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혹시 잊으셨습니까?
(4/54)
4화. 혹시 잊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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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혹시 잊으셨습니까?
2023.02.13.
대련……이라고? 대련이라는 게 그…….
잠시 온 세상이 점멸되는 것처럼 눈앞이 아득했다. 수차례 눈을 깜빡이고 나자 차츰 이성이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맙소사.
그러니까 이안이 대련해달라고 한 걸 고백한 걸로 착각한 거야?
“아아, 대련. 그랬지. 대련해달라고 요청한 신입이 있었지.”
태연한 척 대답했지만, 애써 끌어올린 입매가 가볍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로즈벨리아의 성격상 끈질기게 구애해오는 이안이 성가셔서 타국으로 망명한 걸 수도 있지 않냐고?
이 소설은 몇 번이나 마음을 거절당한 남자가 끝내 본인을 떠난 여자에게 복수하는 거 아니냐고?
새삼 김칫국 많이도 들이켰구나. 내가 로즈벨리아에게 이런 흑역사를 남기다니.
쥐구멍 어디 없나. 접싯물에 코라도 박을까.
“네. 그게 접니다.”
“그래, 신입 네가 내게 대련을 해달라고 했다고…….”
그럼 그때 호흡을 어쩌고저쩌고, 그 얘긴 무슨 뜻이지?
“정말로 제가 기억이 안 나시는 겁니까?”
무어라 대꾸하려는 찰나, 한껏 일그러진 이안의 미간이 눈에 들어왔다.
설마 화가 난 건가?
원작 속 결말대로라면 이안은 내가 죽이고, 나를 죽이는 상대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원작대로 흘러가는 건 피해야 했다.
당장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으니, 적어도 같은 기사단에 있는 동안만큼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상황을 지켜보려고 했는데…….
나는 대뜸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픈 척 관자놀이 부근을 꾹꾹 누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실 내가 최근에 좀 크게 앓았는데, 전야제 일이 영 가물가물해서 말이야.”
이안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역시나 내 말을 온전히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전야제에 열린 검투 대회에서 제가 연승을 하고 있었고, 선배님이 도전하셨습니다.”
전야제마다 열리는 검투 대회는 로즈벨리아의 기억을 통해서 본 적 있다.
모두 똑같은 투구를 쓰고, 철저히 신분을 숨긴 채로 참여하는 검투 대회였고 참가에 제한도 없었다.
최종 우승자만이 얼굴과 신분을 공개하고 이듬해 축제까지 그 이름이 광장 한복판에 남게 된다.
무명의 기사들에게는 이름을 알릴 기회가 되고, 기사단 소속 기사들에게는 자신이 속한 기사단의 명예를 드높일 수 있는 대회였다.
“…….”
“선배님은 저를 단숨에 제압하시고는 기권하셨고, 제가 부전승으로 올라갔습니다만……. 저도 그 길로 기권하고 선배님의 뒤를 쫓아 대련 요청을 드린 겁니다.”
“나라는 걸 어떻게 알았어?”
그저 호기심에 물은 거였는데, 별안간 이안의 낯빛이 붉어졌다.
“처음에는 당연히 선배님인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검을 맞댔던 그 감각이 너무 강렬해서 몰래 뒤를 밟……았고, 투구를 벗은 모습을 보고 선배님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선배님은 생각해보시겠다고 했고요.”
말을 마친 이안이 멋쩍은 듯 큼큼거렸다.
고귀한 황자 신분으로 누군가의 뒤를 밟은 게 민망했나?
“내가 단단히 착각했네, 미안해.”
“그럼 대답……은요?”
“뭐, 착각한 게 미안해서라도 한 번 정도는 대련을…….”
잠깐, 아직 먼 미래라고는 하지만 이안과 로즈벨리아는 서로가 유일한 적수였다.
라이벌 구도를 피하려면 이런 대련도 피해야 하는 건가?
로즈벨리아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모르니, 어느 쪽을 피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이렇게 흔쾌히 수락해도 되는 건가? 그냥 무를까?
“정말입니까?”
여태 들은 이안의 목소리 중에 가장 격양된 목소리였다. 나는 시선을 들어 올려 이안의 얼굴을 보았다.
눈에 띄게 화색이 도는 낯빛을 보니 지금 말을 번복했다간 도리어 사이가 나빠질 것 같았다.
그래, 이렇게나 원하는데. 대련하면서 사이가 더 가까워질 수도 있고.
마침내 결단을 내린 나는 이안을 향해 씩 웃어 보였다.
“나와의 대련을 감당할 수 있다면 말이야.”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감당은 제 몫이니 봐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원작에선 이안이 황태자 책봉식 이후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묘사됐다.
풍기는 분위기도 달라지고, 어느 순간 범접할 수 없는 검술 실력을 지니게 되었다고…….
「“저, 황태자 전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러니까……. 제가 전하고자 하는 말은……. 제가……. 전하를…….”
허공을 떠돌던 깊은 한숨 소리가 내 머리 위를 건드렸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자, 온기 한 점 없는 서늘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이안이 보였다.
믿고 싶지 않았는데 이제는 믿어야 했다. 눈앞의 그는 내가 알던, 내가 좋아하던 그와는 분명 다르다는 사실을.
“저는 저주받은 몸입니다.”
“예? 그게 무슨…….”
텅 빈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절로 한기가 밀려든 탓이었다.
“그래서 그 누구도 좋아할 수 없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그뿐입니다.”」
원작 내용을 더듬어보던 나는 눈앞의 이안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애써 자제하려는 듯하지만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이런 애가 장차 냉혈한에 전쟁에 미친 폭군이 된다고?
내가 훤히 꿰고 있는 원작 속 이안과 내 앞에 있는 이안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하기야 이안의 검술 실력이 갑자기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올랐다는 것도 그렇고, 데이지 앞에서 저주라는 단어 선택을 한 것도…….
역시 황태자 책봉식 전후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원작을 읽을 때도 그런 의문을 품긴 했지만, 원작 속 최애가 이안이 아닌지라 그 의문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었다.
“선배님?”
“어?”
“그럼 내일 뵐 수 있는 겁니까.”
“……그래, 장소는 별관 근처 수련장이 좋을 거 같고 단원들이 없는 시간이었으면 좋겠는데.”
“알겠습니다. 그럼 아침 일찍 오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려던 내가 잠시 멈칫했다.
설마 로즈벨리아가 종종 아침 일찍 와서 연습하는 것까지 알고 있나?
“그래.”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인 이안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 그의 뒷모습이 까만 점이 되고 나서야, 긴장이 풀린 건지 잇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고백을 거절하러 왔다가 대련 요청을 받아들이게 될 줄이야.
괜찮은 거겠지?
*
나는 어둠에 잠긴 천장을 멍하니 응시했다.
이곳에서 눈을 뜬 뒤, 처음으로 내가 내린 결정이라 그런지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 선택이 가져올 파장을 알 수 없어 두렵기도, 설레기도 했다.
내가 과연 원작을 바꿀 수 있을까? 바꿀 수 있다면 어떻게 바꿔야 할까? 내가 이곳에서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뭐지?
그런 사념이 꼬리에 꼬리를 문 탓에, 짧은 새우잠을 청하고 일찍 대련 장소에 나왔다.
머리를 질끈 묶고 몸을 천천히 풀고 있는데, 창밖으로 스며들던 여명이 어느 순간 강하게 밝아왔다. 굳게 닫혀 있던 수련장의 문이 열린 건 바로 그 찰나였다.
당연히 이안일 줄 알았는데, 모습을 드러낸 건 다소 앳된 인상의 기사였다.
쭈뼛쭈뼛하게 다가오는 모양새도 그렇고, 낯익은 얼굴이 아닌 거 보니 이번에 이안과 함께 들어 온 신입 중 한 명인 것 같았다.
“저기 선배님…….”
“무슨 일이지?”
“그게……. 진짜로 아침에 계실 줄은 몰라서……. 잠시만요.”
“응? 뭐라고?”
동글동글한 인상의 기사는 양손으로 제 뺨을 두들기곤, 짧게 심호흡했다.
“저……. 선배님의 대답을 들으러 왔습니다.”
“대답? 무슨?”
어째 이 대화, 기시감이 느껴지는데?
“……혹시 잊으셨습니까? 전야제 말입니다.”
이건 또 무슨 말이지?
대체 그날 로즈벨리아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미안한데, 내가 그날 일이 잘 기억나질 않아서 말이야.”
“예?”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속으로 꾹꾹 삼켰다. 내가 곤란하다는 듯 이마를 매만지자, 신입의 눈이 동그래졌다.
“내가 최근에 몸이 좋질 않았는데, 이상하게 그날 기억만 가물가물하거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줄래?”
“그게……. 제가…….”
목소리가 어찌나 작은지 땅속으로 기어들어 갈 기세였다.
“뭐라고?”
답답한 마음에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자, 신입이 순식간에 저만치 멀어졌다.
“아, 제 이름은 시몬입니다. 혹시나 해서…….”
“그래, 시몬. 괜찮으니까 말해 봐.”
“저는 그날…….”
또 대련 요청이나 했겠지, 뭐.
“선배님께 고백을……. 그러니까……. 저와 교제해달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