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아무에게나 이러십니까?
(12/54)
12화. 아무에게나 이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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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아무에게나 이러십니까?
2023.03.13.
“일전에 광장에서 제 동생을 구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혹 기억하시는지요?”
“네, 기억은 하는데…….”
“그 일에 대한 감사 인사를 전하고자 찾아왔습니다.”
감사 인사를 이렇게까지 요란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요? 라는 말이 입안에서 뱅뱅 맴돌았다.
쏟아지는 시선 탓에 내 얼굴이 다 따가울 지경인데, 정작 소란을 일으킨 당사자가 저렇게나 태연한 낯빛이라니.
“저기, 일단 일어나시는 게……. 보는 눈들도 있고.”
그제야 내가 곤란해하는 걸 눈치챈 건지 리나트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제가 그 부분을 미처 생각지 못했군요. 제 여동생이 직접 감사 인사를 전하고자 했는데, 몸이 좋지 않아 제가 대신 왔습니다.”
“몸이 많이 안 좋으신 건가요?”
좀처럼 멎지 않았던 데이지의 기침을 떠올리자 입안이 바싹 말라왔다.
원작대로라면 데이지에게 당장 무슨 일이 생기지 않겠지만, 원작을 비틀고 있는 터라 미래를 장담할 순 없었다.
“그건 아닙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행이네요.”
아, 기억났다.
이 남자를 만난 곳은 라일리 가문, 그러니까 현 황후의 친정 가문이자 로즈벨리아의 새어머니인 올리비아의 친정 가문인 라일리 가문에서 주최한 연회였다.
케이든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리나트가 다가왔고, 짧게 통성명을 한 게 기억의 전부였다.
“동생에게 자초지종을 전해 듣고 모두가 윈터스 영애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부모님께서도 영애를 직접 뵙고 감사 인사를 전하고자 하십니다. 조만간 정식으로 초대해…….”
정식으로 초대? 일라이저 가문에서 나를?
“아뇨, 저는 기사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렇게 찾아와서 인사를 전해주신 것만으로도 제게는 과분합니다.”
“……그렇군요.”
리나트는 은은한 미소를 지어 보일 뿐, 재차 권유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그때 일라이저 영애에게 위해를 가했던 이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그자들은 이 제국에 두 번 다시 발을 붙이지 못할 겁니다.”
리나트가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전히 웃는 낯이었지만 눈빛만큼은 매서웠다.
반응을 보아하니 원작이랑 똑같이 움직인 건가?
원작에서도 데이지가 광장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놓자 리나트는 데이지를 겁박했던 자들을 수호기사단 관할로 이관해 직접 처벌하겠다고 나섰었다.
“그럼 영애께도 안부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조만간 또 뵙겠습니다.”
의미심장한 말을 던져두고 리나트는 홀연히 기사단을 떠났다.
초대는 분명히 거절했는데 조만간 또 보자는 건 무슨 의미지?
인사치레로 하는 말인가? 다음에 밥 한번 먹자, 같은?
“저 사람, 리나트 일라이저 아니야?”
곁에 다가온 에드윈이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맞아.”
벌어진 잇새로 옅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마치 혹 떼려다 혹 붙인 거 같은 찝찝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데이지가 자신을 구해준 이안을 보기 위해 몰래 기사단에 찾아오는 건 초반부의 메인 에피소드였다.
여차하면 데이지가 기사단에 찾아올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는데, 리나트가 대신 나설 거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저 사람이 왜 너한테……. 설마 청혼이라도 받은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근데 분위기가 꼭…….”
너랑 데이지를 엮어주려다가 이렇게 된 거야, 라는 말 대신 눈으로 에드윈을 쏘아본 나는 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날 광장에서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야?”
“그래.”
“진짜 나쁜 놈들이네. 나한테 걸렸으면 뼈도 못 추렸을 텐데.”
에드윈 네가 그 나쁜 놈들을 멋있게 처리하고 데이지를 구해줬다면 아주 완벽한…….
나는 별안간 사고를 멈추었다. 이미 지난 일에 연연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호시탐탐 타오를 기회만 엿보는 미련의 불씨를 꾹꾹 밀어 넣은 나는 애써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가령, 아까부터 코를 찔러오는 이 고소한 냄새의 정체는 무엇일까 하는.
“에드윈.”
“응?”
“밥이나 먹으러 가자.”
“그럴까?”
기사단 식당 근처에 다다르자 옥수수 수프 냄새가 코를 찔러 왔다.
냄새에 홀린 듯 달려가는 에드윈의 뒤를 따라 식당에 들어간 나는 여느 때와는 다른 분위기에 잠시 멈춰 섰다. 늘 소란스럽던 내부가 찰나 소름이 끼칠 정도로 고요한 탓이었다.
이 분위기 뭐지? 다들 내 얘기라도 하고 있었던 건가?
내 얼굴 위로 은근하게 쏟아지는 시선들을 감지한 나는 태연한 척 자리에 앉았다. 악의라곤 없는, 호기심만이 어린 눈길들이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이전 삶에서는 이보다 더한 시선도 받아 봤다고.
“궁금한 게 있으면 와서 직접 물어볼 것이지. 다들 왜 저렇게 힐끔힐끔 쳐다보는 거야?”
에드윈의 커다란 목소리에 모여들었던 시선들이 차츰 분산되는 게 느껴졌다.
“됐어. 그만해.”
“내가 가서 무슨 일이었는지 말해줄까?”
나는 금방이라도 몸을 일으킬 것처럼 어깨를 팔딱거리는 에드윈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그 사이 식당에 상주하는 하인 중 하나가 빵과 수프, 샐러드를 곁들인 훈제 닭고기를 가져다주었다.
“됐어. 뜬 소문은 가라앉기 마련이니까.”
“하기야 그 사람이 다시 찾아올 일도 없을 테고…….”
푹신한 빵을 쥔 손이 찰나 가늘게 떨렸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하얀 김이 올라오는 수프에 빵을 찍었다.
다시 찾아올 일은 없……겠지?
*
“로즈, 넌 연무장으로 갈 거지?”
“너는?”
“나는 오늘……. 부단장님, 안녕하십니까.”
부단장?
에드윈의 시선이 멈춘 곳에는 정말로 부단장 파비안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부단장님.”
로즈벨리아 기억 속에서도 깐깐하고 예민해 보이더라니.
그가 입고 있는 단원복은 구김 하나 발견할 수 없었고, 그 위로 걸친 백색의 망토는 갓 내린 눈처럼 새하얬다.
“로즈벨리아, 따라오도록.”
“따르겠습니다.”
눈빛으로나마 무운을 빌어주는 에드윈을 남겨둔 채 파비안을 뒤따랐다.
본관 부단장실로 들어서자, 분주히 서류를 정리하던 파비안의 부관이 힐긋거리는 게 느껴졌다.
뭐지? 이 싸한 기분은?
“오늘 소란이 있었다던데.”
“소란이요?”
“내가 잘못 전해 들은 건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파비안이 큼큼거리며 뒷말을 이었다.
“곧 결혼한다고 하던데.”
주어가 생략된 물음에 찰나 사고회로가 더뎌지는 게 느껴졌다.
“누구요?”
소란이 있었냐고 물어놓고는 대뜸 누가 결혼한다는…….
잠깐, 설마 지금 나보고 결혼하냐고 물은 건가?
“설마 저요?”
파비안은 아무런 대꾸 없이 자신의 턱수염을 매만졌다. 침묵이 뜻하는 바는 곧 긍정이리라.
“아니, 누가 그런 터무니없는 소문을…….”
황당해서 말이 채 나오지 않았다. 내가 실소를 터뜨리자, 줄곧 내 표정을 살피던 파비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터무니없는 소문이라고?”
“어제 광장에 나갔다가 일라이저 가문의 영애께 도움을 드렸는데, 그 일로 감사 인사를 전하고자 수호기사단 부단장께서 오셨습니다.”
파비안의 한쪽 눈썹을 찡그린 채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마를 매만지는 손길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게 다야?”
“네. 그게 답니다.”
파비안이 목청을 가다듬자, 그의 부관인 필립이 서류 더미 속에 고개를 푹 파묻는 게 보였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어디선가 소문을 듣고 온 필립이 그걸 부단장에게 찌른 모양이었다.
“그럼 가 봐.”
파비안은 못내 아쉬운 얼굴로 손을 까딱여 보였다.
줄곧 로즈벨리아를 못마땅해하더니만 꼬투리를 잡으려다가 못 잡아서 실망했나 보네.
“투명하다, 투명해.”
혼잣말을 읊조리며 연무장으로 향하는데, 이번엔 시몬이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로즈벨리아 선배님.”
“그래, 시몬. 무슨 일이야?”
시몬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내게 묻고 싶은 게 많은 얼굴이었다.
파비안처럼 곧 결혼하냐, 뭐 이런 시답잖은 말을 물어보려는 거겠지.
“기사단을 떠난다는 소문이 사실인가요?”
“뭐? 누가 그런 소리를 해?”
“곧 결혼하셔서 기사단을 떠나신다고…….”
“소문이 벌써 그렇게까지 확장됐단 말이야?”
나는 두통이 이는 듯한 머리를 꾹꾹 눌렀다. 고작 호기심 어린 시선에 불과하다고 흘려 넘길 게 아니었다.
에드윈의 눈에도 리나트가 내게 청혼하는 것처럼 보였다면, 다른 기사들의 눈에도 비슷하게 비쳤을 터였다.
내막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그 장면 자체가 재밌는 가십거리가 됐을 테고.
“……아닌 거죠?”
“그래, 아니야.”
나는 단호하게 대꾸했다. 내내 풀이 죽어있던 시몬의 얼굴에 생기가 돈 건 그때였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선배님과 함께 마수 토벌을 떠나는 게 목표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선배님이 기사단을 그만둔다는, 그런 어처구니없고 터무니없는 소문이 돌아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감정이 격해진 건지 나를 보는 시몬의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저기, 시몬? 울고 싶은 건 네가 아니라 나거든?
“많이 놀랐겠네. 그럴 일은 절대 없다고 전해줘.”
나는 코를 훌쩍이는 시몬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여주었다.
“누구한테요?”
“너한테 그 말도 안 되는 소문을 퍼뜨린 사람이 있을 거 아냐.”
시몬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겠습니다. 저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선배님.”
아무래도 이 소문, 가만히 두면 안 되겠는데?
*
거친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차분히 호흡을 고르던 나는 땀으로 얼룩진 목검 손잡이를 내려다보았다.
얼마나 이러고 있었던 거지?
창밖을 내다보니 붉게 얼룩진 하늘이 보였다. 연무장에 들어오기 전에, 해가 중천에 떠 있었으니 족히 몇 시간은 수련한 거 같은데 몸은 여전히 무거웠다.
지난번에 이안과 대련했을 때처럼 몸이 가벼워지면 복잡한 머릿속도 한결 개운해질 것 같았는데…….
“선배님.”
환청이 들리나? 왜 이안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 같지?
고개를 갸웃거린 나는 목검을 들고 보관함 앞으로 걸어갔다. 환청이 다시 들려온 건 그때였다.
“선배님?”
연무장 바닥을 울리는 이 발소리까지 환청일 리는 없지.
그제야 연무장 입구를 돌아본 내 눈에 비친 건, 다소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이안이었다.
“신입, 너였구나. 여태 기사단에 있었어?”
“그러는 선배님은요?”
“나는……. 간만에 수련을 열심히 하느라…….”
말꼬리를 늘어뜨리며 곁눈질로 이안을 보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낮에 있었던 일 때문입니까?”
“꼭 그 일 때문만은 아니고.”
여러모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내가 아는 원작 내용과 내가 비틀어버린 것들이 얽혀 혼란스러웠다.
나의 길을 묵묵히 나아가면 되는 건데, 내가 나아갈 길이라는 게 뭔지 명확히 알 수 없어 두려웠다.
어쩌면 나는 내심 원작에 기대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차라리 원작을 아예 모르는 편이 나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당장 내일 일을 알 수 없고, 미래는 불확실한 게 당연한 건데 이따금 숨이 막혀오는 것도 같았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흠칫 놀란 내가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푸른색이었다. 마치 심연과도 같은 짙은 빛깔의 눈동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뭘?”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내 마음을 들킨 것만 같아, 절로 마른침이 삼켜졌다.
“선배님이 결혼해서 기사단을 떠난다는 게 터무니없는 소문이라는 걸, 다들 알게 됐으니까요.”
아아, 그 얘기를 한 거였구나.
“다행이네.”
기사단 내에서 발이 넓은 편인 에드윈과 루카스를 동원해 소문을 진상을 퍼뜨린 보람이 있었다.
그날 일의 진상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으면 식당 뒤편의 7연무장으로 오란 말도 덧붙여달라고 했는데, 아쉽게도 이곳을 찾아온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선배님.”
“어?”
“대련…… 해드릴까요?”
조심스러운 물음에 설핏 웃음이 나왔다. 내 기분이 썩 좋지 않다는 것만큼은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좋아.”
“진검으로 하는 건 어떠십니까.”
“후회할 텐데?”
“그럴 일은 없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이안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았다. 이안의 도발에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이내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 한 발 가까이 다가오며 검 끝을 맞붙였다.
목검으로 대련했을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날이 선 진검이 맞붙을 때마다 감각이 배로 예민해졌다.
심장을 바짝 조여오는 듯한 긴장감에 문득 원작 결말이 떠올랐다.
원작 속에서 로즈벨리아와 이안도 이렇게 검을 겨누었을까.
그 생각이 스친 찰나, 손에 힘이 가해지는 게 느껴졌다.
아차 하는 사이, 내 검과 맞붙은 이안의 검이 튕겨 나갔다. 챙그랑, 하는 소리가 연무장 내부를 시끄럽게 울렸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하려는 듯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이안이 제 얼굴 위로 손을 올렸다.
설마 다친 건가?
화들짝 놀란 내가 검을 던지고 곧장 이안의 앞으로 다가섰다.
“괜찮아? 어디 봐.”
“괜찮습…….”
나는 이안의 손을 치우고 그의 뺨을 살폈다. 이안의 검이 날아가면서 볼을 살짝 스친 모양이었다.
아주 미세한 상처였지만, 잘 벼린 검이라 그런지 피가 살짝 배어나고 있었다.
“신입, 너 피 나는데?”
내가 얼굴을 잡아당기자, 이안이 순식간에 몸을 뒤로 뺐다. 그 타이밍에 이안이 몸을 뒤로 뺄 줄은 몰라, 어어 하던 내가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부딪쳤다.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드니 한쪽 눈썹을 살짝 일그러뜨리고 있는 이안의 얼굴이 보였다.
“아픈 거야?”
뺨 위로 재차 손을 올리려 하는 찰나, 그가 내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원래 아무에게나 이러십니까?”
“어?”
“아니면 인상이 흐릿한 후배라서 이렇게 스스럼없으신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