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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마주한 진실 (20/54)


20화. 마주한 진실
2023.04.10.



‘그저 잠든 것뿐이니, 곧 깨어날 겁니다.’

의원의 말을 믿을 수 없어 황궁에 있는 의원까지 불러들였지만, 답은 같았다.


‘피를 토하고 쓰러졌는데 그저 잠이 든 거라고?’

이안은 그 말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아픈 거라면 어딘가를 찡그리기라도 했을 텐데 눈꺼풀을 굳게 닫은 채로 잠든 로즈벨리아의 얼굴은 고요하기만 했으니까.

편안하기 그지없는 얼굴 위로 찰나 피를 흘리던 로즈벨리아의 얼굴이 겹쳐지자, 가슴이 왈칵 조여들었다.

이안은 로즈벨리아가 제 품 안에서 정신을 놓자마자 그녀의 호흡과 맥박부터 살폈었다.

그녀가 숨을 제대로 쉬고 있다는 걸 확인하기 전까진 그의 숨도 일순간 멎어 있었다.

어찌나 놀랐던지 그 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재차 바닥으로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내가 누군가의 일에 이렇게까지 동요한 적 있었던가?’

잇새로 옅은 한숨을 흘린 이안은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베개 위에 어지러이 흐트러진 머리칼을 지나친 시선은 이내 동그란 이마에 머물렀다.

물 흐르듯 흘러내린 시선이 오뚝하게 솟은 콧대를 지나 선홍빛 입술에 다다랐을 때, 그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키었다.

찰나 이안의 목울대가 거세게 요동쳤다. 한 번 그녀에게 붙들린 시선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맥없이 주먹을 쥐었다가 펴길 반복하던 그때, 문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모습을 드러낸 건 친위대장인 카를이었다. 친위대는 오로지 황제와 황태자만이 동원할 수 있는 친위부대였다.

이안은 황자 신분이었지만, 친위대는 황제인 칼리스토가 내린 밀명에 따라 이안을 위해 언제든 움직일 수 있었다.


“친위대는 어떻게 할까요?”

“그만 해산하도록.”

“알겠습니다.”

카를이 방 안에서 나서는 기색이 없자, 이안이 미간을 매만지며 몸을 돌렸다.


“할 말이 더 남았나?”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조금이라도 쉬시는 게…….”

다물린 입술 새로 싱거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혼자서 마수를 상대하고 온 사람을 앞에 두고 제 안색 타령이라니.


“카를.”

“예, 황자님.”

“오늘 마을에 나타났다던 마수에 대해 좀 알아봐 줘야겠어.”

“분부 따르겠습니다.”

 

*



‘저를 죽여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 목소리에 눈을 떴다. 분명 눈을 뜬 것 같았는데, 달라진 건 없었다.

내 눈앞에 있는 건 어두컴컴한 성벽 아래에 서 있는 로즈벨리아와 이안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클라인? 이 사람은 또 누구고.’

‘이분은 황태자 전하십니다.’

이안의 뒤로 마치 그림자처럼 서 있던 남자가 다가와 말했다. 로즈벨리아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황태자 전하라고요?’

‘선배님께 모든 걸 털어놓을 수는 없지만, 황가에 은밀히 내려오는 저주가 있습니다. 그 저주가 제게 발현됐고, 저는 이 저주를 안고 살아갈 자신이 없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저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선배님뿐입니다.’

이안의 목소리는 단단하고 분명했다. 흔들림 없는 그의 눈빛처럼.


‘어찌 제게 이러시는 겁니까, 황태자 전하.’

‘기사단 후배로서의 부탁이 아니라 황태자의 명령이라면 따를 건가?’

이안의 목소리가 단숨에 바뀌었다. 고저라곤 느껴지지 않는 음성에 로즈벨리아가 제 얼굴을 성마르게 매만졌다.


‘왜 하필 제게 이러시는 겁니까?’

‘그건 네가 이 제국에서 나를 제외한, 유일한 소드마스터이기 때문이야. 나는 내 의지로는 죽을 수 없어. 그러니까 네가 나를…….’

‘한때나마 동료였던 이를 제 손으로 죽이는 일은 없을 겁니다.’

‘다시 찾아올 테니 그때까진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해. 다음엔 부탁이 아니라 명령일 테니까.’

화들짝 놀라며 깨어난 내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시야에 들어온 건, 어두컴컴한 곳이 아닌 빛이 들어오는 낯선 방이었다.


“이제 정신이 드십니까?”

몸을 일으키려는 나를 부축하는 건, 이안이었다.


“……클라인?”

“네, 접니다.”

내가 쓰러지기 직전에 본 게 정말 이안이 맞았구나.


“여긴 어디야?”

“마을 근처 여관입니다.”

“마수는 어떻게 됐어?”

“죽었습니다.”

내가 가슴을 쓸어내리자, 이안이 돌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선배님이 혼자서 처치하신 겁니까?”

“어?”

“뒤늦게 모여든 수호기사단 기사들이나 바네사 선배님, 루카스 선배님 중 그 어떤 누구도 마수를 처치했다고 나서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마수를 처치한 사람은 선배님…….”

“그래, 내가 죽였어. 지난번 토벌에서 나 혼자 잠시 무리에 떨어져 있을 때 마주쳤던 거라 다른 사람은 보지 못했을 거야. 그때 싸운 경험이 있어서 내가 바로 처치할 수 있었던 거고.”

지난 토벌에서 로즈벨리아는 잠결에 이상한 소리를 듣고 나갔다가 레드 슬라임과 마주쳤다.

일반 검으로는 베어낼 수 없어 오러를 사용해 죽였고, 그 모습을 가브리엘 단장에게 들켰었다.

로즈벨리아는 자신이 소드마스터라는 게 알려지는 걸 원치 않았고, 가브리엘은 그녀의 의견을 존중해 로즈벨리아가 소드마스터라는 사실을 여태 비밀에 부쳐준 것이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바로 지원 요청을 하셨어야죠.”

“그건……. 내 불찰이야. 내가 마음이 너무 급했어.”

“피를 토하고 쓰러지셔서 정말 큰 일이라도 난 줄 알았습니다.”

하필 그 모습을 이안에게 들킬 줄이야.


“미안해. 많이 놀랐겠네.”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리려는데 이안이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어째서 피를 토하신 겁니까? 마수에게 공격을 당하신 겁니까?”

“아, 그게…….”

마수에게 공격을 당한 건 아니고, 실은 내가 오러를 운용할 줄 아는 소드마스터라고.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오러를 사용할 때마다 피를 토한다고 솔직히 털어놓기엔 조금 전에 꿈에서 들은 대화가 걸렸다.

내가 본 건 대체 뭐지?


‘그건 네가 이 제국에서 나를 제외한, 유일한 소드마스터이기 때문이야. 나는 내 의지로는 죽을 수 없어. 그러니까 네가 나를…….’

나는 꿈속에서 로즈벨리아와 이안이 나눈 대화를 차분히 되새겨보았다. 그리곤 그 내용을 원작과 결부시켜보았다.

저주, 소드마스터, 이안, 그리고 로즈벨리아.
 


「“아무래도 윈터스 가문이 폐하께 단단히 밉보인 모양입니다.”

“백색기사단 차기 단장감으로 꼽히던 윈터스 가문의 장녀가 레노르 왕국으로 망명을 했잖습니까. 듣자 하니 폐하께서 직접 백색기사단 단장직을 부탁하러 몇 차례 찾아갔다던데, 거절하고 왕국으로 건너가 기사단장이 됐다고 하니…….”」

 
문득 원작의 그 구간이 떠올랐다.

만약 이안이 황태자의 자리에 올라선 뒤부터 로즈벨리아를 찾아왔고, 황제의 자리에 등극한 이후에도 줄곧 로즈벨리아를 찾아왔다면 적어도 몇 번은 다른 이들의 눈에 띄었을 터였다.

그 장면을 목격한 누군가 단장직을 부탁하러 간 거라고 오해한 거라면? 사실은 죽여달라고 찾아간 거였다면?

완전히 터무니없는 추측은 아니었다. 원작 속에서 데이지도 분명 황태자 책봉식 이후에 이안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거 같다고 했으니, 그 저주가 황태자 책봉 전후로 발현된 거라면…….

머릿속이 포화상태가 된 탓에 돌연 눈앞이 어지러웠다.


“선배님? 괜찮으십니까?”

이안이 곧바로 내 이마 위로 손을 갖다 댔다. 다소 서늘한 감각이 전해지자,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이 다소 진정되는 게 느껴졌다.


“열은 없는데, 아무래도 의원을 다시 불러야겠습니다.”

“아니야. 조금 쉬면 괜찮을 거 같아. 의원은 뭐래?”

“몸에 이상은 없다고 하더군요.”

역시 그럴 줄 알았어.

피를 토하기에 내심 걱정했는데 다행히 몸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이상 없으면 된 거지.”

“아뇨, 저는 선배님이 피를 토하며 쓰러지신 이유를 알아야겠습니다.”

“그건……. 사실 나도 이유를 잘 모르겠어.”

“예?”

한껏 좁아진 이안의 미간을 마주한 나는 변명거리를 떠올렸다.


“마수와 싸우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상을 입었을까?”

“내상이라면 의원이 미처 진맥해내지 못했을 수도 있군요. 제가 더 저명한 의원을 찾아보겠습니다.”

나는 벌써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이안의 옷자락을 다급히 붙잡았다.


“그럴 거 없어. 내 몸은 내가 더 잘 알아.”

“하지만…….”

“몸에 이상이 있다면 내가 그걸 굳이 왜 숨기겠어. 내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

 

*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후작 저에 돌아온 나는 곧장 서재로 향했다.


“이즈음에서 폰네스 제국 어쩌고저쩌고한 책을 본 거 같은데…….”

책장을 유심히 살피던 나는 <폰네스 제국, 그 황가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책을 꺼내 들었다.

마지막 장까지 꼼꼼히 살펴보았지만 황가에 저주가 내려온다는 얘기는 찾을 수 없었다.

은밀히 내려오는 저주라고 했으니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건가?

굳이 특이점을 꼽자면 황제가 갑작스럽게 자리에 물러나면서 황태자에게 황위를 양위한 경우가 제법 많다는 거였다.

황제에게 어떠한 문제가 있는 게 아니고, 황태자가 무력으로 황위를 탈취한 것도 아니었다.

내가 본 케이스 모두 치국에 문제라곤 없는 황제가 돌연 황태자에게 황위를 선위했다.

이안도 비슷한 케이스였지, 아마?

어느덧 캄캄해진 바깥을 살핀 나는 이내 몸을 일으켰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낮에 꾼 꿈에서 본 내용이 좀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눈이라도 감고 있으면 언젠가는 잠이 오겠지. 그 생각을 하며 눈꺼풀을 지그시 내리눌렀다.


‘나는 다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이건 내 목소리 아니, 로즈벨리아의 목소리였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네. 내가 너에게 다시 살 기회를 주겠다는데 싫다는 거니?’

뒤이어 들려오는 목소리는 아스팔트 위에 쓰러진 내게 전해졌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내 삶을 살았습니다. 더는 미련 없습니다.’

‘나는 이미 시간을 되돌렸고, 그걸 번복할 순 없어.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모든 게 달라질 수 있는데도 내가 준 기회를 거부하겠다는 거야?’


‘달라질 건 없습니다. 나는 내 신념에 따라 살았고, 삶이 다시 주어진 대도 또 같은 선택을 할 거니까요. 그러니 내게는 기회가 아니라 지난 삶의 반복일 뿐입니다.’

나도 모르는 새에 잠이 들었던 건지, 퍼뜩 깨어났다.

또 꿈을 꾼 것 같긴 한데, 다시 살 기회를 주었다는 게 무슨 뜻이지?

게다가 시간을 되돌렸다는 건…….


“회귀?”

잇새로 불쑥 튀어나온 그 단어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러니까…….


“로즈벨리아가 회귀를 거부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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