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괜찮으십니까, 선배님
(6/54)
6화. 괜찮으십니까, 선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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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괜찮으십니까, 선배님
2023.02.20.
로즈벨리아가 오러를 사용한 뒤에 피를 토한 적 있었던가?
로즈벨리아의 과거를 차분히 더듬어보아도 그런 기억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러로 인해 몸에 이상 징후가 생긴 적도 없었는데…….
“다시 해 보자.”
숨을 길게 내쉰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몸속에 흐르는 어떠한 기운을 느꼈다.
그러니까 몸속에서 날뛰는 듯한 이 감각이 오러라는 거고, 이걸 그대로 검 쪽으로 밀어내면…….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검 주위로 하얀빛이 감도는 게 보였다.
이내 나무를 향해 검을 휘두르자, 두 동강 난 나무가 힘없이 수풀 위로 쓰러졌다.
괜찮은 건가?
“이번엔 제대로 된 거 같은…….”
또다시 울컥 밀려드는 토기에 입을 틀어막았다. 제대로 되기는커녕 이전보다 더 많은 피가 손바닥을 적셨다. 찰나였지만 눈앞이 빙글 돌기까지 했다.
이유가 뭐지?
그러고 보니 로즈벨리아가 느꼈던 오러의 감각과 내가 조금 전 느꼈던 오러의 감각이 달랐다.
로즈벨리아는 몸에 흐르는 오러를 잔잔한 호수 같다고 했는데 내가 느끼는 오러는 잔잔하다기보단 다소 격렬했다.
내가 오러를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해서 그러는 건가? 그렇다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만약 내가 로즈벨리아가 아니라서 오러를 쓸 수 없는 거라면?
“못 쓰게 할 거면 애초에 이 오러라는 걸 느끼게 하지 말았어야지.”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어지러이 흩어지는 머리칼을 쓸어넘기려던 나는 움찔하며 시선을 내렸다. 살짝 구부려진 손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시야에 피가 잔뜩 묻은 손바닥이 가득 들어차자, 절로 두 눈이 감겼다. 왈칵 두려움이 안겨든 탓에 마치 두 발이 땅에 박힌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다가 불현듯 눈을 떴다. 어느새 동쪽 하늘이 희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손바닥을 움켜쥔 채 수풀을 헤치고 나아갔다. 이윽고 걸음을 멈춘 내 앞에 펼쳐진 건 안개가 자욱하게 낀 호수였다.
물을 마시던 새들이 인기척에 놀라 푸드덕거리며 날아갔다. 나는 주위를 빠르게 살핀 뒤, 주저 없이 호수 가장자리에 손을 담갔다.
깨끗해진 손을 괜스레 쥐었다가 펴길 반복하다가 목을 큼큼거렸다. 다행스럽게도 고통은 피를 토할 때뿐이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한숨을 삼킨 채로 고개를 들어 올린 나는 찰나 숨을 멈추었다.
은밀히 내려온 새벽 햇살이 호수의 잔물결 위로 녹아,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이고 있었다.
한없이 고요하고도 황홀한 광경을 두고 돌아선 나는 저택으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했다.
곧장 기사단에 나갈 준비를 마친 내가 방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무언가 내 품에 폭 안겨 왔다.
“비비안?”
“로즈 언니!”
“아침 일찍 무슨 일이야?”
또 악몽을 꾼 건가 싶어 급히 시선을 내렸다. 분홍빛이 도는 비비안의 뺨을 보니 컨디션이 나쁜 것 같진 않았다.
“어제도 언니 기다리려고 했는데 못 보고 자버렸거든. 그래서 오늘은 아침에 일찍 보러 온 거야.”
이렇게나 귀여운 대답이 돌아올 줄이야.
그러고 보니 비비안의 눈에 졸음이 가득해 보였다. 나는 웃음을 꾹 참고, 비비안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오늘은 조금 일찍 들어올게.”
“정말? 그럼 비비안이랑 같이 책 읽을래?”
“책? 좋지. 저녁에 같이 읽자.”
와, 하고 탄성을 내지른 비비안이 배시시 웃어 보였다.
“비비안이 맛있는 간식도 준비해달라고 할 거야.”
“너무 단 건 안 돼.”
단호한 음성에 비비안이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치이, 알았어.”
“비비안, 네가 배웅해줄래?”
“응. 그럴래!”
대답과 동시에 작고 여린 감각이 손끝에 감겨왔다. 비비안의 손을 조심스럽게 맞잡은 나는 힐긋 뒤를 돌아보았다.
내 눈짓에 비비안의 뒤를 따르던 하녀가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이윽고 1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앞에 다다르자 비비안이 냉큼 계단 손잡이를 잡아 보였다.
이거 봐. 비비안 이제 계단 손잡이 잘 잡을 수 있어.”
로즈벨리아의 기억 속에서 비비안은 늘 낑낑대며 손잡이를 잡았던 거 같은데, 그새 키가 큰 건가?
손잡이의 위치가 아직 비비안의 어깨보다 살짝 높긴 하지만, 손잡이를 쥔 모양새는 제법 안정적이었다.
“그러네. 그래도 계단 위에서는 항상 천천히 내려가야 해.”
“응.”
고개를 끄덕이는 비비안의 머리를 가벼이 쓰다듬고 이내 카펫이 깔린 계단 위로 발을 내딛으려는 찰나였다.
“혼처를 알아봐달라니?”
“로즈도 곧 결혼할 나이니까요.”
이거 올리비아 목소리인 거 같은데? 설마 지금 올리비아가 내 혼처를 알아봐달라고 누군가한테 부탁하는 건가?
상황 파악을 끝낸 내가 제자리에 우뚝 서자 비비안이 토끼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입술 위로 검지를 갖다 대자 비비안이 덩달아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로즈는 지금 기사단 일로 바쁘지 않니? 결혼을 서둘러야 할 나이도 아니고…….”
“오라버니, 로즈도 나중엔 분명 제 마음을 이해해줄 거예요. 여자는 늦으면 늦을수록 좋은 혼처를 구하기 어려운 거 아시잖아요. 차라리 서두르는 게 낫죠.”
메인 홀에서 응접실로 이어지는 1층 복도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였다.
올리비아의 오라버니라면 윈터스 가문에 자주 방문하던 딜런 라일리일 확률이 높겠네.
그는 라일리 가문의 서자이자 로즈벨리아를 제법 살뜰히 챙겨 주었던 인물이었다.
“그래, 내가 한번 알아볼게.”
“고마워요, 오라버니. 어서 서재로 가요. 헤르만이 기다리고 있어요.”
두 사람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나는 곧장 비비안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됐어, 비비안.”
“비비안 이제 말해도 돼?”
“응. 혹시 무슨 소리 들었어?”
다행히 아무 얘기도 듣지 못한 건지 비비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기야 남들이 감지하기에는 작은 목소리였다.
이럴 땐 남들보다 오감이 조금 더 발달한 게 좋긴 하네.
그나저나 올리비아가 왜 저렇게 내 결혼을 서두르는 거지? 나를 하루라도 빨리 눈앞에서 치우고 싶어서?
올리비아가 본격적으로 혼처를 알아보기 시작하면 분명 어떤 식으로든 압박해올 텐데.
벌써 두통이 이는 듯해, 반사적으로 요정 같은 비비안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언니, 오늘은 꼭 일찍 와야 해.”
어느새 계단 끝에 다다른 나는 비비안의 머리를 부드럽게 매만져주곤 돌아섰다.
*
“에드, 내일 광장 나가기로 한 거 잊지 않았지?”
“일정 비워놨다고 몇 번을 말해야 믿을래?”
네가 갑자기 말을 바꾸고 잠적한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니? 로즈벨리아의 기억 속에서 다 봤거든?
나는 불쑥 튀어 나가려는 말을 삼켜내곤 애써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에드? 네 행동을 돌이켜 봐. 너라면 믿을 수 있겠어?”
“못 믿지.”
앞머리를 쓸어 올리던 에드윈이 쿡쿡댔다.
그래도 다행히 자기 객관화는 되는 타입이구나.
“내일은 약속 꼭 지켜.”
진짜 중요한 날이라서 그래! 너와 데이지의 운명이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는 날이라고!
내적 외침을 대신해 눈빛으로 쏘아대자 에드윈이 어깨를 가볍게 들어 올려 보였다.
“알았어. 네가 이렇게까지 권유한 건 처음이기도 하고…….”
하기야 진짜 로즈벨리아였다면 이렇게까지 닦달하진 않았겠지.
혹시 에드윈이 이런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았으려나?
문득 든 의문에 슬쩍 에드윈의 눈치를 살폈다.
“근데 말이야. 나 아프고 난 이후로 좀 달라진 거 같지 않아?”
“네가? 달라져?”
고개를 갸웃거린 에드윈이 나를 위아래로 살폈다. 그의 눈초리가 차츰 가늘어지자, 전신에 긴장감이 바짝 밀려들었다.
“……아니야?”
“전혀.”
“잘 생각해봐. 말투라던가 행동이라던가.”
턱을 매만지던 에드윈은 이내 아, 하고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좀 달라지긴 했다.”
“어떤 점이?”
“묘하게 더 재수 없는 느낌?”
“뭐?”
내가 미간을 좁히자, 에드윈이 이마를 짚은 채로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다, 넌 원래도 재수가 좀 없었으니까 그거 가지고 달라졌다고 할 건 아니지.”
“장난치지 말고, 진짜로 달라진 거 없어?”
조심스러운 물음에 에드윈의 표정이 덩달아 살짝 굳어지는 게 보였다.
“왜? 뭐가 이상한 거 같아?”
“그런 건 아니고…….”
“내가 널 오래 알아 오긴 했지만, 내가 여태 봐 온 모습이 네 전부라고 생각하진 않아.”
“어?”
“나도 너한테 보이지 않은 모습이 있고, 너도 나한테 드러내지 않은 모습이 있을 거잖아?”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지.”
“그러니까 너는…….”
“…….”
“너대로 그냥 너야, 로즈.”
순간 뒷골이 찡하고 울렸다.
새벽에 겪은 일이 꽤 충격이었는지 어쩌면 이 몸이 나를 거부하는 게 아닐까. 내내 그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래, 다르면 어떻고 같으면 어떤데?
매일 아침 로즈벨리아로 깨어난 내 모습을 확인하면서 마냥 홀가분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미 로즈벨리아가 되어버렸고, 몇 날 며칠이 지나도 바뀌는 건 없었다.
“그러니까 하루 정도 기억 못 하는 거 때문에 주눅들 필요 없어. 나랑 루카스는 술 먹고 종종 그래. 기억이 통으로 날아간다니까?”
“자랑이다.”
에드윈의 어깨를 툭 치자 그가 빙글거리며 웃었다.
“자랑이지, 그럼.”
속없이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내내 나를 짓누르던 묵직한 압박감이 조금은 사라지는 것 같았다.
“어쨌든 내일…….”
“로즈벨리아, 이제 그 얘긴 그만 좀 해.”
한마디 더 거들려는 찰나, 어디선가 고성이 들려왔다. 소리의 근원지는 강의실이 있는 별관 앞이었다.
내가 눈짓으로 별관 쪽을 가리키자 고개를 끄덕인 에드윈이 앞장섰다.
어찌나 소란스러운지 별관 앞은 혼돈 그 자체였다. 나는 다소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던 루카스에게 다가가 물었다.
“루카스, 무슨 일이야?”
“시비가 붙은 모양이야. 제이스랑 데릭이라고 둘 다 신입인데…….”
별관 앞에 신입 기사들 위주로 모여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수업을 듣고 나오는 길에 말다툼이 생긴 모양이었다.
저 멀리, 신입 무리와 떨어진 채로 덩그러니 서 있는 이안도 보였다.
“지금 신입 둘이 싸운다는 거야?”
“아직 싸우는 건 아니고 싸우기 전이라고 해야 하나.”
루카스가 애매하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그도 그럴 게, 단원들이 두 사람을 빙 둘러싸고 있어 좀처럼 어떤 상황인지 보이질 않았다.
“이럴 때 아주 잘 먹히는 방법이 하나 있지.”
나와 루카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에드윈이 대뜸 말했다.
“뭔데?”
“부단장님!”
에드윈이 목청껏 부른 그 이름에, 별관 앞에 있던 단원 모두가 혼비백산이 되었다.
“부단장님이라고?”
“어디?”
“빨리 흩어져!”
백색기사단의 단장인 가브리엘이 너그러운 성품이라면, 부단장인 파비안은 까탈스러운 성미였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게 취미라, 단원들끼리 싸운 걸 알면 단체로 기합을 주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에드윈, 제법 똑똑한데?
에드윈을 향해 엄지를 치켜들려던 나는 어깨에 강하게 와닿는 충격에 비틀거렸다.
방심하고 있던 터라 몸의 균형이 흐트러졌다고 느낀 찰나, 누군가 내 어깨를 단단히 잡아주었다.
“괜찮으십니까, 선배님.”
당연히 에드윈이나 루카스겠거니 했는데, 내 귓가를 간질인 음성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신입?”
이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