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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답답한 마음 (13/54)


13화. 답답한 마음
2023.03.16.



“아니, 나는…….”

붙들린 손목 위로 홧홧한 감각이 전해졌다. 그 열기 탓인지 잠시 머릿속이 새하얬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머뭇거리는 사이, 이안이 먼저 말을 꺼냈다.


“실언이었습니다.”

어딘가 조급해 보이는 얼굴 위로 찰나였지만 딱딱하게 굳어 있던 이안의 표정이 겹쳐졌다. 실언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는 그 얼굴이 마음에 걸렸다.

혹시 불쾌했던 건가?

하긴 황자님 얼굴인데 내가 너무 스스럼없이 만지긴 했지.


“미안해. 불쾌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미처 못했어.”

“사과하지 마십시오.”

“아니야, 이건 내가…….”

“불쾌……하지 않았습니다.”

제 뺨을 더듬거리는 이안의 얼굴은 어딘가 얼떨떨해 보였다. 그는 다소 혼란스러운 듯 눈을 여러 차례 깜빡이고 나서야 내게 시선을 두었다.


“상처는 괜찮아?”

“괜찮습니다.”

눈이 마주치자 이안이 교묘하게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너울대며 흔들리는 긴 속눈썹은 조각 같은 그의 얼굴 위로 일순간 음영을 만들어냈다.

저 얼굴이 어딜 봐서 인상이 흐릿하단 거야?

처연한 분위기까지 더해진 이안의 얼굴은 잘생겼다고 말하기도 입이 아플 정도였다.

혹시 자기 객관화가 안 되는 타입인가?


“그리고 네 인상 전혀 흐릿하지 않아. 처음에 헷갈렸던 건, 내 기억에 좀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거고…….”

“저도 제가 이렇게 뒤끝이 긴 줄 몰랐습니다. 아무래도 선배님에게만큼은 깊은 인상을 남긴 후배가 되고 싶은가 봅니다.”

하기야 이안은 대련에 누구보다 진심이고, 나와 계속 대련하길 원했다.

그러니 더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겠지.


“그 뒤로는 다른 누군가와 너를 헷갈린 적 없어.”

“그렇다면 어째서 저만…….”

성마른 표정으로 말을 이어가던 이안이 돌연 입을 다물었다. 연무장 문이 벌컥 열린 탓이었다.


“로즈?”

모습을 드러낸 건 에드윈이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사이, 망토 자락을 휘날리며 다가온 에드윈이 가늘어진 눈초리로 나와 이안을 번갈아 보았다.


“너희 여기서 뭐해?”

“대련 중이었어.”

달리 둘러댈 말도 없어 솔직히 털어놓자, 에드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련을 했다고? 클라인이랑?”

“너 오늘은 숙소에서 자려는 거지, 에드?”

“그렇긴 한데…….”

발치에 떨어진 검을 주워 검집에 넣은 나는 곧장 에드윈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럼 가면서 얘기하자. 우린 먼저 갈게, 신입.”

“잠깐, 로즈. 망토 챙겨야지.”

에드윈이 건넨 망토를 받아든 나는 우두커니 서 있는 이안에게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상처 치료 꼭 하고.”

이안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한 뒤, 연무장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대련이라니? 너 단원들이랑 대련 안 하잖아.”

“그게…….”

내 뒤를 따라 서둘러 바깥으로 나온 에드윈이 빨리 말해보라는 듯 허공에 손을 내저었다.

파닥거리는 몸짓에 짧게 웃음을 터뜨린 나는 에드윈에게 그간의 일을 설명했다.


“아아, 그러니까 고백한 당사자는 따로 있었고 클라인은 너한테 대련을 요청한 건데 그걸 고백한 걸로 오해했다고?”

제자리에 멈춰 선 에드윈이 배를 잡고 깔깔거렸다.

내가 너 그런 반응 보일 줄 알았어.


“시끄러워, 에드. 여기 숙소 앞이야.”

“나한테 왜 말 안 했어?”

“말할 타이밍을 놓쳤어.”

에드윈이 그게 다는 아닌 거 같은데? 하는 눈빛을 보내며 코를 찡긋거렸다.


“그래, 민망해서 바로 말 못 했어. 됐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턱을 매만지던 에드윈의 눈에 별안간 이채가 감돌았다.


“클라인 실력은 괜찮은가 보네.”

“어?”

“단순히 클라인을 오해한 것 때문에 대련을 받아준 건 아닐 거 아냐.”

그거야 그렇지.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객관적으로 봐도 클라인의 실력은 우리 기사단 내에서도 상위권이야.”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나도 분발해야겠는데?”

무어라 대답하려던 나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에드윈을 앞에 두고, 네 실력보다 이안의 실력이 더 우위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침묵의 의미를 알아챘는지 뒤로 걷던 에드윈이 장난스레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근데 어째 걸음걸이가 영 시원치 않았다. 왼쪽 발을 디딜 때 찰나 멈칫하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너 걷는 게 왜 그래?”

“역시 로즈 네 눈은 못 속인다니까.”

“다친 거야?”

“살짝 삐끗한 거야.”

지난 마수 토벌에서 에드윈은 마수에게 당해 왼쪽 발목을 다쳤었다.

다행히 토벌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라 치료가 늦지 않았지만, 두 달을 꼬박 쉬면서 회복에만 전념해야 했다.

혹시 그때 다친 발목의 통증이 도진 건 아니겠지?


“곧 토벌이니까 무리하지 마.”

“네네, 알겠습니다. 그럼 난 들어간다.”

 

 

*



“황자님, 오늘은 늦으셨네요.”

“아직 안 가고 있었어?”

“황자님이 내던져 놓은 일을 누군가는 처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류 더미 위로 흘긋 시선을 둔 네이슨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그렇네.”

푹 꺼진 눈자위를 어루만지던 네이슨이 황당하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그게 답니까? 이럴 땐 격려의 말씀이라도 해주셔야…….”

단원복 단추를 풀던 이안의 손짓이 멎었다. 왜인지 네이슨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듯해, 고개를 불쑥 들었다.


“깜짝이야.”

이안의 예상대로, 책장 앞에 있던 네이슨은 그의 코앞에 있었다.


“전혀 놀라지 않으셨으면서 또 그러신다. 그나저나 얼굴이 왜 그 모양이십니까?”

“내 얼굴이 어디가 어때서?”

어찌나 뻔뻔하고 태연한 낯빛인지, 네이슨은 순간 또렷하게 보이는 생채기가 제 눈에만 보이는 건지 의심할 뻔했다.


“얼굴에 상처가 생기신 거 아닙니까? 지금 당장 의원을 부르겠습니다!”

“네이슨.”

이안의 나지막한 부름에 허둥대던 네이슨이 그를 돌아보았다.


“네, 황자님. 분부만 하십시오.”

“말만 요란할 뿐 전혀 급해 보이지 않아, 너.”

어느새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네이슨이 싱긋 웃어 보였다.


“티가 많이 났습니까?”

“그리고 이건 대련하다가 조금 다친 거니까 호들갑 떨 거 없어.”

“황자님 얼굴에 상처를 내다니, 기사단에 엄청난 실력자가 있는 모양이군요.”

“있지. 대단한 실력자.”

네이슨은 곧바로 푸근한 인상에 풍채 좋은 가브리엘을 떠올렸다. 제 짐작대로 이안이 존재감을 보이고 싶어 하는 이는 가브리엘 단장이 맞는 듯했다.


‘역시 가브리엘 단장님은 명성대로 뛰어나신 분이구나.’

“정말 강하신가 보네요.”

“……강한 사람이지.”

로즈벨리아와의 대련을 떠올리자 절로 웃음이 배어났다. 수련용 목검보다 진검을 맞대는 감각이 몇 배 더 생생했다.

그녀와 검을 맞댄 순간, 긴장감과 기묘한 전율이 전신을 훑어내렸다.

무언가에 이렇게 몰입할 수 있는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

대련의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게 이깟 상처라면 오히려 약소했다.


“그래도 치료는 하셔야죠.”

이안은 볼 위로 손을 올리려다 멈칫했다. 제 얼굴을 서슴없이 만지던 로즈벨리아의 손이 떠오른 탓이었다.

사실 로즈벨리아의 손이 제 뺨을 더듬었을 때, 이안은 적잖이 놀랐었다.

검을 잡은 사람의 손이라기에는 너무 여리고 부드러워서.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검을 꾸준히 쥐는 사람의 손이 굳은살도 없이 부드러울 수 있나?’

“그게 가능하다고?”

“예?”

“아니야.”

혼란스러운 듯 이마를 매만지던 이안이 돌연 미간을 찡그렸다.


‘근데 왜 화가 났었지?’

이유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찰나 그가 느낀 건, 분명 언짢고 답답한 감정이었다.

이안은 제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손도 엄청 작았지.’

일전에 광장에서 그녀의 손이 작다는 건 인지했는데, 왜인지 그 자그마한 손이 계속 떠올랐다.


“한 이 정도였나.”

손을 최대한 말아쥐자 로즈벨리아의 손과 비슷한 크기가 되었다. 새삼 작은 크기에 이안의 눈동자가 작게 일렁거렸다.

손도, 몸집도 그렇게 자그마한 사람이 존재감만은 그 누구보다도 크다는 게 새삼 신기하고 경이로웠다.


“황자님, 아프신 겁니까?”

‘아픈 거야?’

걱정하는 기색이 가득했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자 일순간 가슴이 바짝 조여오는 듯했다. 단원복 단추를 풀어헤쳐도 목 끝까지 차오른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남은 서류는 내 책상에 올려놓고 그만 가 봐, 네이슨.”

천천히 숨을 고르며 가슴께를 꾹 누르자,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해졌다.


“하지만 치료를……. 그럼 약만 가져다 놓고 가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무거운 눈꺼풀을 지그시 누르던 이안은 네이슨의 발소리가 멀어지길 기다렸다는 듯 의자에 앉았다. 그리곤 네이슨이 정리하던 서류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에드?”

서류 속에서 에드라는 이름을 발견한 이안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너 오늘은 숙소에서 자려는 거지, 에드?’

에드윈 홀튼과 로즈벨리아 윈터스.

로즈벨리아와 대련을 하기 위해 그녀와 관련된 정보를 알아볼 때, 가장 먼저 알게 된 사실이 바로 두 사람이 친한 사이라는 것이었다.


‘그럼 우리 먼저 갈게, 신입.’

“우리, 라고…….”

어깨가 닿을 정도로 가깝게 붙어 가던 두 사람의 뒷모습을 떠올리자 별안간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사소하고 약한 힘이 실렸을 뿐인데, 손에 쥐고 있던 펜이 부러져 있었다.


“이게 왜 부러졌지? 오래된 펜인가?”

얼떨떨한 눈으로 두 동강 난 펜을 내려다보던 이안은 이내 서랍을 뒤적여 새 펜을 꺼내 들었다.

*

응접실 안은 제법 훈기가 돌았다. 벽난로 속에서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장작 소리가 이렇게나 듣기 좋았던가.

절로 콧노래가 나올 것만 같아, 올리비아는 몇 번이나 호흡을 골라야 했다.


“로즈벨리아에게 말은 했니?”

“좋은 짝을 만나는 건 로즈에게도 축복이라고 생각하는데, 오라버니는 저와 생각이 다르신가요?”

“그건 아니지만…….”

딜런이 말끝을 흐리자 올리비아가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리며 웃었다. 그녀는 여유로운 자태로 딜런에게 건네받은 서류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역시 오라버니는 저와 생각이 같을 줄 알았어요. 그나저나 제국에 괜찮은 남편감이 꽤 있군요.”

“그렇지?”

딜런이 옅은 미소를 보이며 되물었다. 로즈벨리아의 혼처를 알아봐달라는 올리비아의 부탁에 신랑감을 추려 온 참이었다.

맨 앞장에 현 제국에서 최고의 신랑감으로 뽑히는 리나트 일라이저를 필두로 신랑감으로 좋은 후보들을 포진해두었다.

뒷장으로 갈수록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혼처일 텐데 서류를 넘기는 올리비아의 손길은 거침없었다.


“제가 보기엔 이 사람이 적당한 거 같네요.”

딜런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올리비아가 고른 건, 맨 뒷장에 넣어둔 자작가의 장남이었다.


“더 좋은 신랑감도 많은데 왜 하필 그 사람을…….”

“그래요? 제가 보기에는 이 남자가 괜찮을 거 같은데요.”

초상화를 유심히 들여다보던 올리비아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굳이 이 남자를 고른 이유가 있니?”

“이 남자가 왜요?”

이름이 데이비드 콜린이었던가. 인물은 제법 반반하지만…….


“데이비드 콜린은 여성 편력이 심하다는 소문이 있어.”

서류에도 그렇게 덧붙여놓았으니 분명 알고서 고른 것이었다.


“인물이 괜찮아서 그런 소문이 돈 걸 수도 있잖아요? 데이비드 콜린을 흠모하는 여성들이 많아, 경쟁자를 제거하려고 그런 소문을 악의적으로 퍼뜨린 걸 수도 있고요.”

“……올리비아,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니?”

싱긋 웃고 있던 올리비아의 눈매가 희미하게 굳어졌다.


“어머, 오라버니.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제가 로즈벨리아에게 구태여 안 좋은 일을 하는 줄 알겠어요.”

“내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터무니없는 소문은 아닌 듯하던데.”

그래도 자작가의 장남이고 아직 미혼이라 넣어둔 것이었다. 앞장에 좋은 혼처들이 많은데 올리비아가 맨 뒷장에 넣어둔 데이비드를 고를 줄이야.


“사실이어도 나쁠 것 같진 않은데요?”

“올리비아.”

“로즈에게는 능숙한 남성이 어울릴 거 같아요. 여성을 많이 만나본 자라면 로즈를 잘 이끌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넣지 말걸.’

딜런은 뒤늦게 후회했지만 올리비아는 이미 마음을 굳힌 듯했다.


“이 사람을 케이든의 생일 파티에 꼭 참석시켜주세요, 오라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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