을 찾기 위해 연회 홀을 구석구석 살펴보았지만, 왜인지 붉은 머리칼을 지닌 남자는 좀처럼 내 눈에 띄지 않았다.

에드윈 얘 안 온 거 아니야?


“데이지 님, 맞으시죠?”

데이지?

아래로 흘러내리려고 하는 가면을 고쳐 쓴 나는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데이지의 앞에 세 명의 여자가 서 있었다.

잠깐? 세 명이라면, 저 무리 설마…….


“누구신지.”

“어머나, 너무 오랜만에 봐서 저를 못 알아보시는 걸까요?”

“아, 혹시…….”

“맞아요, 카밀라 메이놀즈랍니다.”

카밀라 메이놀즈?

원작에서 데이지를 은근히 돌려 까던, 그 재수 없는 애?

데이지는 몸이 약한 터라 연회에 참여하는 일 자체가 드물었지만, 기껏 참석해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 바로 저 카밀라 때문이었다.

메이놀즈 공작가는 2황자를 대놓고 지지하는 세력으로, 후계 구도에 중립을 지키는 일라이저 공작가와는 대립각을 세우는 가문이었다.

데이지와 카밀라는 나이까지 똑같은 터라, 날 때부터 라이벌에 가까웠고 카밀라는 그런 데이지를 눈에 띄게 견제했었다.

원작에서는 이안의 곁에 여자가 있던 적이 없어 서브녀가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거슬리는 존재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소설 속에서 굳이 악녀를 뽑아야 한다면 그건 바로 저 카밀라였다.


“아아, 역시 카밀라 님이셨군요.”

카밀라가 2황자의 약혼녀였던가?

그러고 보니 오늘 이 자리에도 2황자가 온다고 했었던 거 같은데…….

혹시 이안이 마주치고 싶지 않은 존재가 2황자였나?


“데이지 님은 제게 별로 관심이 없으신가 봐요.”

“가면을 쓰고 계셔서 바로 알아채지 못했어요.”

“저는 데이지 님이 가면을 쓰고 계셔도 한눈에 알아봤는데 말이죠. 최근에 몸이 좋지 않으시다더니, 역시나 그 말이 사실이었나 보네요.”

와, 지금 자기 바로 못 알아봤다고 저렇게까지 말하는 거야?


“아뇨, 지금은 괜찮습니다.”

데이지가 단호히 말하자 카밀라는 살짝 당황한 눈치였다. 데이지는 그런 카밀라를 똑바로 마주하곤 재차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에는 제가 카밀라 님께 적은 관심을 두고 있는 게 아니라, 카밀라 님이 제게 과한 관심을 두고 계신 거 같아요.”

지금 데이지가 한 말 맞아? 원작에서는 데이지가 카밀라에게 저런 식으로 말한 적 없었는데.


“뭐라고요?”

생각지도 못한 데이지의 반격에 카밀라가 쥐고 있던 잔이 흔들렸다. 그 안에 담겨 있던 포도주가 넘실거리는 걸 발견한 나는 은밀히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제가 경험해보니 많은 사람 속에서 누군가를 찾아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그런데 매번 저를 이렇게 먼저 발견해주시니 그게 과한 관심이 아니라면…….”

부들부들 떨고 있던 카밀라는 애써 입꼬리를 올려 보이더니, 제 뒤에 선 여자에게 은근한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카밀라의 의중을 눈치챈 여자가 슬쩍 카밀라의 등을 떠밀었다.


“어머나!”

데이지의 뒤로 다가간 나는 데이지를 슬쩍 내 쪽으로 잡아끌었다.

그 순간, 데이지 앞으로 넘어지는 척하며 포도주를 쏟아부을 생각이었던 카밀라가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로즈벨리아 님?”

데이지의 물음에 대답할 새도 없이 다급히 팔을 들어 올렸다.

분명 허공에 흩뿌려지는 포도주를 보았는데 왜인지 차가운 감각은 전해지지 않았다.

뭐지?

미간을 움찔거린 내가 팔을 내리려는 찰나, 익숙한 음성이 내려앉았다.


“두 레이디 모두 괜찮으십니까?”

이윽고 내 시야에 가득 들어찬 건 붉은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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