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위기
(19/54)
19화. 위기
(19/54)
19화. 위기
2023.04.06.
“수도 외곽에 있는 마을이요?”
“그래.”
그럴 리가 없는데?
마수 토벌을 떠나는 곳은 ‘버려진 산’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아주 높고 험한 산맥이라 인적이 드문 곳이었는데, 한창 영토 정복 전쟁이 벌어질 때 그 산으로 도망친 벨리르 왕국의 병사들과 폰네스 제국의 병사들이 싸우다가 헤아릴 수도 없는 수의 병사들이 죽었다고 한다.
산은 피바다가 되었고,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붉은 샘’을 만들었다던 전설이 내려오는 곳이 바로 그 ‘버려진 산’이었다.
시체로 오염된 그 산에서는 언제부턴가 이상한 것들이 생겨났고, 제국 내 학자들은 ‘붉은 샘’을 근원지로 추정했다.
자연은 자정작용이 있기 마련인데, 몇백 년이 지났는데도 그 샘만큼은 여전히 붉은 빛이라 그 추정은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사실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마수는 그저 형체가 괴이했을 뿐, 공격성은 지니지 않았다고 전해졌다.
하지만 고작 몇십 년 새에 ‘버려진 산’의 마수들에게 공격성이 생겨났고, 지능이 높지 않아 그 산을 벗어나지 못했던 마수들이 영역을 아래로 넓혀가고 있었다. 그걸 막기 위해 정기적으로 마수 토벌을 떠나는 것이었다.
산을 중심으로 그 주변 마을에 마물이 내려온 적은 있어도, 거리가 꽤 떨어져 있는 수도 외곽의 마을에 출몰한 적은 없었을 텐데?
“단장님은요?”
“조만간 떠날 마수 토벌에 대해 논의할 일이 있으시다고, 부단장님과 함께 황궁에 가셨어.”
“일단 인편으로 단장님께 알리고, 마수는 한 마리랍니까?”
에드윈의 물음에 바네사가 난감한 기색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거까지는 나도 잘…….”
“근데 왜 치안대가 아니라 수호기사단 기사가 지원 요청을 한 거죠?”
“마수를 처음 발견한 건 치안대인데, 마침 그 근처에 수호기사단 기사들이 몇 있었던 모양이야. 저들끼리 어떻게든 해보려다가 안 될 거 같으니 우리에게 지원 요청을 한 거겠지. 수도 외곽이면 우리 쪽에서 가는 게 훨씬 가깝기도 하니까.”
수호기사단은 백색기사단처럼 매번 토벌에 나가는 게 아니니 마수에 익숙지 않을 터였다.
게다가 마수마다 특성도 다르고, 급소를 끊어내지 않으면 끝없이 재생하는 마수도 있었다.
그런 마수가 출몰한 거라면 마을 전체가 위험할 터였다.
“일단 우리라도 가봐야 할 거 같아.”
“알겠습니다, 선배님.”
“너희들은 먼저 마구간에 가 있어. 난 루카스를 찾아볼게.”
나는 바네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구간으로 발길을 돌리려는 에드윈의 목덜미를 덥석 잡아챘다.
“에드윈 너는 빠지는 게 좋겠어.”
“내가 왜? 나도 같이 가야지.”
“다친 다리로 가겠다고?”
연무장을 빠져나가려던 바네사가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에드윈 너 다리 다쳤어?”
“네. 일단 선발대로 선배님과 저, 루카스 이렇게 셋이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에드윈이 재차 갈 수 있다는 의사를 내비쳤지만, 바네사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네가 더 잘 알잖아, 에드윈. 다친 다리로 우리와 함께 가는 건 도움이 아니라 짐이 될 뿐이야.”
바네사의 말에 에드윈이 입을 꾹 다물었다.
“가서 얼른 채비해, 로즈벨리아.”
“네, 선배님.”
분한 기색이 역력한 에드윈을 뒤로한 채 마구간으로 달렸다. 그 길목에는 뜻밖에도 이안이 서 있었다.
“선배님, 수도 외곽 지역의 마을에 가시는 겁니까?”
“그래.”
“저도 따르겠습니다.”
이안이 함께 간다면 전력에 보탬이 되긴 할 텐데…….
나는 불쑥 든 생각을 멈추기 위해 고개를 짧게 내저었다. 에드윈보다 이안의 실력이 우위긴 하지만 검술 실력이 좋다고 해서 마수와 잘 싸울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넌 안 돼. 마수를 상대해 본 적 없잖아.”
“제 실력 아시잖습니까. 분명 선배님께서도 기사단 내에서도 제 실력이 상위권이라고…….”
“그래도 안 돼. 마수는 달라. 수호기사단도 기본적인 실력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이야. 그들이 왜 고전하고 있겠어?”
내 말에 이안의 낯빛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하지만…….”
“섣불리 나섰다가 네가 다칠 수도 있어.”
“상관없습니다.”
“뭐?”
미간에 절로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마수와 싸우다가 본인이 다칠 수도 있다는데, 마치 남의 얘기인 것처럼 태연한 얼굴이었다.
“다치지 않을 자신 있습니다.”
“백색기사단에 들어온 기사라면 누구나 마수 토벌을 꿈꿀 거야.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네 실력이 좋다는 걸 안다고 해서 널 데려갈 순 없어. 정석대로 수업에 열심히 참여해서 단장님 눈에 띄도록 해.”
*
이안이 손끝을 움츠려 주먹을 쥐었다. 마구간을 향해 내달리는 로즈벨리아를 차마 붙잡을 수 없었다.
‘붙잡을 명분이 없다는 표현이 정확하려나.’
마수가 수도 외곽 지역의 마을에 출몰했고, 수호기사단 기사가 백색기사단에 지원 요청을 했다는 소식에 기사단이 내내 소란스러웠다.
그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이안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마구간으로 향하는 길목을 지킨 채로 서 있었다.
로즈벨리아는 그 누구보다 강하니 그녀가 떠나는 건 당연한 건데, 마음이 술렁여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백색기사단에 들어온 기사라면 누구나 마수 토벌을 꿈꿀 거야.’
마수 따위와 싸워보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저 그녀와 함께 가고 싶었다.
이 마음이 정확히 뭔지 알 수 없지만 그녀를 혼자 보내고 싶지 않았다.
로즈벨리아는 심지어 자신보다도 더 강한 사람인데, 왜 이렇게 불안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는 걸까.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허망하게 쳐다보던 이안의 눈동자에 별안간 이채가 감돌았다.
“백색기사단의 기사로서 갈 수 없다면…….”
황자 신분인 이안 클라인 마르티네스로 가는 건 누구도 막을 수 없겠지.
이안이 휘, 하고 휘파람을 불자 어디선가 매가 한 마리 내려와 그의 팔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
정신없이 달려 도착한 외곽 지역의 마을은 이미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이건…….”
나는 단번에 알아챘다. 지난 토벌에서 우연히 마주했던, 오러를 사용해야만 없앨 수 있는 그 마수였다.
작년에 떠났던 토벌에서 처음 발견되었던 레드 슬라임.
일반적인 슬라임은 크기도 작은 데다가 공격성이 없는 마수였다.
점액질 덩어리로 뒤덮인 겉모습 때문에 마수라고 구분하고 있긴 하지만, 사실 마수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였다.
하지만 레드 슬라임은 달랐다. 점액질 덩어리로 뒤덮인 건 비슷하지만 몸집이 일반 슬라임과 다르게 바위 같았다.
표면이 뜨거운 탓에 섣불리 만졌다간 화상을 입을 수 있었고 움직임 또한 빨랐다. 레드 슬라임이 위협적인 건, 닥치는 대로 무엇이든 삼켜낸다는 것이었다.
“흩어져서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저는 이쪽으로 가겠습니다.”
내가 먼저 방향을 정하자 바네사와 루카스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규모가 작지 않은 마을이라 레드 슬라임의 흔적을 대번에 찾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게다가 갑자기 출몰한 마수 때문에 거리에는 사람 하나 찾아볼 수 없었고, 집마다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몸집을 더 키우기 전에 빨리 찾아야 하는데.”
이쪽이 아닌가?
말머리를 돌리려는 찰나, 집 안에 숨어 있던 한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겁에 질린 듯 떨고 있던 아이는 내 차림을 살피곤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동쪽?
아이가 가리킨 방향을 따라 계속 달리다 보니 정말로 레드 슬라임이 있었다.
커다란 나무를 집어삼키기 직전의 슬라임과 마주한 나는 곧바로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검을 꺼내든 나는 가볍게 점프해 레드 슬라임을 베어냈다.
분명 있는 힘껏 베어냈는데, 레드 슬라임에게는 미세한 상처 하나도 생기지 않은 채였다.
레드 슬라임의 표면에 닿은 탓에 도리어 내 검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역시 오러가 아니면 안 되겠구나.”
검을 고쳐 든 나는 몸에 잠재된 오러를 운용하고, 이내 검에 오러를 밀어 넣었다.
빛을 발하는 검으로 일격에 슬라임을 베어내자 윗부분이 살짝 베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점액질의 형체가 저들끼리 끈적거리며 달라붙었다.
뭐지? 왜 안 되는 거지?
두 번의 일격에 레드 슬라임이 나를 의식했는지 몸을 꿈틀거렸다.
그 이상한 외관에 눈이랄 건 없었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슬라임이 나를 보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후, 집중하자.”
지금 제국에서 소드 마스터라고 칭할 수 있는 건 나뿐이야. 내가 못 하면 다른 사람들도 못 한다는 거고.
여기서 끝내지 못하면 이 마을이 아닌 온 제국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이 어깨를 묵직하게 짓눌러왔다. 나는 입안 가득 고인 피를 삼키며 검을 고쳐잡았다.
슬라임이 육중한 몸체가 점차 내게로 가까워졌다. 지면을 울리는 그 스산한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눈을 지그시 감은 나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선 채 다시 한번 오러를 끌어올렸다.
이윽고 넘쳐흐를 정도로 오러가 모인 순간, 검으로 모든 힘을 밀어 넣었다.
슬쩍 눈을 뜨자 이전보다 더 많은 빛을 발하는 검이 보였다. 차분히 호흡을 고른 나는 제자리에서 뛰어올라 슬라임을 베어냈다.
“제발.”
내 간절함이 닿은 건지 레드 슬라임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반으로 갈라졌다.
점액질 안에는 그가 여태 삼킨 것들이 모조리 들어 있었다.
울컥 토기가 밀려든 순간, 어디선가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바네사와 루카스가 이리로 오는 건가?
“안 되는데…….”
나는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고, 서둘러 에밀리의 위로 올라탔다.
레드 슬라임이 있던 곳에서 벗어나 외진 곳으로 들어선 나는 이내 커다란 나무 아래에 멈춰 섰다.
목 끝까지 차오른 토기를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지면을 향해 몸을 반쯤 숙이자, 애써 참아냈던 피가 울컥 흘러나왔다.
많은 양의 오러를 사용한 탓에 심한 어지럼증까지 함께 밀려들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뺨을 두드려보았지만 헛수고였다.
눈앞이 점차 흐릿해져 가는 걸 느낀 나는 밭은 숨을 토해냈다.
“선배님?”
일순간 나무를 짚고 있는 손에 힘이 실렸다. 여기선 들려올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온 탓이었다.
바네사나 루카스라면 모를까, 이안이 여기에 있을 리가 없잖아.
뒤를 돌아 확인하고 싶었지만 간신히 나무를 짚고 있을 뿐인 내게 그만한 힘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크게 비틀거리는 찰나, 단단한 팔이 내 허리를 붙잡아왔다.
“선배님.”
“클라인?”
“이게 대체 무슨…….”
어느새 나를 끌어안은 이안의 품속에서 나는 그만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