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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직접 만나야겠어 (14/54)


14화. 직접 만나야겠어
2023.03.20.


후작저에 도착하니 날이 제법 어둑했다.

곧장 방으로 들어간 나는 앤이 미리 준비해둔 욕탕에 몸을 담갔다.

느긋하게 있다가 나오니 편한 옷을 준비한 채로 기다리고 있던 앤이 내게 소곤거렸다.


“아가씨, 비비안 아가씨께서 오셨어요.”

“그래?”

들뜬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앤이 서둘러 머리를 말려 주었다. 이내 방 중앙으로 걸어 나가자 제법 깜찍한 모양새로 소파에 누워 있는 비비안이 보였다.


“비비안, 너 여기서 뭐해?”

한쪽 팔로 머리를 괸 채로 눈을 부릅뜨고 있던 비비안은 태연하게 몸을 일으켰다.


“비비안 너무 심심해서 왔어.”

“케이든은?”

“몰라. 요새 비비안이랑 잘 안 놀아줘!”

비비안은 금방이라도 펄쩍 뛰어오를 기세였다. 부루퉁한 얼굴을 보니 케이든에게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래?”

“케이든 오빠는 얼굴 보기도 힘들어.”

수련을 열심히 하는 건가?

윈터스 가문과 더불어 올리비아의 친정 가문이자 대공가인 라일리 가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큰 케이든은 올리비아의 큰 자랑거리였다.

어릴 때부터 못 하는 게 없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렇게 애지중지 공들여 키운 케이든이 백색기사단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는 걸 알면, 올리비아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로즈 언니, 괜찮아?”

옷자락을 흔드는 비비안의 손길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

“방금 얼굴을 요렇게 찡그리고 있었어.”

비비안이 나를 따라 하려는 듯 얼굴을 사정없이 구겼다. 그래도 그저 귀엽기만 한 모습에 풋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비비안 나랑 뭐 하고 싶어?”

“책 읽어줄 수 있어?”

어느새 침대에 걸터앉은 내가 옆자리를 툭툭 건드리자, 비비안이 책을 들고 달려왔다.


“그럼 저는 디저트를 가져올게요.”

“부탁할게, 앤.”

이윽고 방문이 닫혔다. 비비안은 고개를 빼꼼 내밀어 주위를 살피더니 갑자기 주머니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뭐해, 비비안?”

“언니한테 줄 거 있어.”

한참을 꼬물거리던 비비안은 자그마한 주먹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이건…….”

쫙 펴진 손바닥 안에 있는 건, 다름 아닌 사탕이었다.

이안이 준 사탕과 생김새는 조금 달랐지만 동그란 모양에 손톱만 한 크기를 보니 사탕이 맞는 듯했다.

요새 수도에서 유행인 건가?


“언니한테만 특별히 주는 거야.”

“이거 어디서 났어?”

“마크가 몰래 줬어.”

주방장인 마크는 비비안에게 유독 약했다. 비비안은 입버릇처럼 마크의 디저트가 최고라는 말을 일삼곤 했는데, 마크는 늘 멋쩍어하면서도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나한테 줘도 돼?”

“비비안은 많이 먹었어. 로즈 언니도 단 거 좋아하니까 주려고 남겨둔 거야.”

이렇게 예쁜 말만 골라서 하니 모두에게 귀염을 받는 거겠지.


“고마워, 비비안.”

비비안은 제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는 나를 빤히 쳐다보곤 이내 책을 내밀었다.

페이지를 세 장 정도 넘겼을까.

어디선가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오는 듯해 눈동자를 굴리자 꾸벅꾸벅 졸고 있는 비비안이 보였다.

조심스레 책을 덮는 사이, 앤이 디저트가 담긴 쟁반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아가씨, 디저트…….”

“쉿.”

내 옆에서 곤히 잠든 비비안을 발견한 앤이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왔다.


“비비안 아가씨, 아무래도 졸리셨나 보네요.”

“그러게. 졸려서 나한테 왔나 보네. 어머니는 지금 뭐 하고 계셔?”

“마님은 응접실에 계세요. 딜런 님이 오셨거든요.”

그래서 비비안이 날 찾아온 거구나.

비비안은 겁이 많은 편이라 자기 전까지 누군가 제 옆에 있어 주길 바랐다.

보통은 졸리면 올리비아나 케이든에게 투정을 부렸지만, 케이든은 요새 통 보이질 않고 올리비아마저 딜런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터라 나에게 온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아가씨.”

“응?”

“내일은 기사단 안 나가신다고 하셨죠?”

“그랬지.”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지금이라도 말을 바꿀까 고민하려는 찰나, 앤이 빙긋 웃어 보였다.


“그럼 내일은 꼭 드레스 맞추셔야 해요.”

드레스?

로즈벨리아가 엄청 귀찮아했던 그 드레스 맞추는 걸 해야 한다고?


“굳이 맞출 필요가 있을까? 대충 아무거나 입으면 안 돼?”

애써 퉁명스러운 말투로 대답한 나는 재빠르게 입가를 가렸다.

로즈벨리아는 드레스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나는 드레스를 고르는 일을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예쁜 드레스를 마음껏 입어볼 수 있다는데 싫어할 리가.

이전 삶에서도 꾸미는 일이라면 뭐든 진심으로 임했던 나였다.

이 얼굴에 이 몸매면 더욱더 제대로 꾸며줘야지.


“안 돼요. 곧 케이든 도련님 생일이잖아요.”

케이든 생일이라면…….

그러고 보니 원작에서도 조만간 윈터스 가문이 등장한다. 원작 속에서 데이지는 윈터스 가문의 초대를 받았지만 몸이 좋지 않아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었다.

그때 윈터스 가문이 초대장을 보낸 게, 케이든의 생일 파티에 참석해달라고 보낸 거였구나.


“그래서 제가 내일 마담을 불렀어요. 그러니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기사단에 나가고 그러시면 안 돼요.”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척했다.

기억 속 로즈벨리아는 늘 몸매를 가리는 드레스를 주로 입었는데, 이번엔 제대로 몸매를 살리는 드레스로 입어줘야지.

그나저나 데이지는 이번에도 파티에 참석하지 않으려나?


 

*



“아가씨, 윈터스 가문에서 초대장이 왔어요.”

“윈터스 가문? 어서 이리 가져와.”

데이지의 재촉에 소파 쪽으로 향하는 루시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여기요, 아가씨.”

초대장을 들여다보던 데이지의 눈이 일순 반짝이다가 금세 시들었다.


“날짜가 아직 꽤 남았네.”

“참석하실 건가요?”

“당연히 가야지. 여기 가면 로즈벨리아 님을 볼 수 있다는 거잖아?”

“그렇겠죠.”

데이지가 활짝 열어젖힌 초대장을 품에 꼭 안았다. 루시는 부쩍 생기가 도는 데이지의 얼굴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나는 그분을 꼭 다시 만나고 싶어. 아무리 생각해도 오라버니 혼자 가셔서 그분을 만나고 온 건 불공평해.”

“하지만 아가씨께서는 몸이 좋지 않으셔서…….”

“지금은 괜찮아졌는걸.”

광장에서 로즈벨리아를 만난 이후, 데이지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다소 음울하고 무기력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활력이 넘쳤다.

약하디약한 몸이 아직은 그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지금은 데이지가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의욕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공작가의 구성원 모두가 기뻐했다.


“그렇기야 하지만…….”

“게다가 오라버니는 그분을 집에 초대하지도 못했잖아.”

“하지만 아가씨께서도 그 기사님이 초대에 응하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셨잖아요.”

고개를 주억거린 데이지가 씩 웃어 보였다.


“오라버니가 외모는 그럴싸하잖아.”

“그럴싸한 정도가 아니시죠. 1황자님의 외모도 훌륭하다던데, 그분은 통 대외활동을 하질 않으시니 소문에 불과하고, 역시 리나트 님의 외모가 제국 내 최고가 아닐까요?”

두 손을 꼭 맞잡은 채 중얼거리는 루시의 목소리는 흐물흐물 녹아내릴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러웠다.


“혹 다른 여자들처럼 오라버니의 외모에 홀려서 승낙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아주 조금 기대를 하긴 했는데. 역시 그런 거에 현혹될 분은 아니셨던 거야.”

“그 미모가 통하지 않았다니 정말 바위처럼 우직한 분이신가 봐요.”

“루시, 그 비유는 적절치 못해. 오라버니의 외모도 로즈벨리아 님의 미모에는 결코 미치지 못하거든.”

루시는 이채가 감도는 데이지의 눈을 마주하곤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 눈빛, 아가씨가 그 기사님에 대한 찬양을 시작할 때의 그 눈빛인데?’

“저, 저번에 아가씨가 다 말씀해주셨어요. 수려한 외모에…….”

“그치? 실력도 출중하셔서 백색기사단 차기 단장감으로도 꼽히신다더라. 너무 멋있지 않니? 드레스를 입은 모습은 또 얼마나 아름다우실까?”

이미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은 얘기인지라, 루시는 그저 반복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로즈벨리아 님이라고 했던가. 그 기사님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데이지의 눈이 동경으로 반짝거렸다.

루시는 사실 그런 데이지가 싫지 않았다.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던 데이지보다는 생기 넘치는 모습이 훨씬 좋아 보였다.


“아가씨.”

“응?”

“요새 정말 생기가 넘치시는 거 아세요?”

“그래?”

“네. 컨디션도 아주 좋아 보이시고요.”

루시의 말을 가만히 되새기던 데이지가 돌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나 결심했어.”

“예? 무슨 결심을…….”

얼굴에 화색이 도는 데이지를 바라보는 루시의 눈동자가 속절없이 흔들렸다.


“내가 직접 만나야겠어.”

“누, 누구를요?”

데이지는 대답 대신 여느 때보다도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이렇게 가족 모두가 모여 식사를 하는 것도 오랜만이네요.”

나는 슬그머니 포크를 내려놓았다. 오늘따라 한껏 들떠 보이는 올리비아에게서 묘한 위화감이 느껴진 탓이었다.


“그렇군.”

헤르만이 포도주를 한 모금 들이켜며 대답했다. 올리비아는 그런 헤르만을 힐긋 보더니, 돌연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로즈.”

“네, 어머니.”

“오늘 마담을 불렀다던데.”

“곧 케이든의 생일이라, 그때 입을 드레스를 골랐어요.”

“정말 잘했구나.”

올리비아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같이 부드럽고 다정했다. 거기에 늘 잔잔한 미소까지 머금고 있으니, 그야말로 자애로운 어머니의 표본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저러니 다들 올리비아가 로즈벨리아를 진정으로 아낀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비비안이 같이 골랐어요.”

맞은편에 앉아 있던 비비안이 불쑥 말했다.


“비비안이 같이 골랐어?”

비비안에게로 시선을 고정한 헤르만이 다정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내 쪽으로는 일절 눈길도 주지 않더니, 저런 목소리도 낼 줄 아는 사람이었어?

나는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헛웃음을 애써 삼켰다.

일찍 돌아가신 엄마, 새 가정을 꾸린 아버지와 새어머니. 그 속에서 그들과 영원히 섞일 수 없는 불순물 같았던 나.

어쩌면 이전 삶의 내 모습과 로즈벨리아의 처지가 비슷해 더욱더 감정이입이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네, 아주 예쁜 드레스예요. 드레스보다 언니가 더 예쁘지만요.”

“드레스를 입은 누님의 모습을 보면 모두가 시선을 뺏기겠군요. 아마 수도 전체가 들썩일 겁니다.”

케이든까지 나에 대한 칭찬을 입에 올리자, 찰나 올리비아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그러고 보니 황후 폐하께서도…….”

“황후 폐하를 만났소?”

“네. 얼마 전에 황궁에 다녀왔는데 케이든의 생일 파티에 2황자 전하를 보내 자리를 빛내주신다고 하셨어요.”

화두가 단숨에 옮겨가자, 언제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냐는 듯 올리비아의 만면에 미소가 번졌다.


“케이든을 위해 그렇게까지 해주신다니 정말 감사한 일이오.”

“그나저나 슬슬 로즈의 혼처를 알아봐야 하지 않겠어요?”

혼처?

가뜩이나 기사단에서 있었던 일로 결혼의 ‘결’자만 들어도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인데.


“혼처라……. 미처 생각지 못했군.”

“안 그래도 제가 딜런 오라버니에게 부탁해서 좋은 혼처를…….”

“저는 결혼 생각 없습니다.”

헤르만의 두 눈이 처음으로 내 쪽을 향했다. 금색의 눈동자는 케이든과 비비안이 지닌 눈동자와 똑 닮아 있었다.

어디 그뿐이던가. 케이든과는 검은빛의 머리 색까지 판박이였다.

누가 봐도 영락없는 부자지간이네.

반면에 로즈벨리아와 헤르만은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지금 당장은 결혼 생각 없습니다.”

“어머, 로즈. 결혼은 미룬다고 좋은 게 아니란다. 나중에는 결혼하고 싶어도 마땅한 혼처를 구하기 어려워질 수 있어. 물론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 테지만, 네가 한 살이라도 어릴 때 혼처를 구하는 게…….”

올리비아의 조곤조곤한 말소리 속에 곡선이 섞여들었다. 아주 제대로 신이 나셨네.


“상관없습니다. 결혼을 꼭 하고 싶은 것도 아니라서요.”

“어머니, 아버지. 로즈 누님은 아직 결혼할 생각이 없으신 거 같은데, 혼처는 천천히 알아봐도 되지 않을까요?”

보다 못한 케이든이 한마디 거들자, 올리비아가 손을 부드럽게 내저어 보였다.


“케이든, 이건 로즈를 위한 거란다. 로즈 네가 기사단 일을 중요시하는 건 알지만 여자에게는 좋은 남편이 생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단다.”

“저는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결혼 생각 없습니다.”

나는 웃음기를 말끔히 지워낸 채, 올리비아를 똑바로 마주했다. 내가 강경한 태도를 보이자 올리비아는 살짝 당황한 눈치였다.

올리비아의 속셈은 불 보듯 뻔했다. 로즈벨리아가 여태 갈등을 피하려는 쪽이었으니 이번에도 분위기를 몰아서 나를 휘두를 작정이었겠지.

나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한 채,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 어머니 멋대로 진행하지 마세요.”

찰나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침묵을 깬 건, 노기 어린 헤르만의 목소리였다.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로즈벨리아.”

“…….”

“너는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는구나. 올리비아가 너를 이렇게나 위하는데, 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삐딱하게 굴 셈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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