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언제까지 신입입니까
(17/54)
17화. 언제까지 신입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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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언제까지 신입입니까
2023.03.30.
“로즈, 저 사람은 왜 또 온 거래?”
에드윈이 눈짓으로 가리킨 이는 오늘 수호기사단 부단장의 이름으로 백색기사단을 찾은 리나트였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조만간 또 보자던 말이 내심 걸렸었는데 역시나 인사치레가 아니었네.
“너도 모르는 일이야?”
파비안과 이야기를 나누는 리나트를 힐긋거리던 에드윈이 은근히 기대하는 낯빛으로 물어왔다.
“에드윈? 나도 지난번에 저 사람 처음…….”
무의식중에 처음 봤다고 말하려다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로즈벨리아에게 빙의한 내가 리나트를 본 건 처음이 맞지만, 로즈벨리아가 리나트를 본 건 처음이 아니니까.
“리나트 일라이저를 처음 봤다고?”
“스쳐 지나가며 봤을 순 있겠지만 제대로 얘기를 나눈 건 처음이라는 말을 하려던 거였어.”
“하기야 너는 연회에 참석해도 금방 자리를 뜨니까.”
에드윈은 수긍하는 듯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파비안과 리나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티 없이 맑은 까만 눈동자가 번뜩인 건 그때였다.
“로즈,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두 사람이 무슨 얘기하는지 들릴 것 같지 않아?”
불안한 예감에 슬쩍 뒤로 빠지려는데, 눈치 빠른 에드윈이 한발 빠르게 내 팔을 단단히 부여잡았다.
나는 항복 자세를 취하곤 에드윈이 이끄는 대로 그들이 얘기를 나누는 본관 건물 쪽으로 다가섰다.
“백색기사단에는 마물에 관한 수업이 따로 있다고 들었습니다.”
“수호기사단은 없습니까? 하기야 황제 폐하께서 특별히 백색기사단을 위해서 지시하셨던 거니까요.”
에드윈의 예상이 맞았다.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려오자, 그가 거들먹거리는 표정으로 눈썹을 들어 올려 보였다.
“백색기사단은 마수 토벌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니 마수와 관련된 수업은 당연히 필요합니다. 하지만 수호기사단도 이번에 토벌을 떠나게 되니, 저희 기사들도 그 수업을 같이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수업을 같이 듣는다고요?”
파비안의 입에서 다소 방정맞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달리 문제가 있습니까?”
“문제라기보다는…….”
“마수와 관련된 수업을 하는 이들도 한때 백색기사단 기사였다가 은퇴한 이들이니 여러모로 수호기사단 기사들이 이곳에 와 수업을 듣는 게 편할 것 같습니다만. 그리고 백색기사단의 시설이 제국 내에서 가장 넓고 좋지 않습니까.”
“그렇기야 하죠. 황제 폐하께서 최근에 지어주셨으니…….”
아니, 파비안? 거기서 말리면 안 되는데?
“로즈, 부단장님이 밀리시는데?”
“저러다 진짜 수호기사단이랑 같이 수업 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
이게 말이 되는 조합인 건가?
로즈벨리아의 기억 속에서 본 백색 기사단과 수호 기사단은 앙금이 꽤 깊어 보였는데.
“이미 윗선에서는 얘기 끝났으니까 이렇게 무턱대고 오지 않았을까?”
그럴싸한 추측이었다.
원작에서 리나트는 분명 마수 토벌을 떠나지 않았는데, 단순히 파비안과 수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온 건가?
“로즈.”
“어?”
“수호기사단 부단장이 이쪽으로 오는데?”
도망칠 곳을 찾으려다 리나트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친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시 뵙습니다.”
어느새 다가온 리나트가 싱긋 웃으며 내게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였다.
“안녕하세요, 부단장님.”
저번처럼 무릎을 꿇으며 인사를 해온 건 아니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편하게 불러주셔도 됩니다.”
“예? 제가 어떻게…….”
그쪽을 편하게 부를 수 있겠어요.
뒷말은 차마 뱉지 못했지만, 내가 삼킨 말이 무엇인지 눈치챈 듯한 리나트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적으로는 저희 가문의 은인이시니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이곳은 공적인 장소니까 부단장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일순간 놀란 듯 커졌던 눈동자에 재차 웃음기가 번졌다.
“얼마 전에 제 여동생이 기사단을 찾아왔다고 들었습니다. 혹 실례가 되진 않았는지요.”
“그럴 리가요.”
“제 여동생이 혹 이상한 말을 하진 않던가요?”
이상한 말이라면 바로 생각나는 게 있긴 했다.
“영애께서 제게 검을 배우고 싶다고 하셨는데…….”
리나트가 곤란하다는 듯 이마를 매만졌다. 표정을 보아하니 데이지가 리나트에게는 검을 배우고 싶다고 언질을 준 모양이었다.
“그 말은 못 들은 걸로 해주십시오. 가뜩이나 약한 몸으로 검이라니. 제가 여동생을 잘 타이르겠습니다.”
“그저 가벼운 마음이라고 치부하시는 건가요?”
그런 물음이 되돌아올 줄 몰랐다는 듯, 리나트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데이지 님과 제대로 대화는 나눠보셨나요? 부단장님의 짐작대로 가벼운 마음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정말 배우고 싶은 거라면요? 데이지 님에게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열망이 생긴 거라면요?”
“…….”
“안 된다고 말리기 전에 데이지 님의 진심이 뭔지, 그걸 먼저 아셔야 하지 않을까요?”
일순간 리나트의 낯빛이 흐려졌다. 그는 얼빠진 얼굴로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일리가 있는 말씀이군요. 그 아이에게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게 생긴 거라면 지원해주는 게 맞겠죠.”
생각을 정리한 듯 리나트는 나를 향해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기, 근데…….”
“편히 말씀하십시오.”
“혹시 부단장님도 이번 마수 토벌에 가시는 겁니까?”
“네. 제가 수호기사단을 이끌고 이번 마수 토벌에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리나트가 수호기사단을 이끌고 마수 토벌에 참여한다고?
아니, 원작이 이렇게까지 뒤틀릴 수가 있나?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윈터스 영애.”
태도는 정중한데 호칭은 여전히 윈터스 영애구나. 그게 아니면 교묘히 생략하든지.
로즈벨리아는 본인이 귀족 출신으로 최초의 여기사가 된 것에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니 ‘윈터스 영애’라는 호칭이 틀린 건 아니지만.
‘경’이라는 호칭으로 먼저 불러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하기야 리나트도 수호기사단 소속 기사이고, 특권 의식으로 똘똘 뭉친 수호기사단 기사에게는 일말의 기대를 하지 않는 편이 옳았다.
멀어져가는 리나트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는데, 루카스가 내 앞으로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깜짝이야.”
“로즈벨리아, 에드윈 못 봤어?”
“에드윈? 내 옆에…….”
어라? 에드윈이 언제부터 없었지?
설마 리나트가 오자마자 꽁무니를 뺀 건가?
“아까까지 나랑 같이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 갔는지 나도 모르겠네.”
데이지에게 한눈에 반했으면 리나트에게 잘 보여 나쁠 게 없는데, 아무래도 거기까진 미처 생각지 못한 모양이었다.
에드윈은 원작에서도 단순하게 앞만 보며 직진하는 타입이었으니까.
“그럼 그 소문이 진짜인가 보네.”
“소문? 무슨 소문?”
“에드윈 지금 대련장에서 대련하고 있대. 저기 신입 애들 대련장 쪽으로 달려가는 거 보이지?”
에드윈이 대련장에서 대련을 한다고?
다리가 아직 다 낫지 않았을 텐데?
“누구랑 대련하는데?”
루카스가 누군가를 떠올리려는 듯 미간을 한껏 좁혔다.
“그……. 신입 중에서 엄청 잘생긴, 이름이 뭐였더라.”
“클라인?”
“그래, 클라인이랑 에드윈이 대련한다고 듣긴 했는데 좀처럼 믿어지지 않아서 말이야. 비공식 대련은 많지만, 대련장에서 하는 건 공식이잖아. 누구든 구경해도 되고…….”
에드윈이랑 이안? 그 두 사람이 대련장에서 대련을? 대체 왜?
“루카스, 나 먼저 가볼게.”
걸음을 재촉해 대련장으로 향했지만, 내가 도착했을 땐 이미 대련이 끝나 있었다.
대련장 밖으로 쏟아져나오는 단원들 사이를 헤치고 안으로 들어선 내 눈에 들어온 건 바닥 한가운데에 누워 있는 에드윈이었다. 나는 곧장 그에게로 달려가 물었다.
“야, 너 괜찮아?”
“안 괜찮아. 완전 쪽팔려.”
“네가 쪽팔린 건 관심 없고, 다친 다리 말이야. 괜찮냐고.”
“정말로 다치셨던 겁니까?”
검을 검집에 넣으며 다가온 이안이 난감한 얼굴로 물었다.
“적어도 상대의 상태가 어떤지 확인하고 대련을 했어야지.”
“내가 말 안 했어. 클라인의 실력이 궁금했던 참에 슬쩍 도발했는데 바로 넘어오는 게 귀엽더라고.”
얘가 뭐라는 거야, 지금.
“너도 진짜…….”
“내가 다쳤다고 말을 안 했는데 어떻게 알겠어. 클라인은 잘못 없어.”
“아닙니다. 선배님의 왼쪽 다리가 묘하게 둔한 느낌을 받긴 했습니다. 그때 그만뒀어야 했는데 제 불찰입니다.”
이안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자, 에드윈이 민망하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내가 잘못한 거래도.”
“그래, 원인 제공은 네가 했겠지. 얼른 일어나.”
“왜?”
“처치실에 가야 할 거 아니야. 가서 찜질이라도 해.”
내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들은 에드윈이 눈을 찡긋해 보였다.
“역시 내 생각을 해주는 건 로즈밖에 없다니까.”
“징그러운 소리 하지 말고 일어나. 루카스!”
나는 뒤늦게 대련장에 들어온 루카스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곧바로 상황 파악을 끝낸 루카스는 에드윈을 부축해 처치실로 향했다.
“토벌 전까지 무리하지 말라고 했는데…….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니까.”
“……저한테 실망하셨습니까?”
바짝 긴장한 듯한 이안의 표정을 살핀 내가 짧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 일로 실망이랄 건 없고 좀 의아하긴 해. 가벼운 대련일 뿐인데 상대가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면 멈췄어야지. 왜 멈추지 않았어?”
“저도 모르겠습니다.”
“뭐?”
내가 다소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자, 이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기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 마음뿐이었습니다.”
“라이벌 의식, 뭐 그런 거야? 혹시 에드윈이랑 사이가 안 좋았어?”
“그렇다기보단…….”
이안의 얼굴 위로 혼란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그 얼굴을 마주하는 나까지 혼돈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지난번에 초심을 되찾았다더니 승부욕을 주체할 수 없었나.
“아무튼 너에게 화가 나고 그런 건 아니야. 애초에 다친 걸 숨기고 대련에 응한 건 에드윈이니까.”
“선배님은 왜 저와 대련해주시는 겁니까?”
“그거야……. 네가 원했으니까.”
“정말 그 이유가 답니까?”
원작의 결말대로 흘러가는 걸 피하고 싶었고, 이안과 친분을 쌓아서 나쁠 게 없다고 여겼다.
처음에는 분명 그 이유가 다였지만…….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이안이 내게 고개를 숙이는 게 보였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아.”
잇새로 낮은 탄성이 흘러나오자, 대련장 바닥을 울리던 발소리가 멎었다.
“이유가 하나 더 있긴 해.”
밖으로 나가려던 이안이 다시 내 쪽을 돌아보았다.
“너랑 대련하면 몸이 개운해지거든. 너도 네 실력이 좋다는 거 알고 있잖아. 에드윈도 우리 기사단 내에서는 손꼽히는 실력자지만, 에드윈이 다치지 않았어도 네 실력이 더 우위였을 거야.”
“그 말은, 이 기사단 내에서 선배님의 대련 상대가 되는 건 저뿐이라는 겁니까?”
대련할 만한 상대를 곱씹어보던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단장님과 대련할 순 없으니까.
“그럼 대련에 한해서는 에드윈 선배님보다도 제가 선배님께 더 필요한 존재인 거네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찰나 이안의 만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거기서 그렇게 웃을 줄은 몰랐던지라, 나는 할 말을 잃은 사람처럼 입술을 벙긋거렸다.
“그렇군요.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그래, 신입. 그럼…….”
내일 보자는 뒷말은 채 이을 수 없었다. 저만치 멀어져 있던 이안이 단숨에 거리를 좁힌 탓이었다.
“왜? 무슨 할 말이라도 남았어?”
내 물음에 이안이 뺨을 움찔거렸다. 왜인지 잔뜩 긴장한 듯한 얼굴이었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데?”
그의 긴장감이 내게 옮겨오기라도 한 듯 덩달아 입안이 바싹 말라왔다.
“선배님께 저는…….”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나 싶던 찰나, 내내 다른 곳에 시선을 두었던 그가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언제까지 신입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