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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얼마든지 만지셔도 됩니다 (15/54)


15화. 얼마든지 만지셔도 됩니다
2023.03.23.



“그만 해요, 헤르만. 애들도 있는데…….”

올리비아가 말끝을 흐렸다.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시선까지 아래로 떨어뜨리는 모양새가 마치 비련의 여주인공 같았다.

저런 연기력이라면 누구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겠는데?

헛웃음을 삼키려는 찰나, 시야에 비비안의 얼굴이 들어찼다. 이러한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 비교적 덤덤해 보이는 케이든과 달리, 비비안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으로 헤르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이제는 올리비아를 제 엄마로 받아들일 때도 됐거늘. 릴리아나를 쏙 빼닮은 얼굴로 성격은 어찌 저렇게 모난 건지.”

그대로 몸을 일으키려는데, 헤르만이 불쑥 꺼내든 그 이름이 내 발목을 덥석 붙잡았다.

릴리아나라면 로즈벨리아의 친모였다. 원인 모를 병에 시달리던 릴리아나의 곁을 제대로 지켜주지도 않았으면서 그 이름을 입에 올리다니.

아픈 릴리아나와 그런 릴리아나 곁을 떠나지 못하던 어린 로즈벨리아. 그들 곁에 헤르만은 없었다.

릴리아나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헤르만이 올리비아와 재혼을 하면서, 로즈벨리아는 헤르만이라는 존재를 마음속에서 비워내 버렸다.

아내를 제대로 지켜주지 못한 남편에, 무늬뿐인 아버지.

로즈벨리아가 헤르만에 대해 품고 있던 생각을 정의하자면 딱 그러했다.


“헤르만, 당신 말이 너무 지나쳐요.”

헤르만은 입술을 달싹거리다 이내 와인 잔에 담긴 포도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릴리아나를 쏙 빼닮은 얼굴로 성격이 어찌 저렇게 모나냐고?

외모는 다행스럽게도 제국 최고 내 미인으로 꼽히던 어머니를 쏙 빼닮았지만 성격이 모난 건 아버지를 빼닮았나 보죠, 라는 말이 혀끝까지 차올랐지만 끝끝내 참아내고 식당을 빠져나왔다.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네.”

곧바로 저택에서 나와 마구간으로 향했다. 울타리 쪽에 쌓아둔 건초더미에 기댄 채 졸고 있는 로이를 발견한 나는 서서히 걸음을 늦추었다.

로이를 깨우고 싶지 않아 조심스럽게 그 앞을 지나치려는데, 하필 발밑에서 건초가 버석거렸다.

아주 작은 소리였는데 퍼뜩 잠에서 깨어난 로이가 눈을 비비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가씨?”

“미안해, 로이. 곤히 자길래 에밀리만 데리고 나가려고 했는데…….”

“아닙니다, 아가씨. 제가 얼른 에밀리를 꺼내올게요.”

마구간 안으로 쏜살같이 달려가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안겨들었다.

금세 밖으로 나온 로이에게서 에밀리의 고삐를 건네받은 나는 그길로 곧장 기사단으로 향했다.

머릿속엔 오직 성벽 위에 올라서야겠다는 그 일념 하나뿐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마주하면, 가슴을 묵직하게 내리누르는 이 체증이 조금은 사라지지 않을까.

*

어스름한 저녁 빛이 내려앉자 수평선의 경계가 조금씩 허물어져 갔다.

성벽에 막 올라섰을 때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으니 짧게 머문 것은 아니었지만 아쉬운 마음에 좀처럼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래도 용케 아무한테도 안 들키고…….”

혼잣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지척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선배님?”

서둘러 내려오려던 나는 성벽 아래로 다가오는 이가 이안임을 확인하곤 가슴을 쓸어내렸다.


“신입 너였구나.”

“오늘 기사단에 안 나오셨다고 들었는데.”

“안 오려고 했는데 갈 데가 여기밖에 없더라고.”

중얼거림에 가까운 내 목소리가 바람결에 스러지자, 이안의 얼굴 위로 걱정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너도 올라올래?”

대답 대신 한 손으로 성벽을 짚은 이안이 그 위로 가뿐히 올라섰다.


“……무슨 일입니까.”

“이 풍경을 앞에 두고 논할 정도로 가치 있는 일은 아니라서.”

눈짓으로 정면을 가리키자, 내 시선을 따라 이안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이윽고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마주한 이안이 짧은 숨을 들이켜는 게 느껴졌다.


“이런 광경이었군요.”

“정말 멋있지?”

낮에 보는 풍경은 끝없는 바다에 시선을 빼앗겼다면, 저녁에 보는 풍경은 광활한 밤하늘이 시선을 앗아갔다.


“선배님이 단장님께 혼나가면서 이곳에 올라오신 이유를 알겠네요.”

때마침 불어온 선선한 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흔들고 지나갔다. 편안한 감각에 절로 눈이 감겼다.


“시원하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길 반복했다. 이따금 새어 나온 웃음소리가 바람결에 흩어졌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가슴께를 부여잡고 있은 채로 나를 빤히 응시하는 이안이 보였다.


“왜 그래?”

“예?”

이안은 내 물음의 의미를 단번에 이해하지 못한 듯 눈썹을 찌푸렸다.


“어디 아파?”

나는 턱짓으로 단원복을 부여잡고 있는 이안의 손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자 시선을 흘긋 내린 이안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떼어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맞다, 상처는 좀 어때? 제대로 치료했어?”

이안의 얼굴 위로 손을 올리려던 내가 멈칫하자, 그가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아챘다.


“불쾌하지 않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

 

 
달빛 아래서 일렁이는 그의 눈동자를 마주해서일까? 아니면 유난히 낮아진 이안의 목소리 때문일까?

자석처럼 달라붙은 두 입술이 좀처럼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얼마든지 만지셔도 됩니다. 상처는 말끔히 나았습니다.”

“벌써 다 나았다고? 하루 만에?”

“상처가 아주 미세했고, 좋은 연고를 발랐거든요. 확인해보셔도 됩니다.”

이안은 내 손을 끌고 가 제 얼굴 위로 올렸다. 조심스럽게 어루만지자 내 손길을 따라 그의 뺨이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분명 이쯤에 생채기가 났던 것 같은데 손끝에 와닿는 뺨의 촉감은 부드럽기만 했다.


“그러니 오늘도 대련을 해드리겠습니다.”

그 말이 왜 안 나오나 했다.

오늘은 단원복을 입고 온 것도 아닌데 대련을 하자니.

물론 로즈벨리아의 실력이 옷차림에 좌우되진 않지만, 의외로 편견이 없다고 해야 할지. 모든 신경이 대련에 쏠린 거라고 봐야 할지.

나도 모르게 웃으려다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안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한 나는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아니, 앞으로 대련은 안 하는 게 좋겠어.”

“갑자기 왜……. 혹시 제 상처 때문이라면…….”

“너도 알잖아. 내가 한동안 단원들과 대련하지 않은 이유 말이야.”

내 단호한 목소리에 이안의 낯빛이 흐려졌다.


“제가 방심한 탓입니다. 선배님 잘못이 아닙니다.”

“나도 집중하지 못했어. 그래서 너한테 상처를 낸 거고.”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이안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사실 한동안 검에 흥미를 잃었습니다. 하지만 놓을 수 없는 이유가 있어서 억지로 붙잡고 있었고요.”

그 이유가 뭔지 묻고 싶었지만 이안의 얼굴이 애달파 보여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건지, 그가 다소 슬픈 듯한 미소와 함께 뒷말을 이었다.


“어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꽤 오래 아프셨는데 제가 처음 검을 배우고 온 날, 아픈 어머니를 앞에 두고 엉성한 검술을 보여드렸더니 정말 기뻐하셨어요.”

이안의 어머니가 황비였지, 아마? 이안을 낳고 몇 년 뒤에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고.


“그 얼굴이 잔상에 남아 잊히지 않더군요. 그래서 유일하게 검만큼은 붙잡고 있었고, 마지막까지 놓고 싶지 않았습니다. 백색기사단에 들어온 것도 그 때문이었고요.”

동기부여가 필요했던 거구나.


“…….”

“저를 이곳으로 이끈 건 가브리엘 단장님의 명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전야제에서 선배님과 검을 맞댔고, 그 감각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원작은 데이지 시점이라 이안이 정체를 숨기고 백색기사단에 들어온 이유를 추측조차 할 수 없었는데, 내막을 알고 나니 가슴 한편이 찡하고 울렸다.

원작에서 이안은 머지않아 백색기사단을 떠났었다. 만약 내가 꿈에서 본 게 원작 밖의 일이었다면…….

로즈벨리아는 끝내 대련을 거절했고, 별다른 동기부여를 찾지 못한 이안이 백색기사단을 떠난 걸 수도 있겠네.


“그리고 어제 선배님과 다시 진검으로 대련했을 땐, 처음으로 검을 배웠을 때의 그 초심이 생각났습니다. 더 열심히 수련하고자 하는 의지까지 생겨서 오늘도 늦게까지 남아 수련을 했던 겁니다. 제가 더 정진하겠습니다. 당분간은 목검이라도 좋으니 재고해주실 순…….”

내가 번쩍 손을 들어 올리자 이안이 말을 멈추었다. 저렇게나 간절한 목소리로 말하는데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알겠어. 목검으로도 괜찮다면 대련해줄게.”

“감사합니다, 선배님.”

“……사실 나도 너처럼 펜, 아니, 검에 흥미를 잃은 적 있었어.”

“선배님이요?”

어머니와 외할머니까지 돌아가시고 나서 잠시 슬럼프에 빠졌었다. 그땐 펜싱뿐만 아니라 모든 게 무용하게 느껴질 때였다.


“포기하려던 때가 있었는데,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에 어떻게든 잡고 있었어. 내가 쉽게 놔버리면 어머니가 나한테 실망할 거 같았거든.”

어떻게든 마음을 다잡았지만 결국 부상 때문에 펜싱을 포기해야 했다. 그래도 아예 펜싱을 놓고 싶진 않아서 몰래 홀로 연습하곤 했었다.


“…….”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이렇게 몸 쓰는 일이 잘 맞는 거 같더라고. 재밌기도 하고.”

승패가 달려 있을 뿐인 펜싱과 달리 여기서 드는 검으로는 생과 사가 갈릴 수 있다는 점이 내심 두렵기도 하지만, 로즈벨리아의 몸으로라도 다시 검을 들 수 있어 즐거웠다.


“선배님께도 그런 고민이 있었군요.”

“그리고 네 실력은 지금도 정말 뛰어나. 내가 조금 더 뛰어날 뿐이지.”

내 말이 끝나자마자 이안이 소리 내어 웃었다. 나는 그런 이안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이안이 여태 이렇게 편한 모습으로 웃은 적이 있었던가?


“그럼 오늘은 이거라도 드릴까요?”

그가 주머니에서 꺼내든 건, 지난번에 광장에서 내게 받아 갔던 사탕이었다.


“이걸 여태 안 먹고 가지고 있었어? 너도 진짜…….”

이상한 애구나.

사탕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안이 돌연 내 망토 자락을 덥석 붙잡은 건 그때였다.


“왜 그래?”

“아닙니다, 아무것도.”

“싱겁긴.”

“이만 내려가시죠.”

이안은 성벽 아래로 착지할 때까지도 내 망토 자락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인파 속에서 엄마를 잃어버릴까 봐 엄마의 옷자락을 꼭 붙잡는 아이처럼 고집스러운 손길이었다.


“근데 말이야.”

내 부름에 이안이 나를 뒤따르며 대답했다.


“말씀하십시오.”

“신입, 너 몇 살이야?”

원작에서는 이안와 에드윈의 나이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데이지보다 연상이라는 것 정도만 추측했을 뿐이었다.


“곧 돌아오는 생일에 스물두 살이 됩니다만.”

스물두 살이 된다고? 로즈벨리아는 돌아오는 생일에 스무 살이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안이 연상이었어?

나는 작게 벌어지려는 입술을 꾹 닫고 마구간으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했다.


“선배님은…….”

“그럼 내일 보자, 신입.”

 

*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며칠 간은 평화로운 일상이 이어졌다. 헤르만이나 올리비아와 마주하지 않기 위해 저택에서 일찍 나왔다가 늦게 들어가는 루틴을 반복한 덕이었다.

비비안과 케이든까지 보지 못한 건 다소 아쉬웠지만 심신은 한결 편안했다.


“에드윈.”

내가 제자리에 멈춰 서자, 에드윈이 무슨 일이냐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려 보였다.


“너 다리 괜찮은 거 맞아? 수업 때 보니까 아직 불편해 보이던데.”

“삐끗한 정도야. 금방 나을 거고…….”

“잠깐, 조용히 해 봐.”

짧은 순간이었지만, 분명 에드윈 너머로 보이는 풀숲이 움직였다. 바람 때문에 흔들렸다기에는 다소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왜?”

“저기에 뭔가가 움직이는 거 같아서.”

새끼 고양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 가까이 다가가자 풀숲이 더욱 거세게 흔들렸다.

이내 풀숲 위로 검집을 가져다 대려는 찰나, 누군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고양이가 아니라 사람이었어?

제자리에서 주춤하는 내 시야에 제일 먼저 들어온 건 드레스 자락이었다.

잠깐, 기사단에서 드레스라니?

기사단에 여기사가 몇 있긴 하지만, 로즈벨리아를 제외하고는 모두 평민이라 내가 입지 않고서는 여기서 드레스를 볼 일이…….

나는 설마 하는 얼굴로 풀숲 뒤편을 살폈다. 이윽고 내 시야를 가득 메운 건,


“안녕하세요.”

멋쩍은 얼굴로 몸을 일으키는 원작 여주 데이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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