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고백을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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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고백을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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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고백을 했다고?
2023.02.16.
“선배님께 고백을……. 그러니까……. 저와 교제해달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맙소사, 뭘 해? 고백?
로즈벨리아한테 고백한 기사가 진짜로 있었다고?
당황한 내가 입술을 작게 벌리자, 시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아, 그……. 나한테 고백을 했다고?”
붉어진 뺨을 매만지던 시몬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습니다.”
“근데……. 나는 너를 잘 알지도 못하고, 내가 지금은 누군가를 만날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말이야.”
“그렇다면 나중에 마음의 여유가 생기시면, 그땐 재고해주시는 건가요?”
눈도 못 마주칠 정도로 부끄러워하는 것치곤 제법 당돌한 물음이었다.
“……언젠가 여유가 생길 순 있겠지. 근데 그게 기약이 없는 거잖아? 평생 그런 마음의 여유가 안 생길 수도 있는 거고…….”
“조만간 있을 마수 토벌 때문이지요?”
아아, 곧 마수 토벌이 있었지.
원작 초중반에 백색 기사단이 마수 토벌을 떠났다는 언급이 있었으니 시몬의 말대로 머지않은 일이었다.
“마수 토벌 때문만은 아니고…….”
사실 나는 네가 좋아했던 그 로즈벨리아가 아니야, 라고는 할 수 없어 애꿎은 입술만 물었다가 놓길 반복했다.
“…….”
“네 마음은 고맙지만 거절할게.”
“그럼 혼자서 좋아하는 건 괜찮은 거지요?”
만약 원작대로 흘러갈 결말을 피하지 못한다면, 나를 좋아해봤자 불행할 텐데.
더 나아가 나랑 관계가 진전이라도 되면, 더 큰 불행이 안겨들 테고.
“그것도 별로 추천하고 싶지는 않은데, 너에게는 얼마든지 더 좋은 상대가 있을 거 같거든.”
“기사단에 들어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선배님의 소문을 듣고 줄곧 흠모해왔습니다. 제게는 선배님이 최고의 여성입니다.”
“저기…….”
“이 마음은 혼자 고이 간직하겠습니다. 그건 괜찮으시죠?”
내가 대답을 머뭇거리자 시몬이 고개를 숙여 보이곤, 서둘러 수련장을 빠져나갔다.
원작, 결말, 죽음…….
어제부터 나를 괴롭히던, 아직 해결하지 못한 난제들이 머릿속을 재차 어지럽혔다.
“선배님.”
허공을 울리는 낮은 목소리가 긴장의 끈을 툭 건드렸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안이었다.
“언제 왔어?”
“설마 저 녀석이랑 저를 헷갈리셨던 겁니까?”
다 들었구나.
“그게…….”
“선배님은 눈썰미가 정말 없으신가 봅니다.”
시몬과 이안이라, 확연히 다른 이미지긴 했다. 시몬은 소년에 가까운 이미지라면, 이안은…….
별안간 눈이 마주쳤다. 한쪽 눈썹을 찌푸리고 있던 이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본인과 시몬을 헷갈린 게 어처구니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 그럴 수도 있지.”
“아무리 봐도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데 말이죠.”
“그날 전야제였잖아. 내가 진짜로 취했을 수도 있고…….”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이안이 고개를 휙 비틀었다. 내 쪽으로 서서히 기울어지던 이안의 얼굴은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의 거리에서 멈추었다.
“뭐 하는 거야?”
“검투 대회에서 선배님과 가까이 맞붙었을 때가 딱 이 정도 거리였습니다. 술 냄새가 나는지, 나지 않는지 충분히 알 수 있는 거리죠.”
“…….”
“선배님은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분명히.”
이안이 몸을 바로 세우자, 눈앞에서 일렁이던 남빛 바다가 멀어졌다.
“이상하네. 그럼 왜 그날 일만 기억이 안 나지? 난 당연히 취해서 기억이 안 나는 줄 알았거든.”
나는 경직된 입꼬리를 애써 끌어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차피 기억에도 없는 일이니 끝까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고 잡아떼면 되겠지.
문제는 이 어설픈 연기가 이안에게 통하느냐인데.
“그런 이유로 선배님이 취한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이안은 의외로 순순히 수긍하는 기색을 보였다.
너 의외로 괜찮은 애구나? 끝까지 이상하다고 따져댈 줄 알았더니.
“아무튼 미안해, 헷갈린 거.”
“사실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습니다.”
“어?”
“선배님에게 제가 그리 인상 깊은 후배는 아니란 뜻이잖습니까.”
그걸 또 그렇게까지 비약할 건 없는데.
결말을 아는 나에게 이안의 인상이 흐릿하게 느껴질 리 없지만, 로즈벨리아의 기억 속 이안은 그저 이번에 들어온 신입 중 한 명이긴 했다.
“그거야 이번에 신입이 많이 들어와서…….”
“제 이름은 알고 계십니까?”
“아, 이름…….”
풀네임이라면 아는데 말이지. 설마하니 이안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썼을 리는 없을 테고.
내가 머뭇거리자 이안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번 대련으로 확실히 각인시켜야겠네요.”
“뭘?”
“선배님에게, 제 존재감을요.”
말을 마친 그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대련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가? 제법 살벌하게 들리는 말이네?”
내가 불시에 던진 목검을 가뿐하게 받아낸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이윽고 툭 불거진 그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제 이름은 이……. 클라인입니다.”
“클라인……. 그래, 그럼 시작해볼까?”
목검을 살짝 기울이자 이안이 검 끝을 맞대왔다. 내가 힘을 주어 그의 검 끝을 밀어내는 것으로 대련은 시작되었다.
내가 목검을 든 채로 가만히 서 있자 이안이 먼저 공격을 시도했다. 밀고 들어온 힘을 그대로 흘려보내고, 뒤로 물러나면서 그의 검을 받아주었다.
쉴 새 없이 몰아붙이는 공격에 슬쩍 웃음이 났다. 이안이 대련에 진심이었다는 걸 새삼 깨달은 나는 목검을 잡은 손에 힘을 가했다.
방어만 하던 내가 공격을 시작하자, 덩달아 이안의 검에도 힘이 실렸다.
이안이 손목 쪽을 겨냥해오자 빠르게 한발 물러선 나는 그의 검 끝을 밀어내고 순식간에 그의 목을 겨냥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이안은 좋은 자질을 지닌 검사였다. 신입치고는 월등한 실력이었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로즈벨리아의 실력에 비하면 최소 두 수 정도는 아래라는 것을.
“많이 봐주셨네요.”
말을 마친 이안의 호흡이 들썩였다.
“아냐, 모처럼 재밌는 대련이었어.”
그에 비해 내 호흡은 흔들리지 않았다. 호흡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다른 변화는 있었다.
이안이 제법 좋은 대련 상대였는지 몸이 한결 가뿐했다. 전신을 짓누르던 압박감이 사라지자, 지끈거리던 머리까지 맑아진 기분이었다.
내가 배운 펜싱 에페의 기본은 찌르기였고, 로즈벨리아의 검술은 베는 것이 목적이라 다른 점이 많았지만 로즈벨리아가 왜 소드마스터가 되었는지는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펜싱 칼에 비해 족히 세 배는 더 무게가 나가는 검을 들고 이렇게나 발을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다니. 심지어 로즈벨리아는 이 검의 무게가 가볍다고 여겼었다.
그저 검술의 경지에 올랐다고 볼 수밖에…….
“다음에 또 대련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언제든지.”
잠깐, 이래도 되는 건가?
로즈벨리아는 과거에 대련하다가 에드윈을 다치게 한 이후로, 한동안 그 누구와도 대련하지 않았는데…….
뒤늦게 후회가 밀려들었지만, 내가 한 말을 번복하진 않았다.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이 개운하고도 상쾌한 감각을 놓치기 싫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이안이 환히 웃었다. 그 미소에 죄책감이 콕 밀려들었다.
원작을 읽을 땐 데이지, 에드윈, 로즈벨리아를 응원했을 뿐 이안에게는 별 관심도 없었다.
어디 그뿐이던가. 한때는 데이지의 감정에 이입해서 그녀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그를 미워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에드윈이 그가 끝내 죽음을 맞이했다는 소식을 데이지에게 전할 때, 차라리 잘 됐다고, 이대로 데이지와 에드윈이 잘 됐으면 좋겠다고 바랐었다.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안은 지극히 평범했다. 솔직하게 감정을 느끼고, 그대로 표현했다.
아마도 데이지가 처음 마음에 품었던 이안도 이런 모습이었겠지.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너 오러를 감지할 수 있어?”
“감지만 할 수 있습니다.”
로즈벨리아는 검을 잡고 고작 1년 만에 오러를 감지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엔 오러를 자유자재로 운용할 수 있게 되었고,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올라섰다.
한마디로 그녀는 검술 천재였다.
“언제부터?”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오러를 감지하는 기사 자체가 드문 데다가, 오러를 막 감지한 기사가 오러를 운용할 수 있게 되려면 짧게는 수년 길게는 수십 년의 시간이 걸린다.
원작 후반부, 그러니까 이안이 폭군이 되기까지는 고작 1년도 채 남지 않았다.
냉정하게 이안이 그 안에 소드마스터가 될 수 있을까?
아니, 그건 불가능했다. 당장 이안보다 검술 실력이 좋은 로즈벨리아에게도 불가능했던 일이다. 이안에게 가능할 리 없었다.
원작 중반에 이안에게 어떠한 변화가 생긴 건 확실한데, 역시나 ‘저주’라는 단어가 걸렸다.
저주라면 자의가 아니라 타의라는 건데…….
역시 그게 너를 달라지게 만든 걸까?
“선배님?”
“어?”
“이제 슬슬 나가야 할 거 같습니다.”
이안이 건네든 망토를 받아든 나는 보관함 안에 목검을 가볍게 던졌다.
“그래.”
“그럼 다음 대련은 언제입니까.”
“4일 뒤, 오늘과 같은 시간.”
“알겠습니다.”
내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우리의 결말을 바꿀 수 있을까?
서로 죽이게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있다면…….
그래서 너도, 나도 평범하게 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안의 뒤를 따라 수련장을 빠져나오자, 잔잔한 미풍이 불어왔다. 가슴이 묘하게 울렁였다.
*
‘생각은 해보셨습니까?’
‘그래. 대련 요청은 거절할게.’
‘어째서입니까. 제 실력이 부족한 탓입니까.’
‘너도 네 실력이 나쁘지 않다는 건 알잖아. 객관적으로 네 실력은 아주 좋아. 그래서 나도 너라면 괜찮지 않을까 잠시 고민했던 건데…….’
‘그럼 어째서 대련을 거부하시는 겁니까.’
‘그냥 내 신념이야. 나는 기사단 내 그 누구와도 대련하지 않기로 마음먹었고, 너를 특별 취급하면서까지 그 신념을 깨고 싶지 않아.’
불현듯 눈을 떴다. 살짝 벌어진 커튼 사이로 아슴푸레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꿈을 꾼 건가?
마치 로즈벨리아와 이안이 내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듯한…….
“장소도 수련장이었지.”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던 곳 또한 공교롭게도 수련장이었다. 축제가 끝나던 날 이안이 내게 말을 걸어왔던 바로 그 수련장.
“대체 뭐지?”
그냥 개꿈이라고 치부하고 넘기기엔 왜인지 찝찝했다.
만약 내가 본 게 원작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로즈벨리아와 이안의 이야기라면?
진짜 로즈벨리아였다면, 정말 그렇게 말하면서 거절했을 것 같다는 예감이 점차 확신처럼 굳어져 갔다.
원작에서 로즈벨리아가 대련을 거절한 게 맞다면…….
“원작이 이미 바뀌고 있는 건가? 바꿀……수 있는 건가?”
전신에 기묘한 전율이 흘렀다. 원작을 바꿀 수 있다는 기대감 하나로 심장이 마구잡이로 뛰었다.
아냐, 설레발 떨긴 일러. 고작 꿈일 뿐이잖아.
원작을 바꿀 수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수 있는 건 그날이다. 원작 여주인 데이지와 원작 남주인 이안이 만나는 날.
그날 내가 원하는 대로 원작을 바꾸게 된다면, 그땐 모든 게 확실해지겠지.
다시 잠을 청하려 했지만 마음이 제멋대로 날뛰는 탓에 쉬이 잠들 수 없었다.
옷을 갈아입고 조용히 저택에서 빠져나온 나는 후작저 외곽에 있는 숲으로 향했다.
인적이 드물어 로즈벨리아도 종종 오러를 운용하는 연습을 하러 찾던 곳이었다.
“그 오러라는 거, 나도 쓸 수 있으려나.”
따로 익히지 않아도 몸에 밴 것처럼 자연스럽게 나오는 검술처럼 오러를 운용하는 것도 그럴까?
마수 토벌에서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로즈벨리아는 오러를 사용했었다.
백색 기사단에 입단한 이래로 마수 토벌 명단에 빠지지 않고 뽑혔던 로즈벨리아가 조만간 있을 토벌에 참여하는 건 자명한 일이었다.
오러를 쓰는 상황이 없길 바라야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연습을 해야겠지.
검을 뽑아 들자, 그 위로 은은한 여명이 내려앉았다.
로즈벨리아의 기억을 따라 천천히.
몸에 흐르는 오러를 느끼며 검으로 흘려보내자 이내 검에 하얀빛이 감돌았다. 그러곤 가볍게 휘둘렀을 뿐인데 나무가 두 동강이 났다.
“됐다. 이게 이렇게 쉬운…….”
뒷말은 채 이을 수 없었다. 나는 금방이라도 타들어 갈 것처럼 조여오는 목을 움켜쥐었다.
뭐지? 왜 이렇게 목이 뜨겁지?
울컥 토기가 밀려드는 듯한 감각과 함께 기침이 튀어 나왔다.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내린 내 시야에 들어온 건,
“왜…….”
손바닥 가득 묻어난 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