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전야제 (1) (2/54)


2화. 전야제 (1)
2023.02.06.


천천히 뒤를 돌자, 짙은 녹색 드레스 차림에 갈색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린 여자가 보였다.

한때 사교계의 꽃으로 군림하던 올리비아 라일리에서 올리비아 윈터스가 된 여자.

바로 로즈벨리아의 새어머니였다.


“아.”

낮은 탄성을 내뱉는 사이 올리비아가 우아한 걸음걸이로 내게 다가왔다.


“로즈?”

“어머니.”

“여기서 뭘 하는 거니?”

“조금 걷고 있었어요.”

“그래? 오늘은 모처럼 한가한가 보구나.”

걸음을 멈춘 올리비아가 나를 향해 입꼬리를 살짝 올려 보였다.


“쉬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기사단에 가 봐야 할 거 같아요.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잠깐, 로즈.”

몸을 다시 돌리자 여전히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는 올리비아가 보였다.


 


“옷차림에 조금 더 신경을 쓰도록 하렴. 너는 윈터스 후작 가문의 영애고, 곧 결혼할 나이잖니?”

올리비아가 입고 있는 풍성한 드레스와는 다르게 내가 입고 있는 옷은 드레스라기보다는 원피스에 가까운 형태였다.

이 옷차림이 뭐가 어떻다는 거지?

보형물 없이 간편하게 입을 수 있어, 로즈벨리아 뿐만 아니라 젊은 귀족 영애들도 평상복으로 즐겨 입는 옷이라고 알고 있는데?

무어라 반박하려던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한 번 달라붙은 입술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모든 감각이 더는 대화하지 말고 일단 자리를 피하라고 경고하는 듯했다.


“언제 마담을 한번 부르시죠, 주인 마님.”

올리비아의 곁에 서 있던 그녀의 전담 하녀 마가렛이 말했다. 올리비아는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가벼이 끄덕이곤 걸음을 떼었다.


“가자꾸나.”

마찬가지로 그들을 등진 채로 걷던 나는 이내 실소를 터뜨렸다.

단 한순간도 눈은 웃지 않았어.

로즈벨리아의 기억 속에서도 올리비아는 늘 친근하게 다가왔지만, 로즈벨리아는 그녀를 경계했다.

하기야 이렇게나 싸한 기분이 드는데, 어떻게 웃는 낯만 보고 쉽게 마음을 열겠어?

올리비아가 대놓고 드러내진 않았지만 내게 적의를 가지고 있다는 건 감지할 수 있었다. 이 몸이 느낀 감이니 맞을 터였다.

로즈벨리아는 1년 전, 오러를 온전히 운용할 수 있게 되면서 오감을 비롯한 신체 능력과 육감까지도 탁월하게 향상되었다. 현 제국 내 유일한 소드마스터인 셈이었다.


“나중에는 이안도 소드마스터가 되긴 하지만…….”

그래서 로즈벨리아와 이안, 단 두 사람만이 서로에게 적수가 되었다. 호각을 겨룰 수 있는 유일한 라이벌.

만약 내가 원작 속 로즈벨리아와는 다르게 레노르 왕국으로 망명하지 않고 제국에 남는다면…….

이안과 적수가 될 일도 없거니와 애초에 전쟁터에서 맞붙을 일도 없는 거 아닌가?


“아가씨?”

누군가의 부름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눈앞에 있는 소년은 마구간 지기인 찰스의 아들, 로이였다.


“아, 로이.”

정처 없이 걷다가 마구간 앞까지 온 것임을 깨달은 내가 멋쩍게 웃었다.

로즈벨리아도 생각에 잠긴 채로 걷다 종종 마구간으로 향했으니, 이 몸에 밴 습관이 이끈 것이리라.


“에밀리를 꺼내올까요.”

“그래.”

로즈벨리아가 왜 그런 선택을 한 건지는 점차 가닥이 잡히겠지.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아가씨, 여기요.”

로이에게서 에밀리의 고삐를 건네받은 나는 단숨에 안장 위로 올라탔다.

일단은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하나씩, 차근차근…….

그러려면 가장 먼저 전야제에 이안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부터 알아내야겠지.


“로이, 앤에게 기사단에 다녀오겠다고 전해줘.”

돌아오면 또 한 소리 듣겠네.

입매가 부드럽게 풀어지는 게 느껴지는 찰나, 나를 곁눈질로 슬쩍 보고 있던 로이가 화들짝 놀라 시선을 떨구는 게 보였다.

왜 저러지?


“로이?”

“아, 알겠습니다, 아가씨.”

 

*



“로즈벨리아, 너 오늘 조금 이상하다?”

루카스가 툭 던진 말에 눈 밑이 가늘게 떨려오는 게 느껴졌다.


“뭐가? 옷차림이?”

“응? 갑자기 옷 얘기가 왜 나와?”

이게 아닌가? 그럼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

기억을 더듬는 사이, 고개를 살짝 기울여 보인 루카스가 재차 입을 열었다.


“오늘 입고 옷 정도면 평범하잖아. 예전에는 더 화려한 차림으로도 기사단에 왔으면서.”

맞다, 그랬지.

로즈벨리아가 속해있는 백색 기사단은 복식에 한해서는 자율성을 부여하는 편이었다. 수업을 들을 때나 훈련이 있을 때만 단원복을 잘 챙겨 입으면 문제없다는 분위기랄까.

그 기억을 모조리 읽어놓고도, 이 옷차림으로 기사단에 들어오는 걸 잠시 망설였었다.

무의식이 이래서 무섭다니까. 하마터면 말실수할 뻔했네.


“그럼 뭐가 이상하다는 건데?”

“차림새를 보아하니 오늘은 수업도 없는 거 같은데……. 수련장에도 안 가고, 아까부터 내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거 같아서 말이야.”

그거야 오늘 기사단에 나온 동기 중에 그나마 네 체구가 크니까 그렇지.

난 지금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오늘은 개인 수련 안 할 거거든. 그나저나 에드는 대체 언제 오는 거야?”

“늦어도 오후에는 돌아온다고 했어.”

“전야제에 나랑 에드윈이 같이 있는 거 분명히 봤다고 했지?”

루카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다니까.”

기사단에 도착하자마자 동기들을 찾아 전야제에서 나를 본 적 있냐 물었었다.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루카스만이 나와 에드윈이 함께 있는 모습을 봤다고 했다.

에드윈에게서 아주 사소한 정보라도 얻어 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냥 이안한테 가서 대놓고 물어볼까?

나는 불쑥 치솟는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안은 내가 취했다고 둘러댔던 걸, 대답하기 싫어서 시치미를 떼는 거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일에 대해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털어놓으면? 만에 하나 이안이 그때부터 작정하고 나를 속이려 든다면?


“설마 속이기야 하겠어?”

“로즈벨리아, 방금 나한테 뭐라고 했어?”

뻑뻑한 눈가를 어루만지던 나는 루카스를 향해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 일단은 에드윈을 먼저 만나야 해.

에드윈에게서 그날 일에 대한 작은 단서 하나라도 얻어낸다면, 이안을 다시 마주하는 게 한결 수월할 터였다.


“루카스!”

“부단장님이 부르신다. 나 간다.”

붙잡을 새도 없이 루카스가 본관 앞으로 뛰어갔다.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인적이 드문 성벽 쪽으로 향했다.

여기에 이안이 나타날 리는 없겠지?

성벽 아래를 거닐던 나는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로즈벨리아의 기억에 따르면 성벽 너머에는 바다가 있었다.

그녀의 기억을 더듬던 나는 탁 트인 바다가 보고 싶다는 욕망에 금세 잠식되었다.

위험한 일인 건 알지만 이 몸이라면 분명 괜찮을 거야. 로즈벨리아도 이따금 성벽에 올라앉아 바다를 보곤 했으니까.

비교적 성벽이 낮은 지대를 익숙하게 찾아낸 나는 그 위에 올라섰다.

탁 트인 바다를 보니,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드넓은 바다, 바위에 부서지는 하얀 포말.

선선한 바람을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자 청량한 바다 내음이 코끝까지 밀려 들어왔다.

이렇게 밝은 대낮에 이런 해방감을 만끽한 게 얼마 만인지.

아직 모든 것이 혼란스럽지만, 지금 이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살아 있는 게 감사할 지경이었다.


“또 거기 올라가 있는 게냐.”

이 목소리는.

빠르게 몸을 돌린 내 눈에 들어온 건, 머리와 수염이 희끗희끗한 백색 기사단의 단장 가브리엘이었다.

가브리엘은 여느 때처럼 푸근한 미소를 띤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단장님만 모른 척해주시면 돼요.”

“얼른 내려오거라.”

“네네. 안 그래도 지금 내려가려고…….”

그대로 뛰어내리려던 내가 멈칫했다. 가브리엘 뒤로 빠르게 다가오는 저 얼굴은 분명…….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성벽 아래로 다가온 이안이 내게 손을 뻗었다.


“잡아드릴까요?”

“아니.”

때마침 불어오는 거센 해풍에, 금빛 머리칼이 이리저리 휘날렸다. 거추장스러운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자 이번엔 치맛자락이 말썽이었다.

치맛자락을 붙잡느라 잠시 주춤한 사이, 아래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험합니다, 선배님.”

시선을 내리자 이안이 어정쩡한 자세로 팔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두 발로 안전하게 착지한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너 방금 뭐한 거야?”

“위험해 보여서 도움을 드리려고 한 겁니다만.”

이안은 도리어 그게 무슨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원작에서는 분명 감정도 없이 메마른 느낌이었는데.

그래서 귀염뽀짝한 원작 여주의 애정 공세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었잖아.

피도 눈물도 없는, 그야말로 전쟁에 미친 폭군이었다고!


“입을 막을 사람은 내가 아니라 이쪽인 듯한데?”

“인사가 늦었습니다, 단장님.”

이안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자, 가브리엘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내저었다.


“제가 선배고 이쪽은 후배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성벽 위로 올라가는 게 금기시되는 일입니까?”

“원래는 그렇지. 이전에 아래로 추락해서 다친 단원이 있었거든.”

“저는 괜찮잖아요, 단장님.”

“네가 뛰어나다는 건 알지만 내가 늘 너에게 당부한 것이 있지?”

가브리엘이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턱수염을 매만졌다.


“네. 방심하지 말라고요.”

가브리엘은 누구보다 로즈벨리아를 아꼈다. 로즈벨리아가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올라선 걸 알기 전부터, 그녀의 재능을 흠모하고 본인의 뒤를 이어 기사단장이 되기를 종용했다.


“그래,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방만하게 굴어선 안 된다. 네가 마음만 제대로 먹으면 언제든 내 자리를…….”

“단장님, 그 얘기는 다음에 하시죠.”

서둘러 말을 끊자 호기심 어린 이안의 시선이 뺨 위로 닿는 게 느껴졌다. 가브리엘은 나와 이안을 번갈아 보더니 허허, 하고 웃었다.


“멋쩍은 게냐.”

“뭐, 듣는 귀가 있으니까요. 조금?”

“입단속은 네가 잘 시키거라.”

“아니, 단장님…….”

이렇게 둘만 남겨두고 가시면 안 되는데요?

가브리엘이 멀어지길 기다렸다는 듯 이안이 내 앞을 막아섰다.


“선배님.”

“어?”

분주하게 퇴로를 찾던 내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안과는 제법 가까운 거리였다. 수련에 열심히 임한 건지, 땀에 젖은 검은 빛의 머리칼이 바람결에 살랑였다.

오묘한 색감의 머리칼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눈앞에 깊고도 넓은 바다가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이안의 눈동자는 조금 전 나에게 해방감을 안겨주었던 바로 그 심해와 같은 색이었다.


“이전에 듣지 못했던 대답을…….”

맞다, 지금 이렇게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지.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다급히 연무장을 가리켰다. 때마침 누군가 그 앞을 지나가는 것 같기도 했다.

잠깐, 빨간 머리?


“미안, 신입. 내가 급한 일이 생각나서. 얘기는 다음에 하자.”

다행히 이안은 쏜살같이 내달리는 내 뒤를 따르진 않았다. 연무장 앞에 서서 숨을 고르자, 신입들이 인사를 건네왔다.

흔치 않은 적발이라 에드윈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연무장 근처에 빨간 머리를 가진 사람은 없었다.

잘못 본 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내가 방향을 틀어 마구간으로 향하려던 찰나였다.


“로즈?”

반가운 기색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 곧바로 직감했다. 붉은 머리를 휘날리며 내 앞을 가로막은 이 남자가 바로 원작의 서브남 에드윈이라고.


“에드?”

“그래, 네가 눈이 빠지도록 찾았다던 에드윈이다.”

“눈이 빠질 정도로 찾은 건 아니고…….”

“그래? 그럼 나는 이만.”

“너한테 물어볼 게 있긴 해.”

원작 여주인 데이지와 더불어 애정하던 캐릭터인지라 나도 모르게 에드윈의 얼굴을 오목조목 살폈다. 로즈벨리아의 기억 속에서 수없이 본 얼굴인데도 직접 마주하는 건 처음이라 그저 신기했다.

이쯤 되니까 원작 여주인 데이지도 궁금하네.


“무슨 일 있어?”

“어?”

“표정이 심각해 보여서.”

에드윈은 로즈벨리아의 기사단 동기이자 절친한 친우였다.

로즈벨리아의 속내를 알아주고 이해하는 것 또한 에드윈뿐이고, 그녀가 온전히 신뢰하는 인물 또한 그였다.

그러니 이 정도는 말해도 되지 않을까.


“그게……. 나 최근에 있었던 일이 기억이 안 나.”

“뭐?”

“내가 하루를 꼬박 앓았잖아. 이상하게 그즈음에 있었던 일만 기억이 안 나네.”

“의원은 뭐라는데?”

“아무 이상 없대.”

“진짜 이상 없는 거 맞아? 너 더 쉬어야 하는 거 아니야?”

미간을 작게 찌푸린 에드윈이 내 이마에 손을 짚었다.


“열은 없는데.”

“아픈 건 다 나았으니까.”

“정확히 어떤 게 기억 안 나는데?”

“전야제에 있었던 일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 루카스가 너랑 내가 같이 있는 걸 봤다는데, 맞아?”

내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에드윈이 고개를 갸웃했다. 기대감으로 일렁였던 마음이 단숨에 식었다.


“너랑 내가 같이 있진 않았고, 내가 네 근처에 있긴 했지.”

근처에 있었을 뿐이라니.

내가 실망한 걸 눈치챈 건지, 기억을 떠올리려는 듯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던 에드윈이 이내 낮은 탄성을 뱉었다.


“아, 네가 신입이랑 얘기하는 건 봤어.”

“신입?”

“그래. 클라인이라고 했던가.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거야?”

“그렇다니까. 나한테 무슨 대답을 들려달라는데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아. 마치 그날 하루가 지워진 것처럼, 누구를 만났는지 뭘 했는지 모르겠어.”

“기억이 안 나면 직접 물어보지 그래? 솔직하게 말하면 이해해줄 거 같은데.”

“…….”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었다. 그냥 부딪치는 수밖에 없나.


‘잊으신 겁니까? 아니면 잊고 싶으신 겁니까?’

‘아니, 나는 그냥……. 없었던 일로 하고 싶은데?’

사실 전야제에 대한 기억이 없어서 둘러댔던 거다, 라고 말하면 믿어주기는 할까?


“네가 신입이랑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목격했지만, 나도 직접적으로 뭘 듣진 않았어.”

“대화를 나누는 표정은 어땠는데?”

“신입은 조금 긴장돼 보이는 얼굴이었고, 너는 비교적 덤덤해 보였어.”

“신입이 긴장하고 있었다고?”

고개를 가벼이 끄덕인 에드윈이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이번에도 고백이나 받았겠지.”

고백? 고백이라고?


“신입이 나한테?”

……그럴 리가 없는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