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늦어서 죄송합니다, 레이디
(21/54)
21화. 늦어서 죄송합니다, 레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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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늦어서 죄송합니다, 레이디
2023.04.13.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자마자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다시 살 기회가 생겼는데, 어떻게 그걸…….”
거절할 수가 있지?
그러고 보니 죽기 직전이었던 내게 전해졌던 목소리가 분명 ‘너도 이대로 사라지는 걸 원하니?’라고 했었다.
그날의 일을 곱씹을 때마다 매번 ‘너도’라는 호칭이 의아했었는데, 만약 내가 꿈에서 보고 들은 대로라면.
‘너에게 제안을 하나 할까 하는데, 네가 원했던 인생을 한번 살아 볼래?’
누군가 시간을 돌렸고, 로즈벨리아가 회귀를 거부해서 나에게 제안을 한 거라면.
“내가 그 제안을 받아들여서 이곳에 오게 된 거라면 앞뒤가 맞긴 하네.”
그럼 로즈벨리아와 나에게 그 제안을 한 건 대체 누구지?
그 사람이 내게 꿈을 통해 무언가를 보여주는 건가? 아니, 사람이긴 한 건가?
꿈속에서 마주한 장면들에 내내 의문을 가졌었다. 한데 그 모든 게 이미 로즈벨리아가 겪은 과거고, 누군가가 나에게 로즈벨리아의 과거, 즉 회귀 이전의 삶을 보여주려는 거라면…….
“그걸 내게 보여주는 이유가 뭐지? 내가 로즈벨리아와 다른 행동을 하길 바라는 건가?”
나는 후, 하고 밭은 숨을 길게 토해냈다. 그러자 가슴께를 묵직하게 내리누르는 답답함이 조금은 가셨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내가 회귀를 거부한 로즈벨리아의 몸에 들어왔다는 사실에 기묘한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거기에 불쑥 더해진 감정은 로즈벨리아를 향한 경외감이었다. 두 가지의 모순된 감정이 나를 휘감자, 재차 소름이 끼쳤다.
“저기, 이렇게 말하면 들으실 수 있는 건가요? 대체 누구세요?”
허공에 불쑥 말을 건넨 나는 내게로 목소리가 전해 들길 기다렸지만, 돌아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로즈벨리아도 분명 허공에 대고 말을 했던 거 같은데 이게 아닌가?
나는 슬그머니 밀려오는 민망함에 머리끝까지 이불을 끌어 올렸다.
*
“아가씨, 정말 아름다우세요.”
“오늘 파티에 온 사람들 모두가 아가씨께 반할 거예요.”
차례로 앤과 내 치장을 도우러 온 하녀가 한 말이었다. 민망하니 그쯤 하라는 말이 혀끝까지 차올랐지만,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그 어떤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연한 살굿빛 드레스는 로즈벨리아의 하얀 피부와 잘 어우러졌고, 어깨 라인을 훤히 드러내는 드레스 형태도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웬일로 이런 드레스를 고르신 거예요?”
로즈벨리아는 한동안 목까지 올라오는 단정한 드레스를 고집했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드레스를 입었던 건 아니고, 그녀가 노출이 없는 드레스를 고르게 된 배경은 간단했다.
제게 쏟아지는 시선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었으니까.
“그냥……. 이런 드레스도 오랜만에 입어보고 싶어졌어.”
이전 삶에서도 꾸미는 것에 한해서는 늘 진심이었던 나였다. 누가 봐도 이 몸에 더 잘 어울릴 드레스가 있는데 굳이 덜 예쁜 드레스를 골라 입고 싶진 않았다.
“잘 생각하셨어요. 아가씨는 이렇게 흰 피부가 드러나는 편이 훨씬 더 예쁘시거든요.”
앤의 말에 고개를 크게 끄덕이려다가 애써 턱에 힘을 주었다.
“그래?”
“목걸이는 이게 좋을 거 같은데, 어떠세요?”
앤이 목 언저리에 조심스럽게 갖다 댄 목걸이가 화룡점정이었다. 정중앙에 크게 박힌 보석이 유난히 빛나는 목걸이를 유심히 내려다보던 나는 로즈벨리아의 기억을 더듬었다.
이거 로즈벨리아가 생일에 선물 받았던 목걸이 같은데…….
릴리아나에게서 받은 선물이었던가?
“좋네. 목걸이는 이걸로 할게.”
앤이 목걸이를 채워주는 동안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이 정도면 완벽한 거 같은데.
좌우로 몸을 살짝 비틀어 보일 때마다 반짝거림이 물결처럼 일렁였다. 찰나 내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정말……. 눈을 못 떼겠어요, 아가씨.”
앤이 몽롱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들 고마워. 이제 슬슬 가봐야겠어.”
방에서 나와 곧장 연회 홀로 향했다. 홀에 가까워질수록 커지는 듯했던 소음은 내가 홀에 들어서자 일순간 멎어 들었다.
“어머.”
“저 레이디는…….”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던 이들의 시선이 온통 내게로 쏠리는 게 느껴졌다.
“저기 윈터스 영애 좀 봐요.”
“전 후작 부인의 외모를 빼닮았다더니 과언이 아니었군요.”
“이전에도 연회에서 본 적 있는데 오늘은 유독 아름답네요.”
로즈벨리아는 파티에 참여했다가도 금방 빠져나오기 일쑤였는데, 이제야 그녀의 행동이 이해가 갔다.
한 번 모여든 시선들은 마치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파헤칠 것처럼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어머나, 로즈벨리아 님?”
반가운 기색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분홍빛 드레스를 입은 데이지가 보였다.
“데이지 님?”
데이지가 왜 여기에…….
“너무 아름다우세요. 저는 로즈벨리아 님을 보고 잠시 눈이 멀어버리는 줄 알았답니다.”
“저희 윈터스 가문의 파티에 와주신 건가요?”
“네. 초대장을 받아서 온 건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만, 원작에서는 분명…….
나는 무심코 원작을 떠올리려다 이내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그럴 리가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드윈은 대체 어디에 있지?
이럴 줄 알았으면 에드윈에게 파티에 꼭 와달라고 하는 건데.
“로즈벨리아 님? 누구를 찾고 계신 건가요?”
내가 홀 안을 두리번거리자 데이지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아, 그……. 케이든이요.”
“아아, 오늘 파티의 주인공이신 케이든 님이요? 아까 중앙 계단 근처에 계신 것 같았어요.”
“그렇군요. 그럼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데이지를 뒤로하고 메인 홀 이곳저곳으로 분주히 시선을 옮겼다.
왜 데이지가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 했지? 에드윈이 여기서 데이지와 친분을 쌓으면 좋을 텐데…….
평소에는 눈에 확 띄던 붉은색 머리칼이 좀처럼 들어오지 않았다.
설마 안 온 건가?
“안녕하십니까, 레이디.”
두리번거리는 내 앞에 누군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예, 안녕하세요.”
건성으로 대꾸한 내가 손끝을 내밀자, 남자가 손등에 입술을 깊숙이 비벼댔다.
아니, 누가 이런 지저분한 인사를…….
축축한 느낌에 눈썹을 움찔거리던 내 시야에 들어온 건, 제법 반반한 얼굴을 지닌 갈색 머리의 남자였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콜린 자작가의 장남, 데이비드 콜린입니다.”
“아아, 네. 로즈벨리아 윈터스입니다. 그럼 이만…….”
데이비드의 손을 가볍게 뿌리친 내가 돌아서려는 찰나, 끈적한 손바닥이 내 팔목을 휘감아왔다.
“윈터스 영애?”
“지금 뭐 하시는…….”
“저를 모르십니까?”
남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조금 전에 데이비드 콜린이라고 본인을 소개하셨잖아요.”
“네, 그랬죠.”
“그게 제가 아는 전부입니다만.”
말을 끝마친 내가 팔목을 가볍게 털어내자 데이비드의 손이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데이비드는 애써 당황한 기색을 숨기려는 듯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려 보였다.
“하하, 이것 참. 후작 부인께 이야기를 전해 듣지 못하셨나 봅니다.”
후작 부인이라면, 올리비아?
기어이 올리비아가 무슨 일을 꾸민 건가?
“어머니와 무슨 얘기를 나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어머니께 전해 들은 바가 없는데요.”
“오늘 이 자리에 꼭 참석해서 로즈벨리아 양의 댄스 파트너가 되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댄스 파트너 좋아하시네.
로즈벨리아는 여태 단 한 번도 파티에서 누군가와 춤을 춘 적이 없었다.
그런 로즈벨리아가 누군가와 춤을 춘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사교계의 이슈가 될 터였다. 춤을 춘 상대가 누구든 간에 스캔들로 번질 게 자명했다.
“저는 댄스 파트너가 필요 없답니다. 춤을 안 출 거라서요.”
“예?”
올리비아가 아무래도 이 남자를 내게 엮어주고 싶은가 본데.
나는 데이비드 콜린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어보았다. 올리비아의 마음에 든 남자라면 좋은 혼처는 아닐 게 뻔했다.
자작가의 장남이라면 그리 나쁜 선택지는 아닌데, 적어도 어딘가 하자가 있는 혼처니 내게 엮어주려는 거겠지.
“댄스 파트너로는 다른 영애를 알아보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하지만 저는…….”
남자의 소매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나는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령, 조금 전까지 당신과 입을 맞췄던 사람이라면 어떨까 싶은데요.”
데이비드가 화들짝 놀라며 입술을 벅벅 닦았다. 소매에 루즈 같은 게 묻어 있는 듯해서 슬쩍 떠본 건데, 저 반응을 보아하니 내 예상이 맞는 듯했다.
“이, 입을 맞추다뇨. 제가 누구와…….”
“그건 데이비드 콜린 경 본인이 더 잘 아시겠죠? 파트너가 이미 정해지신 듯하니, 저는 물러가겠습니다.”
그대로 돌아서려는데 데이비드가 분한 듯 실소를 터뜨렸다.
“허, 참. 백색기사단의 기사라는 얘기를 듣긴 했는데, 역시나 조신한 귀족 여성분들과는 다르군요.”
무말랭이 같은 게 지금 뭐라는 거야.
“뭐라고요?”
“사실 저는 아리따운 레이디가 기사라는 직업을 가졌다는 게 썩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워낙 아름다운 미모를 지니셔서 흔쾌히 파트너를 승낙한 건데, 솔직히 당황스럽군요.”
내가 로즈벨리아의 기억을 통해서 본 폰네스 제국은 여권이 다소 낮은 편이었다.
고작 수십 년 전까지도 기사라는 직업은 남성들만 가질 수 있는 전유물이었기에, 여기사에 대한 인식이나 대우는 개선해야 할 점이 많았다.
연회에서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다가와서는 검을 제대로 들 수는 있는 거냐고 묻는 이들이 많았으니까.
“어떤 점이 당황스러우신데요?”
“레이디라면 사근사근해야 하는데, 진짜 기사처럼…….”
뒷말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데이비드가 흘려 말한 건지, 내 귀가 더는 들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서 흘린 건지는 명확히 알 수 없었다.
진짜 기사처럼? 그럼 로즈벨리아가 가짜 기사라도 된다는 거야?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고 예상은 했지만 직접 당해보니 여간 불쾌한 게 아니었다.
로즈벨리아가 기사라는 제 직업에 얼마나 자부심을 느꼈는데! 게다가 무려 소드마스터인데!
이 자리에서 오러를 확 보여주고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은 생각이 물씬 안겨들었지만 나는 애써 마음을 다독였다.
그래, 모처럼 차려입은 드레스에 피를 묻힐 필요는 없지.
“정말 다행이네요.”
“예?”
“제가 기사인 게 내키지 않으시다면서요. 사실 저도 데이비드 콜린 경이 썩 내키지 않거든요. 피차 서로가 내키지 않으니 이보다 더 깨끗한 결말이 없는 거 같네요.”
내 말을 가만히 듣던 데이비드가 멍청한 신음을 흘렸다. 떡 벌어진 입술을 보니 내 말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했다.
“내, 내가 내키지 않는다고요? 이 데이비드 콜린이?”
“이왕 오셨으니 즐기다 가시길 바랄게요.”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아 빠르게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땀으로 범벅된 손바닥이 재차 내 손목을 붙잡아왔다.
“아니, 레이디. 그래도 이렇게 가시면 제가 곤란합니다.”
“좋은 말로 할 때 놔주시죠? 아니면 아까처럼…….”
데이비드의 손은 내가 어찌할 새도 없이 떨어져 나갔다. 나는 바닥에 나뒹구는 데이비드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나와 데이비드 사이에 끼어든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이 사람이 데이비드를 떼어내 준 거 같은데,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인가?
차림새를 보아하니 남자인 건 확실한데 가면을 쓰고 있어 도통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아직 1부가 채 끝나지 않아서 벌써 가면을 쓸 필요는 없는데…….
누구냐고 물으려는 찰나 부드러운 감각이 내 손을 잡아끌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레이디.”
잠깐, 이 목소리?
놀란 내가 얼어붙은 사이, 따뜻하고도 말랑한 감촉이 내 손등 위로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