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각기 다른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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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각기 다른 욕망
2023.03.27.
눈을 수차례 깜빡여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내 앞에 있는 건 분명 데이지였다.
“대체 여긴 어떻게…….”
“로즈, 무슨 일이야?”
뒤따라온 에드윈이 데이지를 발견하곤 크게 숨을 들이켰다.
에드윈을 살필 겨를도 없이 내 귀에 청천벽력과도 같은 단어가 꽂혀 들었다.
“저, 로즈벨리아 님께 검을 배우러 왔어요.”
“네? 검을 배우러 오셨다고요?”
원작에서는 이런 전개 아니었잖아.
그냥 평범하게 이안을 만나러 몰래 찾아온 거였는데?
“……안 되는 건가요?”
풀죽은 모습이 마치 꼬리가 축 처진 강아지 같았다. 대답을 망설이는 찰나, 에드윈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로즈, 누구셔?”
놀란 듯 살짝 커진 에드윈의 눈동자는 데이지에게 고정된 채였다.
원작에서도 에드윈은 이안을 보러 기사단까지 찾아온 데이지에게 한눈에 반했었는데, 역시 이건 변하지 않는구나.
“내가 광장에서 구해드렸다던 분이야.”
“제 소개가 늦었네요. 데이지 일라이저라고 합니다.”
데이지가 드레스 자락을 잡은 채로 싱긋 웃어 보이자, 에드윈이 밭은 숨을 토해냈다.
“정말 검을 배우러 이곳에 오신 건가요?”
“광장에서 로즈벨리아 님의 검술을 본 그날, 저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답니다. 검을 휘두르던 로즈벨리아 님의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려서 저도 검을 배워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안 되는 걸까요?”
나는 난감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입꼬리부터 살짝 올려 보였다. 데이지가 상처받지 않게 돌려서 말할 심산이었다.
“검이라는 게 기본적으로 무게가 꽤 나가거든요. 데이지 님이 들기에는 무거울 거고…….”
내가 이름을 입에 올리자마자 데이지가 놀란 듯 제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미처 가려지지 않은 뺨 위로 홍조가 발그레 피어났다.
“목검으로 그냥 가벼운 동작 정도는 연습하는 데 무리가 없겠지만, 아시다시피 이곳은 기사단이라 데이지 님이 수련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거 같습니다.”
“그렇군요.”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했던 얼굴이 단숨에 시무룩해졌다.
“공작저에도 연무장이 있을 테니 거기서 조금씩 연습하는 건…….”
“저는 로즈벨리아 님께 배우고 싶은걸요.”
데이지의 몸 상태를 생각하면 거절하는 게 맞는데,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이는 눈망울을 마주하니 자꾸만 마음이 약해졌다.
그러고 보니 공작저에서 데이지를 엄하게 대하는 게 공작 부인이었지?
“공작 부인께 허락은 받으신 건가요?”
데이지가 뜨끔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단은 허락을 먼저 받으셔야 할 거 같은데요.”
“그렇겠죠? 하지만 꼭 배우고 싶은데…….”
데이지가 저렇게나 의욕을 보이는데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친 순간, 데이지가 돌연 머리를 부여잡았다.
“괜찮으신가요?”
곧장 다가가 어깨를 붙잡아주자, 데이지가 내게 몸을 기대왔다.
“갑자기 머리가 조금 어지러워서요.”
데이지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서 줄곧 과보호를 받아왔다.
몇 년 전부터는 어지럼증을 호소하기 일쑤였는데 저명한 의원을 불러봐도 이유를 알 수 없단 답만 돌아왔고, 끝내는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얘기까지 듣게 된 것이었다.
“하루에 얼마나 걸으십니까?”
“조금만 걸어도 심장이 뛰어서 방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아요.”
그렇다면 가벼운 산책 정도도 안 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거고, 햇빛을 보는 양 자체가 현저히 적을 수밖에 없겠네.
“먹는 양도 적으시죠?”
“네. 허기가 지지 않아서요.”
역시나 원작을 보면서 짐작했던 대로였다.
사실 이전 생에서 데이지와 비슷한 증상을 가진 사람이 내 주변에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신 엄마였다.
엄마는 평소에 앓고 있던 질병이 있었는데, 바로 부정맥이었다.
“혹시 가슴에 통증이나 호흡이 곤란하다거나 그런 적도 있었습니까?”
심장에 통증이 느껴지거나 호흡 곤란이 오면 시술을 받아야 하지만, 엄마의 경우는 심한 부정맥이 아니라 다행히 통증은 없었다.
꾸준한 운동을 하면 좋다기에 어릴 때 엄마 손을 부여잡고 억지로 끌고 나갔던 기억도 있었다. 처음엔 엄마가 힘들어했지만, 다행히 점차 증세가 호전됐었다.
“아뇨, 그런 적은 없었어요.”
“그렇군요.”
데이지의 증세가 갑작스럽게 악화된 건 원작 중후반부였다. 이안 때문에 상심하면서 심장에 통증을 호소하기도 하고, 실신도 여러 차례 했었다.
아직 증상이 심해지지 않은 이 시점에서 적당히 관리해준다면, 데이지의 증세가 악화되는 걸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는…….”
“선배님, 단장님께서 찾으십니다.”
불쑥 끼어든 목소리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직도 멍한 얼굴로 서 있는 에드윈을 지나쳐 내 앞으로 걸어오는 이는, 이안이었다.
원작 남자주인공에 여자주인공, 그리고 서브남까지. 갑작스러운 삼자대면에 절로 마른침이 삼켜졌다.
“그래? 알겠어.”
나는 여전히 내 품에 안겨 있는 모양새인 데이지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데이지는 이안에게 잠깐 시선을 두었다가 별 감흥 없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이안에게 관심을 보이는 건 아닌 듯하지만, 불안 요소는 사전에 제거하는 것이 안전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는 게 좋겠어요, 데이지 님.”
“어머, 그러고 보니 망…….”
“예?”
“아니에요. 아무것도.”
축 처졌던 눈매가 언제 그랬냐는 듯 희미한 웃음기를 띄고 있었다.
“여기까진 혼자 오신 건가요?”
“밖에서 마차가 대기하고 있답니다. 그럼 조만간 또 봬요, 로즈벨리아 님.”
유유히 멀어져가는 데이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에드윈은 아까부터 왜 이렇게 조용하지?
흘긋 시선을 돌린 내 눈에 들어온 건, 마치 석상처럼 굳어 있는 에드윈이었다.
“에드윈, 너 왜 그래?”
“……나 말이야.”
“그래, 듣고 있어.”
“운명을 만난 거 같아.”
마치 꿈결처럼 중얼거리는 에드윈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런 거 같네. 축하해.”
원작이 달라져도 에드윈 너는 변함없을 줄 알았어.
하지만 데이지의 결말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두 사람이 잘되더라도…….
애써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 낸 나는 서둘러 단장실이 있는 본관으로 향했다.
*
“클라인, 여기서 뭐 해?”
고목에 기대앉아 있던 이안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건, 백색기사단에 함께 들어온 신입 기사인 제이스였다.
“보다시피 그냥 앉아 있는데.”
“아까 기사단에 아름다운 레이디가 왔다던데 혹시 넌 봤어?”
이안이 서서히 미간을 좁혔다.
‘아름다운 레이디?’
마치 가시넝쿨처럼 로즈벨리아에게 끈덕지게 엉겨 붙던 여자는 있었다.
‘설마 그 여자를 두고 하는 말인 건가?’
굳게 다물린 잇새로 실소가 새어 나왔다.
사람에게 아름다움이라는 표현을 붙여야 한다면 그에 어울릴 만한 사람은…….
이안은 며칠 전, 성벽 위에 올라서서 바다를 보았던 일을 떠올렸다. 로즈벨리아의 권유로 마주한 풍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이안의 시선을 잡아끌었던 건 은은한 달빛을 오롯이 받아내던 로즈벨리아의 새하얀 얼굴, 유난히 반짝이던 금빛 머리칼…….
그리고 바람결에 흩어지던 그녀의 나른한 웃음소리.
눈을 감으면 이따금 그날의 광경이 떠올랐다. 마치 환영처럼 아른거리던 로즈벨리아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면 명치 끝이 묘하게 간질거렸다.
옅은 미소를 지은 채로 눈을 감고 있던 로즈벨리아는 마치 이 세계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꼭 어딘가로 훌쩍 날아가 버릴 것 같아 저도 모르게 그녀의 망토 자락을 붙잡았었다.
“클라인? 내 말 듣고 있어?”
“듣고 있어.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아?”
이안은 무언가가 얹힌 것처럼 묵직한 가슴께를 두드리며 물었다.
“로즈벨리아 선배님이 광장에서 구해줬다던 일라이저 가문의 영애라던데.”
“아아.”
이안이 알은체를 하자 제이스의 눈동자가 커졌다.
“클라인 넌 본 거야?”
“보긴 했지.”
“로즈벨리아 선배님은 화려한 미인이잖아. 그 영애는 가녀린 느낌의 청초한 미인이라던데 정말이야?”
“그 정도는 아니…….”
아무렇게나 던져둔 시선 끝이 어딘가에 붙잡혔다. 그새 단장실에서 나온 로즈벨리아가 에드윈과 찰싹 붙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로즈벨리아에게로 고개를 기울인 에드윈이 친근하게 그녀의 팔을 건드리자 손끝이 절로 오므라들었다.
‘뭐지? 이 기분은.’
불쑥 치솟은 불쾌감은 왜인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클라인?”
“…….”
“말하다가 말고 어딜 그렇게 보는 거야?”
이안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살핀 제이스가 알만하다는 얼굴로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너도 로즈벨리아 선배님과 에드윈 선배님을 동경하는구나?”
“동경?”
“나도 두 분을 동경하거든. 기사단에 있는 동안 두 선배님과 가까워지는 게 목표야.”
“동경하면 가까워지고 싶은 거야?”
로즈벨리아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이안이 성마른 표정으로 되물었다.
“당연하지. 우러러보는 상대니까 친해지고 싶고,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거니까.”
찰나, 툭 불거진 이안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그 사람과 제일 가까웠으면 좋겠고?”
“어? 그건……. 동경하는 마음이 크다면야 그럴 수도…….”
제이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는 제 감정을 마주하듯 눈을 길게 감았다가 떴다.
‘그러니까 이게 동경이란 말이지.’
자연스레 로즈벨리아를 좇던 두 눈이 선명하게 빛났다.
*
“뭐? 케이든이?”
올리비아가 고운 미간을 찌푸린 채로 아놀드를 올려다보았다.
“네. 예전에 로즈벨리아 아가씨의 검술 스승이었던 슐츠와 따로 수련하는 거 같습니다.”
슐츠라면 올리비아도 기억하고 있었다. 윈터스 가문의 호위를 꽤 오래 전담했던 상급 기사였다.
“케이든 대체 왜?”
“도련님께서 언젠가 제게 로즈벨리아 아가씨와 대련할 실력이 되겠냐고 물은 적 있었습니다. 아마 도련님께서는 로즈벨리아 아가씨와 대련을 하고 싶어서 슐츠를 찾은 것 같습니다.”
로즈벨리아를 극진히 따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슐츠의 지위를 뺏었다.
쫓아낼 수도 있었지만 후작저에 둔 건, 로즈벨리아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윈터스 가문 내에서 로즈벨리아를 따르는 이들의 최후가 어떤지 똑똑히 보았으면 해서.
그러니 너도 저런 꼴이 되고 싶지 않으면 얼른 이곳을 떠나라는 경고의 메시지도 담겨 있었다.
‘케이든이고 비비안이고, 대체 왜 그렇게 로즈벨리아를 따르는 거야?’
올리비아는 릴리아나를 쏙 빼닮은 로즈벨리아가 후작저를 설치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게다가 릴리아나가 죽은 지가 언젠데, 아직도 윈터스 가문 하면 전 후작 부인인 릴리아나와 로즈벨리아를 떠올리냔 말이야.’
한미한 자작가에서 태어난 주제에 눈에 띄는 외모를 지닌 릴리아나는 어딜 가나 주목받았다.
올리비아는 자신이 오랫동안 좋아했던 헤르만이 릴리아나를 보고 한눈에 반하던 그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그 기억이 선연히 떠오를 때마다, 이 저택에 깊게 드리워진 릴리아나의 그림자를 말끔히 지워내고 싶은 욕망이 그녀를 잠식해갔다.
앞으로 윈터스 가문을 대표하는 건 케이든과 비비안이어야 한다.
한미한 자작가의 핏줄을 이어받은, 내세울 건 미모 하나뿐인 로즈벨리아 따위가 아니라.
“은밀히 주시해.”
“예? 하지만 슐츠의 수련 방법은 엄격한 편입니다.”
“그래, 그랬었지.”
슐츠는 케이든이 후작가의 차기 가주란 걸 알면서도 다른 이들과 똑같이 대했었다.
‘그래서 케이든이 자잘한 상처를 입기도 했었고…….’
지난 기억을 떠올린 올리비아의 입가에 냉소가 어렸다.
“제게 케이든 도련님의 수련을 일임하시면서 케이든 도련님이 털끝 하나 다쳐선 안 된다고 하셨잖습니까. 분명 슐츠와 훈련하다 보면 도련님이 다치실 수…….”
“그러니 일단 지켜보라는 거야. 제법 괜찮은 그림이 그려질 것도 같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