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운명의 날 (7/54)


7화. 운명의 날
2023.02.23.



 


“로즈벨리아, 괜찮아?”

루카스의 물음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어, 괜찮아.”

그러니까 정신없이 도망치던 단원이 내 어깨를 쳤는데 그게 하필 기사단 내에서 가장 체격이 좋은 레이먼이었고, 비틀거리는 나를 잡아준 건 다름 아닌 이안이었다.

분명 저 멀리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 여기까지 온 거지?


“레이먼, 조심해야지. 로즈, 너 팔 괜찮아? 빠지진 않았어?”

이안이 내 몸을 바로 세워주자, 어느새 다가온 에드윈이 내 팔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파, 팔이 빠지다니? 설마 내가 그런 거야?”

나와 부딪치고 제자리에 멈춰 서 있던 레이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괜찮아, 레이먼. 어깨가 조금 아프긴 하지만 팔이 빠지거나…….”

“뭐? 팔이 아니라 어깨가 빠진 거 같다고?”

에드윈이 호들갑을 떨자 레이먼의 얼굴이 파래지는 게 보였다.

레이먼은 우락부락한 체격과는 다르게 꽤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에드윈, 그만해. 레이먼은 진짜 믿는다고.”

내 말에 레이먼이 얼떨떨한 얼굴로 눈을 끔뻑거렸다.

그제야 에드윈의 장난이었다는 걸 깨달은 레이먼이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로즈벨리아, 그럼 너 괜찮은 거지?”

“그래. 네 체격이 좋긴 하지만, 내 어깨가 그 정도로 약하진 않아.”

“정말?”

“그렇대도.”

레이먼은 내가 어깨를 세 차례나 빙빙 돌리고 나서야 안도한 표정으로 자리를 떠났다.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이안이 물었다. 내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는 시선을 느낀 내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당연히 괜찮지. 잠깐 놀랐을 뿐이야.”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잠깐, 내가 이안에게 감사 인사를 했던가?


“고마워, 신입.”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선배님이 다치시면 안 되니까요.”

슬쩍 올라가는 입꼬리를 본 나는 그 말에 담긴 속뜻을 대번에 눈치챘다.


“그래, 다치면 안 되지.”

나와 검을 맞댄 그 순간이 잊히지 않았다던 이안이었다.

행여라도 내가 다치게 되면 너와 대련을 못 할 테고, 그래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여기까지 온 거지?

네 속마음 다 보인다. 아주 훤히 보여.


“네가 클라인이지?”

에드윈이 물었다.


“네, 선배님.”

“지키고자 하는 그 마음, 아주 멋있었어.”

“예?”

에드윈은 빙긋이 미소 짓는 것으로 대답을 갈음한 채, 나와 이안을 번갈아 보았다.

저 미소, 어째 불길한데?


“나랑 루카스는 이만 빠져줄게. 로즈와 오붓하게 얘기 나누도록 해.”

오붓하게? 내가 뭘 잘못 들었나?


“에드? 나랑 신입이랑 더 얘기할 거 없는데?”

“저쪽은 더 있을 거 같은데? 그럼 우린 이만.”

저게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러고 보니 이안이 내게 한 게 고백이 아니라 대련 신청이었다는 말을 했던가?

설마 이안이 아직도 나를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야, 에드윈!”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라고!


“에드윈 선배님이 왜 갑자기 자리를 비켜주시는 겁니까?”

“그러게? 나도 잘 모르겠네.”

“혹시…….”

“나도 급한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이안을 두고 나는 기사단 내 도서관으로 도망쳤다.

기사단 내에서 가장 한산한 장소인 도서관 안에는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규모는 작은 편이었지만, 제법 그럴싸하게 꾸며진 도서관이었다.

높은 아치형 천장에 주황빛 조명이 일정한 간격으로 걸려 있었고, 대형 책장 사이사이에는 큰 아치형 창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슬슬 책을 찾아볼까?

도서관 입구에서 가까운 책장 쪽으로 걸음을 떼자, 때마침 창문 틈으로 밀려든 미풍에 조명이 가볍게 흔들렸다.

도서관 내부를 휘감은 바람결은 오래된 책 냄새, 카펫에서 나는 다소 쾨쾨한 냄새를 머금고 내 코끝을 스쳤다.

이전 생에서도 헌책방이나 도서관을 좋아했던 터라, 익숙한 감각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 안에 오러에 관한 책이 있어야 할 텐데…….”

기사단 내부에 있는 도서관이라 내심 기대했지만 오러에 관한 책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하기야 애초에 오러를 감지하는 것조차 힘들고, 오러를 제대로 운용해 소드마스터가 되는 경우는 훨씬 드문 경우라고 하니까.


“제국의 위대한 기사, 로렌스 글레이저?”

유독 눈길을 끄는 책 위로 손을 뻗었다. 두께가 족히 한 뼘은 넘는 책을 품에 안은 나는 곧바로 첫 장을 넘겨보았다.

「로렌스 글레이저는 글레이저 가문의 자랑이자, 폰네스 제국 역사에 소드마스터로 남은 위대한 기사이다. 이 책은 로렌스 글레이저에 일대기를 담은 책이다.」
 


“찾았다.”

안도감에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책장에서 돌아선 나는 널찍한 책상 앞에 앉아 챕터를 살폈다.


“오러, 오러에 관한 거……. 있다!”

 
「해당 챕터는 ‘로렌스 글레이저’가 생전에 남긴 ‘오러’에 관한 기록물을 참고하여 쓴 것이다.

오러는 축복이다. 검술의 경지에 올라선 자만이 오러를 감지할 수 있으며, 감지하는 단계에서는 몸에 흐르는 오러의 양이 적어 결코 오러를 사용할 수 없다.

오러를 제대로 운용하는 사람을 검술의 최고 경지에 오른 사람 즉, 소드마스터라 칭한다.

몸 안에 흐르는 오러를 몸 밖으로 밀어내는 것을 오러의 발현이라고 하는데, 이때 발현되는 오러의 빛은 검사마다 다르다고 알려져 있다.

한 번 구현된 오러의 색상은 검사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러를 흡수한 검은 파괴력이 최소 수십 배로 증가하며, 그 어떤 것도 베어낼 수 있다고 전해진다.

오러는 신체 능력을 향상시키는데, 그 한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오러를 운용하게 되면 미약하게나마 자가 치유 능력이 생기는 걸로 추정된다. 이는 소드마스터가 되고 나서 손에 있던 상처와 굳은살이 사라졌다는 ‘로렌스 글레이저’의 기록만으로 추측한 것이라 확실치 않다.」
 


“자가 치유 능력?”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힐긋 시선을 내렸다.

로렌스 글레이저라는 기사와 마찬가지로 로즈벨리아의 손에도 상처나 굳은살이 없었다. 왼손은 굳은살이 없는 정도였지만 오른손은 마치 검을 한 번도 다루지 않은 사람의 손처럼 부드럽고 여렸다.

로즈벨리아가 양손으로 검을 들 때도 있지만 주로 오른손으로 검을 드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 걸까? 오러의 발현이 오른손으로 더 많이 돼서?


“진짜 오러가 축복…….”

 
「오러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면 오히려 검사의 생명력을 갉아먹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축복은 개뿔. 언제는 치유한다면서 갑자기 생명력을 왜 갉아먹는데?

나는 서둘러 다음 장을 넘겼다. 분명 오러를 다루는 방법에 대한 언급이 있을 터였다.


“오러를 다루는 방법에 관해서는 애석하게도 알려진 바가 없다? 뭐, 이런 책이 다 있어?”

로즈벨리아의 기억 속에서 본 마수 토벌은 녹록지 않았다. 검으로 베어내도 끊임없이 재생되는 마수가 있었는데, 그 마수는 오러를 사용해야만 없앨 수 있었다.

작년에 떠났던 토벌에서 로즈벨리아가 그 마수를 없애려다가 가브리엘에게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올라선 걸 들켰었다.

마수 토벌을 떠나기 전까진 어떻게든 오러를 다뤄야 할 텐데.

이러다간 원작의 결말까지 가기도 전에 마수 토벌에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거잖아?

책을 덮는 손길에 찰나 힘이 실리자, 부옇게 먼지가 일어났다.

캑캑거리던 나는 허공을 향해 열심히 팔을 휘저어봤지만 이미 시작된 재채기와 기침을 막긴 역부족이었다.

책에 애꿎은 화풀이를 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는데.

혀끝까지 차오른 한숨을 꾹 참은 나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

드디어 대망의 날이 밝아왔다. 데이지와 이안이 처음으로 만나는 날이자 데이지의 짝사랑이 시작되는 운명의 날.

원작에서 몸이 약한 데이지는 전야제에 돌연 앓았고, 그 여파로 축제가 끝날 때까지 외출할 수 없었다.

데이지의 부친인 일라이저 공작은 아쉬워하는 데이지를 위해 진귀한 원석을 사들였고, 데이지는 디자이너에게 보석 세공을 맡긴다는 핑계로 모처럼 외출을 허락받는다.

그 이후 전개는 전형적인 흐름이었다.

원석을 맡기고 나오는 길에 잠시 하녀와 떨어지게 된 데이지가 질이 좋지 않은 불량배들에게 둘러싸이고, 우연히 근처를 지나던 이안이 데이지를 구해주면서 두 사람이 엮이는…….


“로즈, 대체 광장에 뭘 하러 나온 거야?”

“보채지 말고 가만히 있어 봐.”

“언제까지 가만히 있으라는 건데.”

점심을 먹고 나왔다고 해서 오전부터 광장을 어슬렁거렸는데 왜 안 보이는 거지? 분명 이 근처가 맞는데.


“조금만 더……. 에드윈?”

맙소사, 에드윈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멍청한 에드 같으니라고.

분노를 담아 주위를 휘둘러보던 내 시야에 드디어 데이지로 추정되는 소녀가 들어왔다.

애정했던 캐릭터라 그런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내가 상상하던 외모와 똑 닮아 있었으므로.

역시나 원작 내용이 그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길 건너에서 데이지를 힐긋거리던 남자 셋이 혼자가 된 데이지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얘는 대체 말도 없이 어디 간 거야.

설마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

그때 이안과 로즈벨리아가 보였던 꿈은 그저 한낱 개꿈일 뿐이고 정해져 있는 원작을 바꿀 수 없는 건가?

그래서 에드윈이 나타나지 못하는 건가?

결국 이 자리에 이안이 나타나 데이지를 구하게 되는 건가?

머릿속이 카오스였다. 혼란과 혼동을 거듭하던 나는 초조하게 입술을 물어뜯었다.

에드윈도 에드윈인데 왜인지 이안의 모습 또한 보이지 않았다.

이러다 이안이 이 자리에 나타나기라도 하면 원작은 반복될 거고…….

데이지는 이안을, 에드윈은 데이지를.

두 사람의 가슴 아픈 짝사랑이 되풀이될 텐데.


“귀엽게 생겼네.”

“내가 누군지 알면 지금 나에게 이렇게 무례하게 구는 걸 후회하게 될 거예요.”

“후회? 너야말로 우리가 누군 줄 알고?”

“우리는 앞만 보고 사는 사람들이라서 말이야. 이대로 너를 데리고 도망치면 네가 뭘 어쩔 건데?”

근데 저것들이 뭐라는 거야, 지금.


“워, 원하는 게 있으면…….”

“원하는 거? 내가 황궁을 사달라고 하면 황궁을 사줄 거야? 그런 허울뿐인 말은 누가 못 해?”

“내게 손끝 하나라도 댔다간, 우리 가문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대체 어디 가문이길래? 얼마나 대단한 가문인지 이름이라도 들어볼까?”

남자의 비아냥에 데이지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어졌다.

이안이 나서느냐 에드윈이 나서느냐를 떠나서 더는 지켜볼 수만은 없다는 판단이 선 나는 은밀히 그들의 뒤로 다가갔다.


“앞만 보고 산다니, 아주 존경스러울 지경이네.”

가장 우락부락하게 생긴 남자가 데이지의 손목을 낚아채려는 찰나, 빠르게 다가선 내가 검집으로 남자의 목 뒤를 겨냥했다.

남자가 쓰러지자 그 옆에 서 있던 삐쩍 마른 남자가 허둥대며 뒤를 돌아보았다.


“뭐, 뭐야.”

“앞으로는 뒤도 좀 돌아보고 그렇게 사는 게 좋겠어.”

나는 다급하게 허리춤을 더듬거리는 남자의 목덜미를 가격했다.

남자가 하얀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사이, 눈 밑에 길게 칼자국이 있는 남자가 내게 검을 휘둘렀다.


“너 누구야.”

“지금 그게 중요해?”

데이지 앞을 막아선 나는 검을 빼 들었다.

잘 벼려진 검 끝을 아래로 떨어뜨린 채 가만히 서 있자, 남자가 거무튀튀한 입술을 비틀어 보이더니 검을 앞세워 내게 돌진해왔다.

챙그랑.

남자는 내 검과 부딪히자마자 맥없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는 자신의 검을 망연자실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어, 어떻게…….”

내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다가가자 남자가 겁에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눈치를 살피던 남자가 반대편으로 도망치려는 찰나, 검집으로 재차 목 뒤를 가격했다.


“도망치면 곤란하니까.”

순식간에 남자 셋이 고꾸라지자 데이지가 입을 틀어막았다. 토끼 눈이 된 데이지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서서히 이성이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지금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내가 원하는 대로 에드윈이 데이지를 구해주진 못 했지만, 본래 이 자리에서 데이지를 구해줘야 할 이안은 나타나지 않았고, 내가 데이지를…….

그러니까, 원작이 바뀌긴 한 건가?

좀처럼 정리가 되지 않았다. 일단 이 자리에서 벗어난 뒤에 차분히…….

응? 왜 몸이 움직이질 않지?


“저기…….”

시선을 내리자 내가 입고 있는 망토를 붙잡고 있는 손이 보였다.

거기서 조금 더 시선을 들어 올리자, 부드러워 보이는 연한 갈색빛 머리에 보라색 눈동자가 보였다.

와, 진짜 데이지네.


“예?”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게 말을 건네는 데이지라니!


“아닙니다. 그럼 저는 이만…….”

“실례지만 기사님의 성함을 여쭤도 되겠습니까?”

“저는 그냥 지나가던 행인입니다.”

“지나가던 행인의 검술 솜씨가 아니었는데요. 혹여 백색기사단 기사님 아니신지요?”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이는 눈망울을 보며, 나는 직감했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