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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전야제 (2) (3/54)


3화. 전야제 (2)
2023.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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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러워하긴. 너 여태 고백 많이 받았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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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그랬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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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다 거절했지만.”

이안이 로즈벨리아에게 고백을?

하기야 원작 초반부를 떠올려보면, 이안이 처음부터 냉혈한인 건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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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무를 생각 없습니다. 거절이어도 괜찮으니까 꼭 제대로 된 대답을 들려주십시오. 이런 식의 회피는 선배님답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안이 고백한 거라고 가정해보니, 제법 그럴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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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감각은 생전 처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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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였지만 선배님과 호흡을 섞었던 그 순간이 잊히지 않습니다.’

이 구간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이안의 말만 놓고 보면 로즈벨리아가 어떠한 여지를 준 것처럼 보였다.

호흡을 섞었다는 건 대체 무슨 뜻이지?

로즈벨리아는 여태 누군가를 좋아한 적 없었다. 에드윈의 말마따나 고백을 꽤 받긴 했지만 그 마음에 응한 적도 없었다. 그녀에게는 오로지 검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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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은 좋던데, 이번엔 진지하게 고려해 보지 그래? 너도 슬슬 결혼 생각할 나이잖아.”

로즈벨리아는 채 스무 살도 되지 않은 나이였다. 이전 생에서도 결혼은 언제 하냐는 독촉에 시달렸던 게 떠오르자 절로 불쾌감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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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결혼할 나이잖니?’

저택에서 마주쳤던 올리비아의 말까지 오버랩되자, 미간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어딜 가나 그놈의 결혼에 목매는 건 똑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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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윈, 네 연애에나 신경 쓰지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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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운명론자잖아. 사랑은 신경을 쓴다고 되는 게 아니라 저절로 찾아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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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평생 안 찾아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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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어쩔 수 없지. 나는 내 운명을 그저 기다릴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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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러든지.”

어깨를 으쓱이고 돌아서려던 내가 멈칫하며 에드윈을 올려다보았다.

잠깐, 그날이 언제지?

원작에서 남주 이안와 여주 데이지가 처음 만나는 날. 그날이…….

나는 원작 도입부를 찬찬히 더듬어보았다.

[축제가 끝났다. 꼬박 일주일이 지나고 나서야 들뜬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그래, 축제가 끝나고 일주일.

<그 겨울에 핀 꽃>은 내가 울고 싶을 때 즐겨 읽던 책이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데이지의 사랑에 의문을 가졌었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바깥 생활이 자유롭지 못했던 데이지가 이안이라는 변수를 만났고, 그것이 지루했던 삶의 활력이 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곱씹을수록 데이지가 이안을 사랑한 건 아니라는 쪽으로 기울었다.

만약 이안이 아니라 에드윈이 데이지를 구해주었다면 데이지는 에드윈을 마음에 품었을 거란 확신까지 들었다.

데이지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나’에 더 빠져 있었다고나 할까.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서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말을 듣고 자란 데이지에게는 뭐든 집착할 대상이 필요했던 거다.

그걸 깨닫고 나서는 데이지란 존재가 더 큰 연민으로 다가왔었다.

만약 그날 데이지를 구해주는 게 이안이 아니라 에드윈이라면?

내가 원작을 읽으면서 느낀 게 맞다면…….

어쩌면 데이지와 에드윈의 운명이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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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택에 돌아온 나는 에밀리를 로이에게 맡겨두고, 곧장 본관 메인 홀에 들어섰다.

고개를 숙이는 하인들을 지나쳐 계단에 발을 디디려는 찰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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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님, 지금 오시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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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눈앞에 앳된 소년과 자그마한 소녀는 로즈벨리아의 이복동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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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든, 비비안.”

로즈벨리아는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지만, 동생들을 무척 귀여워했다.

하기야 로즈벨리아를 볼 때마다 눈을 반짝이는 케이든과, 마주칠 때마다 달려와 폭 안겨 오는 비비안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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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나 오늘 언니랑 자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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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안, 누님을 귀찮게 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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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꿈에 무서운 괴물이 나왔단 말이야. 언니는 나쁜 괴물들 다 물리쳐주는 사람이잖아.”

백색기사단의 주 임무 중 하나가 제국 경계 지역으로 마수를 토벌하러 떠나는 것이었다. 그걸 두고 나쁜 괴물들을 물리친다고 표현한 모양이었다.

여섯 살에게 마수라는 말이 어려울 수 있지.

나는 내 다리를 껴안은 비비안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옅은 초록빛 드레스를 입은 비비안은 마치 요정 같아, 살짝 경직됐던 입매가 사르르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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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안. 꿈 때문에 무서운 생각이 드는 건, 네 마음이 그만큼 나약하기 때문이야.”

케이든의 한숨 섞인 목소리에 비비안의 눈꼬리가 축 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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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언니랑 자면 하나도 안 무서울 거 같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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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은 일로 누님을 귀찮게 하지 마, 비비안.”

비비안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바뀌자, 나는 케이든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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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든, 그만. 비비안이 울겠어.”

어느새 내 뒤로 몸을 감춘 비비안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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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안이랑 같이 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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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 비비안 네가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온다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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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자신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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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없다면 포기해, 비비안. 어머니에게 허락을 구하는 건 네 몫이니까.”

나는 케이든의 말에 풀이 죽은 비비안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 방으로 향했다.

마침 2층에 있던 앤이 계단을 오르는 나를 발견하곤 내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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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기사단에 다녀오신 거죠?”

앤이 금방이라도 잔소리를 쏟아부을 기세라, 나는 다급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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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긴 했는데 아무것도 안 했어. 잠깐 누구 좀 만나러 갔다 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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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요? 가셔서 수련도 안 하고 돌아오셨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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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 옷도 깨끗하잖아.”

옷자락을 구석구석 살펴본 앤이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폭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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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씻고 나오세요. 욕탕에 따뜻한 물 받아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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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방에 들어서자마자 앤에게서 얇은 실내복을 건네받은 나는 곧장 욕실로 들어섰다. 몸이 노곤해질 무렵에야 욕탕에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앤이 젖은 머리칼을 말려주었다.

몸은 한결 개운한데 머릿속이 아직 복잡한 탓인지 자꾸만 한숨이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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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디저트라도 가져다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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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오늘은 일찍 잘 거니까 그만 나가봐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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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그럼 쉬세요.”

비비안은 끝내 올리비아의 허락을 받지 못한 모양이네.

굳게 닫힌 방문을 바라보던 나는 로즈벨리아의 부친인 헤르만을 떠올렸다.

케이든과 비비안, 심지어 올리비아까지 마주쳤는데 여태 헤르만을 보지 못했다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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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자기 딸인데, 정말 무심하구나.”

하기야 로즈벨리아도 헤르만에게 큰 유대감을 갖고 있진 않았다. 애초에 이 가문에 별다른 미련도 없었다.

그러니 기사단에서 숙소 생활을 해도 되는데, 굳이 올리비아가 버티고 있는 저택에 머무른 연유는…….

역시나 케이든과 비비안 때문이려나.

로즈벨리아는 동생들을 아꼈기에, 올리비아가 본인을 견제한다는 걸 알면서도 갈등을 조장하지 않았다.

새어머니와 집안에서 정치싸움을 하기보단 본인이 묵과하는 쪽을 택한 것이었다.

그녀는 알력 싸움과는 거리가 먼, 그저 기사라는 신분에 충실한 우직한 기사였다.

본인이 기사라는 것에 굉장한 자부심이 있는 아주 멋있는 사람인데…….

그럼 이 몸 안에 존재하던, 진짜 로즈벨리아는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불현듯 그 사실을 떠올리자 숨이 턱 막혀왔다.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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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벨리아!”

제자리에 우뚝 멈춰서자 지척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향해 달려오는 이는 에드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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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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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정신을 어디에 두고 다니는 거야. 아까부터 불렀는데 대답도 안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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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랬어? 미안.”

간밤에 꿈을 꿨다. 분명 꿈을 꾸긴 했는데, 어째 명확하게 기억나는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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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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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그 아이와 닮았지만 달라. 그러니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언뜻 그런 말을 들은 것도 같았는데.

꼭 사고가 났을 때 들었던 그 목소리와 비슷했던 것 같기도 하고…….

대체 뭐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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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이랑은 어떻게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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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어떻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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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얘기 안 해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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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가 얘기하려고.”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꾹 누르며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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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사람 애간장 태우지 말고 빨리해. 설마 진지하게 고민 중인 거야?”

나를 보는 에드윈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알 거 없다는 듯 손사래를 치자, 에드윈이 어차피 거절할 거 아니냐며 꿍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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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맞다. 사흘 뒤에 나한테 시간 좀 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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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뒤?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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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묻지 말고, 나랑 같이 광장에 좀 나갔으면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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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이야, 통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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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보.”

나와 그날 광장에 가지 않으면 너는 분명 후회할 거야, 라는 눈빛을 마구 쏘아주자 에드윈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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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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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시간은 다시 알려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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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저기 신입 간다.”

에드윈의 손끝이 가리킨 곳은 연무장 앞이었다. 여느 때처럼 장난을 치는 줄 알았더니, 정말로 이안이 있었다.

그래, 미룬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니까 차라리 빨리 마무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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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나 가볼게.”

연무장 안에 들어가려던 이안도 때마침 나를 발견한 건지, 제자리에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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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은 둥글게, 알지? 신입 상처받지 않게 해.”

나는 장난기 가득한 에드윈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이안에게로 걸어갔다.

잠깐?

원작이 시작되기 전에 이안이 로즈벨리아에게 고백을 했다면, 로즈벨리아는 분명 거절했을 테고…….

만약 거기서 끝이 아니라, 이안이 계속 로즈벨리아를 좋아했다면?

원작을 읽을 때도 로즈벨리아가 기사단장이 되어달라는 이안의 권유를 몇 차례나 거절했다는 대목에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로즈벨리아 성격상 끈질기게 구애해오는 이안이 성가셔서 타국으로 망명한 걸 수도 있지 않나?

그렇다면, 결국 이 소설은 몇 번이나 마음을 거절당한 남자가 끝내 본인을 떠난 여자에게 복수하는…….

나는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에이, 설마.

원작은 데이지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짝사랑 얘기라고. 원작 속에 그런 이면이 숨겨져 있는 건 절대 아닐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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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인사를 건넨 이안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기대감으로 일렁이는 듯한 눈을 바라보자 죄책감이 스멀스멀 밀려들었다.

거절해도 괜찮은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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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신입. 잠깐 할 말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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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르겠습니다.”

주변에 오가는 이들이 많아 다소 외진 성벽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안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내 뒤를 따랐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곳에 다다른 나는 호흡을 짧게 가다듬곤, 이안을 마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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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대답할 마음이 드신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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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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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편하게 말하라고 해놓고, 정작 네 표정이 경직되면 어쩌자는 건데?

차마 따져 물을 수 없는 말을 속으로 삼킨 나는 재차 호흡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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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나한테 그런 마음이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그럴 만한 계기가 생길 정도로 우리가 오래 본 사이도 아니잖아? 그래서 마음이 깊을 거라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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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마음일 거라 단정 짓지 마십시오. 오래 봐 왔다고 그 사람의 진가를 다 아는 게 아니잖습니까. 알아 온 시간이 중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가만히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큰 파도가 코앞에서 일렁이는 것 같았다.

이안의 눈동자에 잠시 사로잡혀 있던 나는 이내 퍼뜩 정신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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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야 하지.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내가 지금 마음이 아주 바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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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언제든 괜찮습니다. 선배님에게 여유가 생길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언제든 괜찮다니. 여유가 생길 때까지 기다리겠다니.

로즈벨리아에게 이렇게나 깊은 마음이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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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나는……. 지금도 그렇고 나중에도 그렇고, 당분간은 누군가를 만날 여유가 없을 거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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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내 말을 진지하게 경청하던 이안의 얼굴 위로 당혹감이 번졌다.

한껏 좁혀진 미간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묻는 듯하자 머릿속이 대번에 새하얘졌다.

뭐지, 이 싸한 기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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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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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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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고백에 대한 대답을 하는 건데…….”

이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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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저를 다른 신입과 착각이라도 하신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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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신입? 착각?

이안의 말을 천천히 곱씹던 나는 다급히 숨을 멈추었다.

짧은 침묵을 깬 건, 이안의 옅은 한숨 소리였다. 이윽고 한층 낮아진 그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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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신입이랑 착각한 건지 모르겠지만, 제가 선배님께 요청한 건 대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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