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지원 요청
(18/54)
18화. 지원 요청
(18/54)
18화. 지원 요청
2023.04.03.
“어? 그거야 다음 신입이 들어올 때까진 신입이지.”
“그럼 그 신입이라는 호칭이 최소 1년은 간다는 거네요.”
“…….”
당연한 걸 왜 묻지?
“그래도 저는 제법 친한 후배에 속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까.”
이안의 말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낀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만?
“그러니까……. 지금 신입이라는 호칭 말고 다른 호칭으로 불러 달라는 말을 이렇게 돌려서 하는 거야?”
이안의 눈동자가 짧게 진동했다.
“다른 신입과 동등한 취급인 거 같아 불쾌했을 뿐입니다.”
목소리를 가다듬는 그의 귓가가 살짝 붉어진 걸 발견한 나는 웃음을 꾹 삼켰다.
그러고 보니 시몬도 이름으로 불렀는데, 이안은 계속 신입이라고만 불렀네.
물론 일부러 그렇게 부른 건 아니었다.
내게는 이안이라는 이름이 훨씬 익숙하니까.
클라인이라고 불러야 할 때 나도 모르게 이안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올까 봐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 그냥 신입이라고 한 건데…….
“하기야 함께 대련하는 사인데 내가 무심하긴 했네. 그럼 뭐라고 불러줄까?”
“달리 뭐라고 불러 달라는 뜻은…….”
“클라인?”
내가 그 이름을 입에 올리자 이안이 당황한 듯 입술을 다물었다.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단 말이야.
“앞으로 이렇게 부르면 되는 거지, 클라인?”
클라인이라는 단어에 미모사처럼 움찔거리는 이안을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럼 내일 보자, 클라인.”
*
“황자님, 아무래도 의원을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의원을 왜?”
“황자님께서 또 가슴께에 손을 올리고 계셨다고요.”
“별거 아니야.”
네이슨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요 며칠간 이 같은 대화가 몇 번이나 오갔는지 헤아릴 수도 없었다.
“의원에게 보이기 싫으시면 저에게라도 증상을 말씀해 보세요.”
이안은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다 이내 입을 열었다.
“그냥 요새 무언가가 얹힌 것처럼 가슴이 좀 답답해.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시도 때도 없이 그러시는 건가요?”
“그렇다기보다는…….”
‘그럼 내일 보자, 클라인.’
클라인이라고 부르며 웃던 로즈벨리아의 얼굴이 떠오르자 또 가슴이 뻐근해졌다.
하지만 더욱더 답답한 기분이 밀려드는 건, 로즈벨리아가 다른 누군가와 붙어 있을 때였다.
시몬이나 에드윈, 심지어 그 넝쿨처럼 엉켜 들던 여자와 붙어 있을 때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떤 사람 옆에 다른 사람이 붙어 있으면 짜증이 나. 속이 뒤집히는 것도 같고.”
이안의 얘기를 진지하게 경청하던 네이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이 모시는 황자님이 말하는 증상들이 어째 짝사랑하는 상대를 향해 느끼는 감정과 비슷한 탓이었다.
‘황자님이 말하는 상대는 분명 가브리엘 단장님일 텐데, 황자님은 방치하고 다른 사람만 챙겨주는 게 눈꼴사나우신 건가?’
곧바로 결론에 도달한 네이슨이 명쾌한 해답을 내렸다.
“아무래도 그분과 정말 많이 친해지고 싶으신가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과 친한 꼴이 보기 싫은 거죠.”
친해지고 싶은 마음 하나로 이렇게나 불쾌한 감정이 밀려들 수 있는 건가?
‘애초에 그녀와 왜 가까워지고 싶은 거지?’
이안은 그 이유조차도 명확히 알 수 없었다.
‘처음엔 다소 무뚝뚝하고 차가운 인상을 지닌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가까이에서 본 로즈벨리아는 사소한 일에도 쉽게 미소를 보였고, 곧잘 당황했고, 때로 환히 웃기도 했다.
게다가 신입이라고 부르며 제게 선을 긋는 것 같다가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먼저 선을 넘어오곤 했는데, 그럴 때면…….
목 언저리가 답답하다는 듯 셔츠 단추를 풀어낸 이안이 밭은 숨을 토해냈다.
그녀의 실제 모습은 표정 변화가 크지 않으며 우직한 성정이라던 단원들의 말과도 달랐고, 전야제 때 자신이 성급하게 판단했던 이미지와도 달랐다.
처음엔 그저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샌가 기사단에만 가면 두 눈이 자연스레 그녀를 찾곤 했다.
다른 단원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건지, 자신이 유독 잘 알아채는 건지 몰라도 그녀의 얼굴 위에 드러난 표정 변화를 살피는 게 재밌었으니까.
앞으로도 대련을 쭉 하려면 그녀의 감정을 잘 알아채는 게 중요하기도 하고.
‘그래, 처음엔 분명 그 정도로 가벼운 마음이었는데…….’
동경, 이라고 했던가.
‘우러러보는 상대니까 친해지고 싶고,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거니까.’
제이스의 말을 떠올린 이안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반쯤 기울였다.
‘그렇다면 검을 든 모습이 떠올라야 하는데 어째서…….’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넘기던 그의 시선이 문득 네이슨의 손에 닿았다.
“네이슨, 손에 들고 있는 건 뭐야?”
“아, 며칠 뒤에 윈터스 가에서 파티가 열린다고 합니다.”
여느 때처럼 참석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전달하겠다는 말을 덧붙이려는데, 이안이 네이슨을 향해 손을 까딱였다.
“이리 가져와 봐.”
“예? 왜요?”
“가볼까 싶어서.”
네이슨의 손에 들린 초대장을 뺏어 들다시피 가져간 이안이 초대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예? 황자님께서 직접 가신다고요? 윈터스 가문 아시잖습니까. 황후 폐하의 사촌 여동생인 올리비아 윈터스가 있는 곳입니다. 겉으로 드러내진 않지만 윈터스 가문이 황후 폐하와 2황자님께 우호적인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2부는 가면무도회로 진행하네. 가면을 쓰고 가면 괜찮지 않나?”
네이슨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심이었다.
“정말 가시려고요? 황자님은 그런 곳에 가는 거 싫어하시잖습니까. 대체 왜…….”
“보통 그런 데서 친해지지 않아?”
이안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꽤 뜻밖이었는지, 네이슨이 얼떨떨한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친분을 쌓는 곳이긴 하죠.”
“그러니까 여기 가야겠다고.”
“진심이세요?”
이안이 몇 번을 더 말해야 알아들을 거냐는 듯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네이슨은 눈치껏 입을 다물며 머리를 굴려보았다.
‘혹시 그 파티에 가브리엘 단장님이 참석하시나?’
*
케이든의 생일 파티 준비로 며칠째 집 안이 소란스러웠다. 그나마 소음에서 비켜나간 곳이 바로 별관에 있는 서재였다.
“비비안, 너도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응. 여기는 책이 많아서 좋아.”
책에 고개를 박을 기세인 비비안을 보며 웃던 나는 조금 전까지 읽고 있던 의학 서적으로 눈을 돌렸다.
의학 관련 서적만 벌써 세 권째인데, 아무리 뒤져봐도 부정맥에 대한 언급은 찾을 수 없었다.
시설들이 제법 편리해서 의학도 꽤 발달했을 줄 알았더니 의학 지식이 그렇게 발달한 건 아닌가 보네.
하기야 그러니까 약초 재배와 배합법에 뛰어난 라일리 가문의 세력이 큰 거겠지.
빠르게 훑어본 책을 내려놓자 어느덧 잠든 비비안의 모습이 보였다. 웅크린 채로 잠든 비비안에게 담요를 덮어두고 나는 네 번째 의학 서적을 집어 들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옷자락이 흔들리는 감각에 눈을 떠보니, 비비안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깜빡 잠들었던 건가?
“언니, 비비안 배고파.”
비비안의 성화에 몸을 일으킨 나는 왼손으로는 서재 문을 열고 오른손으로는 비비안의 손을 부여잡았다.
왜 비비안의 손이 뜨거운 거 같지?
“비비안, 너…….”
“근데 나 아픈 거 같아, 언니.”
눈꺼풀을 느릿하게 움직이던 비비안이 제자리에서 휘청거렸다. 나는 그런 비비안을 품에 안아 들고 본관으로 달렸다.
“가벼운 열감기입니다. 약을 드시면 금방 나을 겁니다.”
의원의 말에 그제야 제대로 숨이 쉬어졌다. 비비안의 상태를 듣고 달려온 헤르만과 올리비아도 그제야 안도하는 눈치였다.
“대체 비비안을 데리고 뭘 했길래 아침까지 멀쩡했던 애가 저 지경이 돼?”
“서재에서 함께 책을 읽었을 뿐입니다.”
나는 금빛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하며 대답했다. 그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었다.
“헤르만, 비비안은 원래 몸이 약하잖아요. 그리고 로즈가 비비안이 아픈 걸 어떻게 알았겠어요. 같이 책을 읽었다는데 그러면 더욱 살피기 쉽지 않았겠죠.”
올리비아의 조곤조곤한 말을 듣던 헤르만의 얼굴 위로 노기가 서렸다.
“그래, 비비안의 몸이 약한 건 우리 집안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지. 그런데 그 긴 시간 동안 서재에 함께 있으면서 비비안 상태가 어떤지도 몰랐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비비안은 널 그렇게나 따르는데, 로즈벨리아 너는 비비안을 동생으로 생각하긴 하는 거야?”
헤르만의 고성에 올리비아가 훌쩍이며 눈가를 훔쳤다.
“나는 탐탁지 않을 수 있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미워하지 말렴, 로즈.”
다짜고짜 화를 내는 헤르만에, 가증스러운 연기를 펼치는 올리비아까지. 아주 환멸이 날 지경이었다.
“언니는 비비안 미워하지 않아! 비비안이 아침부터 아팠는데 말 안 하고 언니가 책 본다고 해서 따라간 거야.”
곤히 잠든 줄 알았던 비비안이 침대 위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말했다.
“어머, 비비안!”
올리비아가 새된 목소리를 내는 사이, 나는 비틀거리는 비비안을 재빨리 품에 안아 들었다.
“비비안이 아침부터 상태가 좋지 않았소?”
“그게…….”
“주인님, 비비안 아가씨가 주인마님께 절대 말씀드리지 말라고, 그래야 로즈벨리아 아가씨와 있을 수 있다고 제게 부탁하셨어요. 일이 이 지경까지 될지 모르고 제가 마님께 말씀 올리지 않았습니다.”
난처한 기색으로 말꼬리를 늘어뜨리는 올리비아 대신 나선 것은 그녀의 전담 하녀인 마가렛이었다.
“언니, 미안해.”
“걱정하지 말고 한숨 자, 비비안.”
고개를 작게 끄덕여 보인 비비안이 눈을 감자, 나는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마가렛의 앞으로 다가갔다.
“비비안이 아침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면 바로 의원을 불렀어야지. 나를 따라 서재에 오게 하면 어떡해?”
“죄송합니다, 로즈벨리아 아가씨.”
“적어도 내게 언질은 주었어야지. 어머니나 나에게 끝까지 말하지 않을 심산이었다면 마가렛 네가 시시때때로 들어와서 비비안의 상태를 확인했어야 했는데 그러지도 않았잖아.”
“제 불찰입니다, 아가씨.”
나는 마가렛 너머, 짐짓 태연한 척하는 올리비아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하지만 저도 비비안과 함께 있으면서 비비안이 아픈 줄 몰랐어요. 알았다면 비비안을 서재에서 내보내고 곧바로 의원부터 불렀겠죠. 마가렛처럼 알면서 모른 척 가만히 있던 게 아니란 뜻입니다.”
헤르만이 큼큼거리며 내 눈치를 살피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그에게 일절 시선을 두지 않은 채로 비비안의 침대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내 품 안에서 곤히 잠든 비비안을 보고 있자니 불현듯 원작 속 윈터스 가문의 멸문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그저 내 앞에 드리워진 죽음의 결말을 피하고자 했는데 행복해졌으면 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나는 비비안의 작은 손을 가볍게 쥐었다가 이내 몸을 일으켰다.
*
“로즈, 너 오늘 왜 이렇게 집중을 못 해?”
“아아, 미안.”
어제 있었던 일 때문에 여태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 일은 분명 올리비아가 꾸민 일이었다.
애초에 마가렛이 올리비아에게 비비안의 상태에 대해 보고하지 않았을 리가 없고, 만약 비비안의 증세가 더욱 심했다면 마가렛은 후작저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다.
올리비아를 오래 모셔온 마가렛이 그런 위험을 감수했을 리가 없지.
내 예상대로 모든 게 올리비아의 계획이었다면, 비비안이 아픈 걸 알고도 그렇게 서재에 방치했다는 건데.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내게 흠집을 내서 크게 이득 보는 거라도 있나?
혼처를 알아본다던 것도 그렇고, 나를 하루 빨리 저택에서 내보내고 싶어 하는 건 분명한데…….
“나한테 미안할 일은 아니고, 그러다 너 다칠 거 같아서…….”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내게 다가오던 에드윈이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연무장 문이 다소 요란하게 열린 탓이었다.
“로즈벨리아, 여기 있어?”
연무장 안으로 다급히 뛰어 들어온 건, 바네사였다.
“바네사 선배님?”
“다행이네. 에드윈도 여기 있었구나.”
바네사는 숨을 고르며 나와 에드윈 앞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 있으세요?”
“수호기사단에서 아니, 정확히는 수호기사단 기사가 지원 요청을 해왔어.”
“지원 요청이라뇨?”
수호기사단과 지원 요청이라니.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수도 외곽에 있는 마을에 마수가 출몰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