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리나트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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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리나트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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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리나트의 등장
2023.03.09.
“예?”
네이슨은 제 두 귀를 의심했다.
이안 클라인 마르티네스.
황자라는 신분을 차치하더라도 존재감이 넘쳐나는 사람이었다.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한 외모에 키도 크고, 체격까지 좋아서…….
‘어디에 내놔도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사람인데?’
“존재감이 넘치셔서 문제 아닙니까? 그래서 대외활동을 하지 않으시는데도 황후께서 황자님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네이슨이 아차 하는 얼굴로 말을 멈추었다. 다행히 이안의 표정에 별다른 변화가 보이지 않아 조심스레 뒷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그래, 충분히 알아들었어.”
“근데 그건 갑자기 왜 물으신 겁니까? 혹시 누가 황자님께 존재감이 없다느니 그런 망발을 한 겁니까?”
“그런 건 아닌데.”
손끝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던 이안이 미간을 매만졌다.
‘시몬은 시몬인데, 나는 왜 신입이지?’
문득 떠오른 그 의문을 좀처럼 떨칠 수 없었다. 로즈벨리아가 대련을 요청한 자신과 그녀에게 고백한 시몬과 자신을 헷갈렸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몬은 분명 고백을 거절당했고, 자신은 대련을 승낙받아 그녀와 무려 대련하는 사이였다.
‘보통은 검을 나누는 사이가 더 존재감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닌가?’
“설마 2황자님께서 또 황자님의 심기를 건드리신 겁니까?”
실소를 터뜨린 이안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네이슨, 에녹처럼 다루기 편한 사람도 없어.”
1황자인 이안은 황비의 소생이었고, 2황자인 에녹은 황후의 소생이었다.
이안의 모친인 바이올렛 블레이튼은 황후보다 먼저 자식을 낳았고, 그 때문에 이안은 태어난 순간부터 황후 세력의 견제를 받아왔다.
에녹이 태어나고, 바이올렛이 죽은 뒤로는 방치에 가까운 삶을 살아왔지만 그것이야말로 이안이 진심으로 바라는 바였다. 줄곧 칩거와도 같은 생활을 이어온 것 또한 그의 의지였다.
‘차라리 에녹처럼 어떤 생각을 하는지 빤히 보이는 사람이라면 좋았겠지만…….’
로즈벨리아는 좀처럼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가브리엘을 동경해서 들어간 백색 기사단이었는데, 이안은 전야제에서 로즈벨리아와 검을 맞대고 처음으로 전율을 느꼈다.
그녀에게 대련을 요청한 건 그 감각을 한 번 더 느껴보고 싶어서였다.
지금은 그녀의 유일한 대련 상대가 되었고, 그녀와 꾸준히 검을 맞대는 걸로 목표 달성은 한 셈이었다.
한데 왜 자꾸 시답잖은 일에 신경이 쓰이는 건지 그조차도 알 수 없었다.
‘아니? 전혀 불편하지 않은데.’
전야제에서 대화를 나눴을 땐 차갑고 무덤덤한 성격인 줄 알았는데, 로즈벨리아는 의외로 표정이 다양한 사람이었다. 이따금 아이처럼 웃기도 하고.
‘광장은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각별히 주의하도록 해.’
거기에 박력도 있고.
로즈벨리아가 광장에서 자신을 두 번이나 구해준 일을 떠올린 이안이 제 입매를 가렸다. 손바닥 안에서 입꼬리가 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다소 생경한 감각에 이안이 저도 모르게 손끝을 움츠렸을 때였다.
“그럼 대체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말조심해, 네이슨.”
서늘한 음성에 당황한 네이슨이 억울하다는 듯 눈썹을 아래로 축 늘어뜨렸다.
“아니, 저는 지금 황자님 편을 들어드린 건데요?”
“나한테 존재감이 없다느니 그런 말을 하진 않았어. 그냥 내가…….”
변명의 말을 늘어놓으려던 이안이 돌연 입을 다물었다.
‘왜 내가 이런 거에 연연하고 있지?’
잇새로 한숨이 흩어졌다.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기는 이안의 눈동자에 혼란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알겠습니다. 제가 말실수를 했네요.”
네이슨은 자신이 눈치 하나는 제국에서 가장 빠르다고 자부했다.
이안을 저렇게나 동요하게 만드는 상대라면 분명 중요한 사람일 테고, 아마도 그 사람에게 자신이 존재감이 없는 것 같아 고민하는 것이리라.
‘가브리엘 단장님이 황자님에게 신경을 안 써주시나?’
“그래, 그 사람에 대한 험담은 다신 입에 담지 마.”
“어차피 저는 그분이 누군지도 모릅니다만 다신 험담하지 않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의 손에 들린 건 로즈벨리아에게 받아 온 사탕이었다.
“그건 뭡니까?”
“……있어. 그런 게.”
먹을 것도 아니면서 대체 왜 받아온 건지.
‘얼른 먹어 봐, 시몬.’
‘신입 너는 안 먹는다고…….’
아까 그 상황을 떠올리자마자 짜증이 불쑥 치솟았다. 이안은 주먹을 쥐었다가 펴길 반복했다. 그 안에서 데구루루 굴러다니는 사탕이 성가셨다.
성가시니 확 버릴까.
그 생각을 떠올리기 무섭게 손끝이 오므라들었다. 본능적으로 이걸 버리는 건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손바닥에 더 강한 힘이 실렸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이안은 사탕을 주머니에 다시 구겨 넣곤, 네이슨을 향해 가볍게 손을 까딱였다.
“예예. 그럼 주무십시오.”
*
“어제 일은 진짜 미안해, 로즈.”
“괜찮다니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던 거 이해해.”
데이지와의 운명도 중요하지만 어머니가 계단에서 넘어져 다치셨다는데 당연히 가 봐야지.
“정말?”
“그래, 이 얘긴 그만하자. 다행히 후작 부인도 괜찮으시고 어차피 이미 끝난 일이니까…….”
“응? 뭐가 끝난 건데? 알아듣게 말해 봐, 로즈.”
처음에 에드윈이 사라졌을 때만 해도 원작을 바꿀 수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데이지가 위험에 처했을 때 정작 이안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광장에 모습을 드러낸 게 걸리긴 하는데…….
혹여 내가 무언가를 개입해서 틀어지더라도 결국에는 원작대로 흘러갈 여지가 있는 걸까?
“그냥 별거…….”
때마침 옆을 지나치는 후배 기수의 단원들이 무어라 떠들어댔다. 오가는 대화 속에서 싸움이라는 단어를 들은 나는 그들 중 한 명의 팔을 불쑥 잡아챘다.
“싸움이라니?”
“아, 선배님. 그게 연무장 앞에서 싸움이 일어났다고…….”
에드윈은 기사단 후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연무장 쪽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그래, 알려줘서 고마워.”
뒤따라 도착한 연무장 앞 풍경은 말 그대로 가관이었다. 이미 얼굴이 얼룩덜룩해진 두 명의 신입 기사가 단원복을 반쯤 풀어헤친 상태로 대치 상태였고, 단원들이 그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루카스, 단장님은?”
난감한 기색으로 서 있던 루카스가 대답했다.
“오늘 황궁에 가셨어. 부단장님도 자리에 안 계시는 거 같고.”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안도하는 사이, 단원들 사이를 헤치고 문제의 신입 기사들에게 다가가는 에드윈의 모습이 보였다.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매를 보아하니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은데 저대로 둬도 되려나?
“너희 둘, 지금 뭐 하는 거야?”
에드윈의 물음에 데릭이 곧장 대답했다.
“제이스가 먼저 시비를 걸잖습니까.”
“내가 시비를 걸었다고? 네가 먼저 내 어깨를 쳤잖아.”
헛웃음을 터뜨린 제이스는 이내 데릭과 다시 맞붙을 기세로 으르렁거렸다. 저번부터 기 싸움을 하더니만 기어이 한판 붙은 모양이었다.
“둘 다 그만해. 기사들끼리 주먹질이라니 너희도 스스로가 한심하지 않아?”
에드윈의 힐난에 무어라 더 떠들어대려던 두 신입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차라리 정식으로 결투를 하는 건 어때?”
“에드윈! 그러다 부단장님이 아시면…….”
“루카스, 나는 에드윈 의견이 괜찮다고 보는데? 정식 결투잖아.”
팔짱을 낀 채로 묵묵히 지켜보던 바네사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녀는 로즈벨리아보다 선배 기수로 마수 토벌에도 종종 참여하는, 기사단 내 손꼽히는 실력자였다.
그래, 차라리 정식 결투가 나을 수도 있겠네.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바네사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내게 무언의 눈짓을 보내는 듯 눈썹을 실룩거리더니 재차 입을 열었다.
“로즈벨리아, 넌 어떻게 생각해?”
“저도 선배님 의견에 동감합니다. 지는 쪽이 기사단을 떠나는 걸로 하면 어떨까요?”
“예?”
“기사단을요?”
데릭과 제이스가 당황한 듯 서로를 마주 보았다. 터져 나오려는 헛웃음을 간신히 참아낸 내가 더없이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정도 패기도 없이 이런 소란을 일으켰다면, 더욱더 이해할 수 없는데.”
“로즈 말이 맞아. 우리는 제국 내 기사단 중에서도 가장 정예로 꼽히는 기사단이야. 마수 토벌에 빠지지 않고 참여해 온 것도 우리 백색기사단뿐이고, 가장 큰 규모로 토벌대 인원을 꾸리는 것도 늘 우리 백색기사단이지.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그만큼 백색기사단이 강하다는…….”
바네사가 뒷말은 안 들어도 알 것 같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래, 강하지. 그래서 명예도 뒤따르는 거고.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야. 근래에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우리 기사단원만큼은 어제까지 같이 지냈던 동료를 하루아침에 잃을 수 있어. 물론 본인 목숨을 잃을 수도 있고.”
바네사의 말에 에드윈을 비롯한 작년에 마수 토벌을 떠났던 몇몇 단원들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게 보였다.
그때 가브리엘 단장의 부관이 심한 상처를 입어 기사단을 떠났고, 단장의 부관 자리는 여태 공석이었다.
“너희 차라리 수호 기사단에 입단하는 건 어때? 거긴 황궁을 지키는 게 주 업무라, 단원들끼리 싸워도 심심해서 그러나보다 하고 말걸?”
에드윈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건넨 말에 제이슨과 데릭의 낯빛이 파리해졌다.
제국 내 황실 기사단은 정예부대인 백색 기사단과 황실의 치안을 담당하는 수호 기사단으로 나뉘었다. 두 기사단은 오랜 라이벌 관계라 사이가 썩 좋지 않았다.
백색 기사단은 수호 기사단을 보고 겉치장에나 신경 쓰는 기사들이라고 조롱했고, 수호 기사단은 백색 기사단을 힘만 센 무식한 기사들이라고 조롱하기 일쑤였다.
게다가 두 기사단은 내부 분위기도 상극이었다. 수호 기사단은 아직도 철저하게 귀족 신분에 남자들만 입단할 수 있었고, 백색 기사단은 신분 관계없이 실력만 입증하면 누구나 입단할 수 있었다.
여자를 단원으로 들인 것 또한 백색기사단이 최초였다. 여기사가 생겨난 게 비교적 최근 일이라, 귀족 영애의 신분으로 여기사가 된 케이스는 로즈벨리아가 유일했다.
그래서 한동안 제국이 떠들썩했었다. 로즈벨리아가 백색기사단에 입단하게 되었다고 알렸을 때, 헤르만과 올리비아의 반응도 꽤 웃겼는데.
“다들 마수 토벌에 대한 호기심 있지? 마수 토벌에 한 번이라도 다녀온 기사라고 하면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지니까. 왜 그러겠어? 간단히 생각해봐.”
“멀쩡히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많으니까요.”
에드윈의 말을 거든 건 이마를 긁적이는 데릭도, 아까부터 내 얼굴을 힐끔거리는 제이스도 아니었다. 어느샌가 나타난 이안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안이 끼어든 건 다소 의외였다. 저번처럼 남의 일인 양 방관할 줄 알았더니.
“그러니 기사단 물을 흐릴 거면 지금 나가.”
에드윈의 단호한 음성에 연무장 앞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신입으로 들어온 너희가 해야 할 건, 알량한 기 싸움이 아니라 수업을 열심히 듣고 조금이라도 더 수련하는 거야. 여기서 끝없는 수련을 해도 마수 토벌 한 번 못 나가는 단원들이 수두룩해. 운이 아니라 실력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만 마수 토벌에 갈 수 있거든.”
“하지만 몇몇 선배님들은 매번 토벌에 나가신다고 들었는데…….”
데릭의 시선이 정확히 나와 에드윈에게 꽂혀 들었다.
“그거야 우린 실력이 뛰어나니까.”
에드윈이 태연한 낯빛으로 대꾸했다.
“그럼 선배님께 대련을 부탁드려도 됩니까?”
우물쭈물하던 제이스의 물음이 닿은 곳은 내가 아니라 에드윈이었다.
내내 나를 힐긋거리기에 나와 대련하자고 할 줄 알았더니, 에드윈이었어?
“나?”
“그……. 로즈벨리아 선배님은 대련을 안 받으신다고.”
맞다, 그렇게 소문이 났었지. 내가 이안을 특별 취급한 게 맞긴 하구나.
“로즈벨리아가 대련을 받지 않는 건, 너희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관용을 베푸는 거다.”
에드윈의 말에 콕 찔린 나는 슬쩍 이안을 쳐다보았다. 이안 역시 언제부턴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는지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뭐야, 언제부터 쳐다보고 있었던 거지?
동요한 기색을 애써 감추려는 순간 이안의 입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저게 선배를 놀라게 해놓고 웃어?
한쪽 눈썹을 일그러트린 채 쳐다보자 이안이 눈치껏 제 입가를 가리는 게 보였다.
“로즈와 대련하고 싶으면 그 전에 나를 먼저 이겨야 할 거야.”
역시 내 안목은 옳았어. 착한 녀석 같으니라고.
절호의 기회를 놓치긴 했지만 앞으로 데이지를 만날 기회가 아예 없는 건 아닐 테니까.
이번엔 내가 기필코 너의 짝사랑을 이뤄줄게, 에드윈.
“저건 뭐지?”
루카스의 손이 가리킨 건 기사단 입구에서 말을 타고 들어오는 한 남자였다.
마구간은 이쪽이 아닐 텐데?
“저 망토, 수호기사단 거 아니야?”
웅성거림이 점점 커졌다. 백마를 탄 은발의 미남자는 모두의 이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히 다가왔다.
흡사 왕자님 같은 비주얼의 남자는 주위를 쓱 둘러보더니 이내 말에서 내렸다.
남자의 발끝이 향하는 곳은…….
응? 왜 내 쪽으로 오는 거 같지?
수호기사단을 상징하는 적색 망토를 두른 남자는 단 한 번의 지체도 없이 나에게 다가왔다.
“누구신지…….”
“일전에 한 번 뵌 적 있었는데 기억하지 못하시는군요.”
만난 적 있다고? 그런데 왜 초면인 거 같지?
로즈벨리아의 기억에 그리 인상 깊게 남은 사람은 아니었던 건가?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한 걸음 더 다가온 남자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저는 리나트 일라이저라고 합니다.”
“리나트 일라이저…….”
일라이저 가문이라면 데이지네 가문이잖아?
자세히 보니 눈동자 색이 데이지처럼 어두운 보라색이었다.
그래, 리나트 일라이저.
데이지의 오빠이자 수호기사단의 부단장. 그리고 일라이저 공작가의 차기 가주.
원작 속에서 최고의 신랑감으로 꼽히던 남자였지, 아마?
잠시 원작을 떠올리는 찰나,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시야에 들어온 건 내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는 리나트의 모습이었다.
“저기, 잠깐…….”
그러곤 내가 어찌할 새도 없이 리나트가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