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뜨거운 숨결
(22/54)
22화. 뜨거운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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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뜨거운 숨결
2023.04.17.
설마 이안?
이안이 이곳에 왜?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케이든의 생일파티에 올 이유가 없는데…….
내가 남자의 정체를 가늠하는 사이 그가 살짝 굽혔던 허리를 바로 세웠다. 익숙한 눈높이라고 생각하는 찰나, 이번엔 유난히 큰 키와 단단한 체격이 눈에 들어왔다.
이 키에 이런 피지컬까지 갖춘 사람이 흔할 리도 없고.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검게 보이는 머리 색을 살핀 나는 시선을 조금 더 내렸다.
가면이 채 가리지 못한, 바다를 품은 눈동자를 마주한 나는 입매를 한껏 올렸다.
“이제야 오셨군요.”
눈앞의 남자는 이안이었다.
“레이디, 저를 기다려주셨던 겁니까?”
이런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
내가 짧게 웃음을 터뜨리는 사이, 어느덧 몸을 일으킨 데이비드가 씩씩거리며 다가왔다.
“당신 대체 누굽니까? 나는…….”
“내가 너에게 그걸 대답해야 하나?”
감정이라곤 담겨 있지 않은 싸늘한 음성에 데이비드가 움찔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이안은 그저 데이비드에게 시선을 두었을 뿐인데, 그의 위엄에 눌리기라도 한 건지 데이비드가 돌연 헛기침을 해댔다.
“어디 대단한 가문의 영식이라도 됩니까? 그래도 남의 파트너를 뺏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봅니다만.”
“데이비드 콜린 경? 제가 누구의 파트너라는 거죠?”
“로즈벨리아 윈터스 양은 제 파트너잖습니까.”
절로 주먹이 쥐어지려 하자, 이안이 내 손끝을 꼭 붙들었다. 마치 지금은 놓을 수 없다는 듯.
“그 얘기는 피차에 잘 정리된 걸로 아는데요.”
“그러니까……. 지금 나를 두고 저 남자와 가겠다는 겁니까?”
“누가 봐도 데이비드 콜린 경보다 훨씬 멋있는 분이라 제가 달리 거절할 명분이 없네요. 경은 조금 더 자신을 가꾸는 게 좋겠어요.”
데이비드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연신 헛웃음을 터뜨렸다.
“가실까요, 레이디.”
이안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데이비드를 그대로 지나쳤다. 데이비드와 실랑이가 벌어진 장소가 그나마 인적이 드문 곳이라 다행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이안을 이끌고 발코니로 들어온 나는 곧바로 커튼을 쳤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레이디.”
“누굴 속이려고. 너 클라인 맞잖아.”
비식 웃던 그가 이내 가면을 벗었다. 역시나 이안이었다.
“언제부터 눈치채셨던 겁니까.”
“목소리를 들었을 때는 설마 했는데, 눈을 보자마자 알았어.”
“제 눈을 보고 아셨군요.”
“그렇게 예쁜 눈동자를 가진 사람은 흔치 않으니까.”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안의 얼굴에 번져 있던 웃음기가 가셨다.
혹시 말실수를 한 건가? 예쁘다는 말을 싫어하나?
내가 입술을 달싹거리는 사이, 이안이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제 눈동자가 마음에 드십니까?”
그걸 말이라고.
이안의 눈동자를 볼 때마다 성벽 너머의 바다를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나에게 해방감을 가져다주었던 그 풍경을 떠올리자 절로 웃음이 배어났다.
“하루 내내 보고 있을 수도 있어.”
그 말에 바다가 작게 너울거렸다.
나는 잔뜩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는 이안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단원복을 입은 모습만 보다가 예복을 차려입은 모습을 마주하니 새삼 기분이 이상했다.
드레스와 예복을 입은 차림으로 이안을 만날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근데 이런 모습은 조금 어색하긴 하네.”
“누가 그러더군요. 계속 쳐다보면 눈이 멀 거 같다고.”
“어?”
이안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덤덤한 듯 어딘가 집요한 눈빛에 뺨 언저리가 절로 흠칫거렸다.
“정말로 눈이 아플 지경입니다.”
“아, 내가 오늘 차고 나온 목걸이가 심하게 반짝거리긴…….”
“아뇨, 그 목걸이 때문이 아닙니다.”
이안이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목걸이를 말하는 게 아니라 내 외모를 칭찬한 거구나.
“원래 여자는 꾸미기 나름…….”
“꾸미지 않아도 선배님은 늘 예쁘십니다.”
얘가 왜 이러지?
“그리고 오늘은…….”
잠잠하던 눈동자가 크게 일렁거렸다. 마치 거센 파도가 넘실대는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유독 더 아름답습니다.”
원래 이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 애였나?
나랑 친해지고 싶다더니 칭찬 화법으로 전략을 짠 모양이었다.
“고마워. 너도 오늘 멋있네.”
“그렇습니까.”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듯하더니, 별안간 이안의 귀가 급속도로 빨개졌다.
아까도 느꼈지만 정작 본인은 칭찬에 좀 약한 타입인가?
“그나저나 아까 그 남자는 누굽니까?”
“아, 그 남자? 뭐라고 해야 하나. 자기가 내 파트너라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사람? 아니다. 어머니가 내 혼처로 점찍은 상대라고 해야 하나?”
“혼처라뇨?”
“아마 저 사람 뒤로도 여럿 있을 거야. 저 사람이 싫다고 하면 그다음 사람을 곧바로 내 앞에 들이미실걸?”
데이비드 콜린은 서막에 불과했다. 앞으로도 올리비아는 이런 이벤트가 발생할 때마다 내 앞에 신랑감 후보들을 들이밀 터였다.
데이비드 콜린처럼 어딘가 하자가 있는 남자들만 쏙쏙 골라오겠지.
“선배님은 원치 않으시는 겁니까?”
“나는 지금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 근데 제국은 유독 결혼에 대한 집착이 심하잖아. 특히 여자가 늦은 나이까지 결혼하지 않으면 말도 많고…….”
“그래서요?”
다소 성마르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마를 꾹꾹 누르던 손이 움츠러들었다.
“어?”
“결혼하실 겁니까?”
이안은 어느새 미간까지 일그러뜨린 채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꼭 화가 난 사람처럼…….
혹시 이안도 결혼에 대한 압박을 받고 있어서 감정이입을 한 건가?
“아니, 버틸 만큼 버텨봐야지. 아예 안 하면 안 했지. 떠밀리듯이 하는 결혼은 원치 않거든.”
“그래도 계속 압박이 들어오면요?”
“그럼 그냥 확 도망쳐버리지, 뭐.”
“예?”
얼빠진 듯한 이안의 얼굴을 마주한 내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야. 갈 곳이 있으면 몰라도…….”
잠깐?
로즈벨리아가 타국으로 망명한 이유가 어쩌면 복합적일 수도 있지 않을까? 집안의 압박도 그 원인 중 하나였을 수 있고.
자신을 죽여달라고 기사단으로 찾아왔던 이안의 방문도 달갑지 않았을 테고.
‘저를 죽여주실 수 있으십니까?’
문득 이안이 로즈벨리아에게 했던 그 말이 떠오르자, 심장이 덜컹거렸다.
만약 이안이 내게 그런 말을 한다면…….
“선배님?”
“어어.”
“괜찮으십니까.”
“괜찮…….”
어깨 위로 포근한 감각이 전해지자 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힐긋 시선을 내리니 조금 전까지 이안이 입고 있던 겉옷이 보였다.
“몸 상태는 어떠십니까.”
“어?”
“쓰러……지셨잖습니까.”
그날의 내 모습을 떠올리기라도 하는지 이안의 미간이 재차 좁혀졌다.
“나 괜찮다니까.”
“제가 저명하다는 의원을 찾아두었습니다. 그러니 다시 진맥해 보는 게 좋겠습니다.”
“나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아프지도 않고.”
“제가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내 몸에 문제가 있으면 나와 대련을 못 할까 봐 그러는 건가?
하기야 이안에게 나와의 대련이 어떤 의미인지, 그에게 어떤 동기부여를 가져다주었는지 아니까.
“이제 슬슬 나갈까?”
“서늘한 바람이 부니 들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이안이 곧장 커튼 앞으로 다가섰다. 그가 살짝 젖힌 커튼 사이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잠깐, 올리비아잖아?
“클라인, 아직 나가면 안 될…….”
나는 발코니 문을 당기려는 이안의 옷자락을 덥석 붙잡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잠깐, 이 상황 되게 익숙한데?
“어어!”
근데 왜 내 몸이 뒤로 넘어가고 있지?
하필 드레스 자락을 밟아, 구두가 미끄러지면서 발목에 제대로 힘이 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탓에 몸의 균형이 흐트러진 건 이안이 아닌 나였다.
나는 몸이 바닥과 일체가 되어가는 걸 느끼며 마구잡이로 손을 뻗었다.
귓전을 울리는 우당탕 소리에 한쪽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분명 어떠한 통증이 있어야 하는데…….
내게 전해지는 감각이라곤 내 머리와 등허리를 휘감은 단단한 팔과, 입술 위를 스치는 뜨거운 숨결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