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말랑한 감촉
(8/54)
8화. 말랑한 감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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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말랑한 감촉
2023.02.27.
“그게…….”
눈동자를 굴려 급히 내 행색을 살폈다. 단원복 위로 백색기사단의 상징인 백색 망토까지 야무지게 걸친 상태였다.
옷이라도 평범하게 입고 올걸.
백색기사단인 걸 드러내고 싶어서 안달 낸 사람처럼 차려입고 와서는 지나가던 행인이라니 잘도 믿겠다.
“기사님?”
“개의치 마십시오. 기사로서 도움이 필요하신 거 같아 도와드린 것뿐…….”
내가 돌연 말을 멈추자 데이지의 뺨이 움찔거렸다. 창백해진 얼굴 위로 드러난 동요의 기색을 읽은 나는 그녀에게 괜찮다는 눈짓을 보내곤 검집을 손에 쥐었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우락부락한 남자가 슬금슬금 기어가고 있었다. 남자의 가슴팍을 사뿐히 밟은 내가 검집을 턱 끝 가까이에 대자, 남자가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뭘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고.”
때마침 근처를 순찰하던 치안대를 발견한 나는 그들에게 손짓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치안대가 다가오자 데이지가 주춤거리며 내 망토를 다시 붙잡았다. 잔뜩 움츠러든 어깨를 살핀 나는 데이지 앞을 교묘히 가로막으며 대답했다.
“여기 남자 셋이 대낮부터 아녀자를 희롱하더군요.”
“혹시 백색기사단 기사님이십니까?”
선망의 대상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다소 부담스러운 눈길을 마주한 나는 큼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단원복에 망토까지 챙겨 입고 나온 건 오버였어.
“엄중한 처벌이 필요할 거 같습니다만.”
“어떤 상황이었는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이 남자들이 나를 납치하겠다고 겁박도 했어요.”
불쑥 들려온 새된 음성에 내가 뒤를 힐긋 돌아보았다. 데이지가 한 말이었다.
긴장한 듯하더니 할 말은 해야겠다는 의지가 샘솟은 모양이었다.
“겁박을 했다고요?”
“저도 들었습니다. 자기들은 앞만 보고 산다나 뭐라나. 이대로 데리고 도망치면 뭘 어쩔 거냐며 영애를 협박했어요.”
그러고 보니 내가 보란 듯이 단원복에 망토까지 걸치고 있는데도, 이 남자들은 내 정체에 대해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폰네스 제국에서 백색기사단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텐데.
“아주 질이 나쁜 놈들이군요.”
“혹시 모르니 출신에 대해서도 상세히 조사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치안대가 남자 셋을 끌고 멀어지자 데이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은 정리된 거 같으니 저도 이만 가봐야 할 거 같습니다.”
“정말 감사해요. 기사님께 보답하고 싶은데 이름을 알려주시면…….”
“괜찮습니다. 보답은 제가 원치 않습니다.”
“그래도…….”
데이지는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한 채 기침을 토했다. 가벼운 기침인 줄 알았더니,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정도로 힘겨운 기침이 이어졌다.
이러면 그냥 두고 갈 수가 없잖아.
“괜찮으신가요?”
“죄송해요. 조금 한기가 돌아서.”
연신 기침을 한 터라 나를 올려다보는 데이지의 눈가가 촉촉했다.
데이지가 어깨까지 가늘게 떠는 듯하자 나는 곧바로 망토를 벗었다. 그러곤 조심스레 망토를 둘러주었다.
“이건…….”
데이지가 동그래진 눈으로 제 어깨 위에 내려앉은 망토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괜찮으시다면 이거라도 덮고 있는 게 좋겠어요. 하녀나 시종은 어디에 있죠?”
“사실 제가 자유시간을 갖고 싶어서 몰래 골목으로 빠져나온 거라, 지금쯤 저를 찾고 있을 거예요.”
아, 맞다. 그랬었지.
처음부터 보석은 핑계였고, 데이지는 하녀와 시종을 따돌리고 몰래 빠져나와 광장을 둘러보려고 했었다. 그러다 이안과 엮이게 된 거고.
“그럼 제가 큰길까지 같이 가 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금방 하녀가 올 거예요. 이렇게까지 폐를 끼칠 수는…….”
데이지는 터져 나오는 기침을 막으며 숨을 골랐다.
원작 속 데이지는 제법 씩씩해서 시한부라는 게 크게 와닿지 않았는데, 금세 파리해진 안색을 보고 있자니 안타까운 감정이 안겨들었다.
데이지에게 예정된 결말까지 바꿀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문득 그 생각에 사로잡힌 나는 원작의 한 부분을 떠올렸다.
[“경에게는 감사한 마음이에요.”
“레이디.”
“저를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으시고 도와주셔서…….”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은 건 아닙니다.”
창밖을 보고 있던 에드윈이 돌연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네? 그게 무슨…….”
“저는 그저, 레이디의 작은 미소 하나면 충분했습니다.”
작은 미소 하나면 충분했다는 게 무슨…….
“혹시…….”
“눈치가 참 빠르십니다.”
이제야 알 거 같았다. 에드윈은 늘 웃고 있는데, 왜 그에게 애틋한 마음이 들었는지. 눈이 시릴 정도로 예쁜 미소인데 그걸 보고 있으면 왜 이따금 서글픈 마음이 들었는지.
에드윈이,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걸 죽기 직전에야 깨닫다니, 데이지 너도 참 한심하구나.
자조하듯 씁쓸히 웃던 내가 에드윈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가엔 어느새 눈물이 가득 차오른 채였다.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는…….”
“…….”
“저랑 친구 해주실래요?”
“뭐든, 해드리겠습니다.”]
내가 읽을 때마다 오열하던 구간이었다. 에드윈과 데이지를 직접 만난 뒤라 그런지, 그 장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이번에는 둘 다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기다리시는 동안 더욱더 필요할 거예요. 이걸 두르고 있으면 아까처럼 이상한 놈들이 꼬이지도 않을 거고요.”
“……감사합니다.”
*
내가 원했던 그림대로 그려지진 않았지만, 이렇게 되면 원작이 바뀐 건 맞는 건가?
오늘처럼 내 선택으로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거라면…….
광장 한복판에서 잠시 멈춰 선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작은 희망이 생겨났지만, 앞으로의 미래가 내 선택에 좌우될 수 있다는 두려움 또한 나를 휘감았다.
그나저나 에드윈은 대체 어딜 가서 여태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야?
기껏 제 운명의 상대를 만나게 해주려고 했더니만.
원작이 틀어졌다고는 하나 아직 방심할 순 없었다. 이안과 데이지가 언제 어디서 만날지 모를 일이었다.
그 전에 에드윈과 데이지가 먼저 만나면 좋을 거 같은데.
“설마 밥 먹으러 간 건 아니겠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에드윈과 자주 가던 식당 쪽으로 걸음을 돌리려는 찰나였다.
“로즈벨리아?”
눈앞에는 아주 낯선 얼굴이 있었다. 내게는 낯설지만 로즈벨리아에게는 아주 익숙한 로즈벨리아의 아버지, 헤르만이었다.
“누님?”
“언니!”
헤르만이 등지고 선 마차에서는 뒤이어 케이든과 비비안이 내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어머, 로즈?”
화려한 드레스 차림의 올리비아였다.
참으로 단란하고 화목해 보이는 가족이었다. 그러나 그 울타리 안에 내 자리는 없다는 걸,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시간에 네가 광장에는 어쩐 일인게냐.”
“볼 일이 있어서요.”
헤르만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린 올리비아가 눈매를 반쯤 접어 보이며 내게 다가왔다.
“로즈, 우리 지금 레스토랑에 가려는데 너도 같이 가지 않을래?”
“아뇨, 저는 다시 기사단에 들어가 봐야 합니다.”
“요새 얼굴 보면서 식사 한 번 제대로 못 했잖니. 그러지 말고…….”
어느새 내 옆까지 다가온 올리비아가 친근하게 팔짱을 껴왔다. 본능적인 거부감이 있는 건지 오싹 소름이 돋았다.
“아뇨, 저는 괜찮습니다.”
내가 재빠르게 팔을 빼내자 헤르만이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내 옆에서 아주 미세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코웃음을 치는 것 같은…….
지금 올리비아가 웃은 건가?
“거기서 그럴 거 없어요.”
“헤르만, 그래도…….”
“본인이 안 가겠다는데 우리가 억지로 끌고 갈 수도 없잖소.”
여태 잔병치레 하나 없던 딸이 하루를 꼬박 앓았다는데 찾아오지도 않더니.
그 이후로 처음 마주하는 건데도 몸은 괜찮은 거냐 묻지도, 걱정스럽게 살피는 기색 따위도 없었다.
나를 바라보는 헤르만의 눈에는 그저 못마땅하다는 기색만이 가득했다.
“언니는 같이 안 가는 거야?”
뽀로로 달려 온 비비안이 내 옷자락을 꼭 붙잡았다.
“나는…….”
“비비안 아빠에게 오렴. 당신도 그만하고 이리 와요. 애들 데리고 어서 갑시다.”
“헤르만.”
“얼른 오래도요.”
올리비아가 비비안을 데리고 마차 쪽으로 다가가자, 케이든이 슬쩍 다가와 물었다.
“누님은 같이 못 가시는 건가요?”
“미안하지만 나는 중요한 업무가 있어서.”
“그렇군요. 아쉽지만 다음에 함께 가요, 누님.”
“가자꾸나, 케이든.”
헤르만의 성화에 케이든도 마지못해 올리비아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렇게 다시 하나가 된 가족은 맞은편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멍청하게 지켜보고 있던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 이 기분 되게 오랜만에 느끼는 건데도 여전히 비참하네.
그들을 가족이라고 온전히 받아들인 것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헛헛한 기분이 드는지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나일 때도, 로즈벨리아가 되어서도 이런 일에 미숙하지 못한 건 똑같구나.
이럴 때 옆에 에드윈이라도 있었다면 허울 좋은 말로 그럴싸하게 둘러대 줬을 텐데…….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돌아섰는데도 발걸음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잠시 방향을 잃은 기분이었다.
정신 차리자.
뺨을 가볍게 두드리다가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내 눈앞에는 믿기지 않게도.
“선배님?”
이안이 있었다.
그의 뒤로 마차가 바짝 다가오는 걸 본 나는 인사를 나눌 새도 없이, 이안의 망토 자락부터 잡아챘다.
“위험…….”
내가 불시에 잡아당길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살짝 커진 이안의 동공이 보였다. 이윽고 균형감각을 잃은 커다란 몸이 내 앞으로 쏟아지듯 겹쳐졌다.
달리 잡을 곳이 없었는지 이안의 두 손은 내 양어깨 위로 사뿐히 내려앉은 채였다.
근데 이건 뭐지?
졸지에 이안의 품 안에 갇힌 모양새가 된 나는 다소 이질감이 느껴지는 미간을 움찔거렸다.
분명 뭔가가 닿아 있는…….
이마 위에 내려앉은 따뜻하고도 말랑한 감촉의 정체를 깨달은 내 입이 작게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