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로즈벨리아 윈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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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로즈벨리아 윈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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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로즈벨리아 윈터스
2023.02.02.
“이게 대체…….”
눈앞의 광경에 절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수련장은 텅 비어 있었고, 보관함에 들어가 있어야 할 수련용 목검은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축제 마지막 날이라고 했던가.
이곳으로 오기 전, 나는 한껏 들떠 있던 루카스와 마주쳤었다.
같이 광장에 나가자고 하기에 거절했지만, 기사단 내 분위기를 주도하는 루카스라면…….
“분명 여기저기 바람을 넣었겠지.”
안 봐도 훤히 그려지는 모습에 가벼운 두통이 일었다.
축제 마지막 날이라고 해도 그렇지. 대체 얼마나 급하게 끌고 나갔기에 이 꼴인 거야?
잇새로 억눌린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번 생에서는 남의 뒤처리 같은 건 하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이 꼴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순 없었다.
나는 손목에 매두었던 끈을 풀어 허리께에 닿는 금빛 머리칼을 질끈 묶었다.
이윽고 발치에 떨어져 있던 목검 위로 손을 뻗으려는 찰나였다.
“선배님.”
듣기 좋은 저음에 어깨가 움찔 떨렸다.
분명 처음 듣는 목소리인데, 이 불길한 예감은 뭐지?
“…….”
“선배님?”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몸을 돌리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린 내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나는 이 얼굴을 잘 알고 있다.
칠흑 같은 검은빛을 띠는 거 같다가도 언뜻 짙은 남색처럼 보이기도 하는, 마치 밤하늘을 가져다 놓은 것 같은 오묘한 색깔의 머리칼.
그 아래에 자리한 한층 밝은 빛깔을 띠는 벽안…….
그러니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남자는 내가 이전 생에서 읽은 책 속 남자 주인공이자, 시한부였던 원작 여주의 마음을 끝까지 받아주지 않았던 냉혈한에 전쟁광.
그리고 원작 속에서는 조연에 불과하지만 제국의 1검이라 칭송받던, 바로 이 몸의 주인공인 로즈벨리아와 싸우다가 죽는 폭군.
이안 클라인 마르티네스.
소설 중반부에 타국으로 망명했던 로즈벨리아는 폭군이 되어 전쟁을 일으키는 이안과 번번이 전쟁터에서 마주했고, 그녀 또한 이안과 싸우다 죽음을 맞이했다.
원작대로라면 나를 죽이고, 내가 죽이는 상대…….
그러니까 서로 개처럼 싸우다가 결국에는 둘 다 죽는 그런…….
원작 속 끔찍한 결말을 떠올리니 절로 숨이 턱 막혀왔다.
“……무슨 일이지?”
“정리는 제가 하겠습니다, 선배님.”
“그래, 그렇게 해.”
이안이 남은 목검을 줍기 시작하자, 나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와 거리감이 생기자 비로소 숨이 트였다.
침착하자. 내가 당장 이안을 죽일 것도, 이안이 나를 죽일 것도 아니잖아?
그래, 지금은 단순히 기사단 선후배 사이일 뿐이니까.
호흡을 가다듬고 나니, 홀로 묵묵히 수련장을 치우는 이안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슬금슬금 다가가 거들자 흘긋 돌아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안의 눈동자에는 의아한 기색이 담겨 있었다.
“…….”
“같이하면 더 빨리 끝나잖아.”
멋쩍은 탓에 퉁명스러운 말투가 튀어 나갔다. 이안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목검을 마저 주웠다.
이윽고 목검을 가득 품에 안은 이안이 다가오자, 나는 눈짓으로 보관함을 가리켰다.
키가 크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정말 크구나.
어디 그뿐이던가. 원작에는 탄탄한 체격에 조각과도 같은 이목구비에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눈동자가 뭇 여성의 가슴을 떨리게 만드는 외모라고 서술되어 있었다.
그저 남주 버프라고 생각했는데 그 서술이 오히려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로 이안의 외모는 훌륭했다.
나도 모르게 잠시 넋을 놓고 바라볼 정도로.
“생각은 해보셨습니까?”
“생각? 어떤…….”
사고의 흐름이 더뎌지는 게 느껴졌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시치미를 떼실 줄은 몰랐는데요.”
“어?”
낯빛을 집요하게 훑는 듯한 이안의 시선에 긴장감이 바짝 밀려들었다.
진짜 선배를 대하는 것처럼 태도는 공손한데,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묘하게 불손했다.
하기야 아무리 정체를 숨기려고 노력한들 황족 특유의 프라이드까지 온전히 감춰지진 않을 터였다.
폰네스 제국의 1황자인 이안이 정체를 숨기고 백색 기사단에 신입으로 들어갔다는 건 원작에서 이미 접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제 기억으로 선배님은 술에 취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이안이 불쑥 뱉은 말에 목울대가 움찔거렸다.
“취했을 수도 있지.”
“취해서 그날 일을 기억하지 못하신다고요?”
“그날이라면…….”
“전야제 말입니다.”
전야제?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입안이 바싹 말라왔다.
전야제라면, 축제 시작 전을 말하는 것일 터. 이곳의 축제는 3일간 열린다고 들었다.
오늘이 축제 마지막 날이니까 전야제라던 그날은 정확히 4일 전이었다.
나는 티 나지 않게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고작 4일 전 일이라지만, 내게는 그날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뭐라고 둘러대야 하지? 그날 취했었다고 끝까지 잡아떼야 하나?
“그……. 취해도 티가 잘 안 나는 사람이 있잖아?”
내가 애써 입꼬리를 올려 보이자, 이안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잊으신 겁니까? 아니면 잊고 싶으신 겁니까?”
“아니, 나는 그냥……. 없었던 일로 하고 싶은데?”
너무 솔직했나?
흔들리는 이안의 눈동자를 마주한 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저는 그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뭐?”
“그런 감각은 생전 처음이었습니다.”
“…….”
“찰나였지만 선배님과 호흡을 섞었던 그 순간이 잊히지 않습니다.”
뭐? 뭐를 섞어?
“저는 무를 생각 없습니다. 거절이어도 괜찮으니까 꼭 제대로 된 대답을 들려주십시오. 이런 식의 회피는 선배님답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대체 무슨 대답?
후배님? 아니, 원작 남주님? 저는 모르는 일인데요?
혀끝까지 차오른 말을 애써 참아내는 사이, 짧게 고개를 숙여 보인 이안이 수련장을 빠져나갔다.
나는 이안의 완전히 기척이 사라지고 나서야 머리를 감싸 쥐었다.
차분히 생각해 보자.
“그러니까 전야제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 같긴 한데…….”
머리로는 이해가 됐다. 문제는 이 세계에서 이 몸으로 눈을 뜬 게 고작 3일 전이라는 거였다.
달리 말하면 내게는 전야제의 기억이 없단 뜻이고.
원작 남주는 알지도 못하는 그날 일을 들먹이며 대답을 요구하고 있고.
나는 이미 망한 거 같고.
아니, 너희 원작에서 사이 안 좋았던 거 아니었어?
“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아가씨,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욕실에서 씻고 나오자 메이드 복장을 갖춰 입은 하녀가 다가와 물었다.
“가져다줄래?”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나는 방문이 닫히자마자 옅은 한숨을 흘렸다.
천천히 몸을 뒤로 눕히자, 부드러운 촉감과 묘하게 불편한 감각이 동시에 덮쳐왔다.
“어색한 게 당연…… 하잖아.”
나는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을 차분히 되새겼다. 그러니까 그날은…….
‘너도 이대로 사라지는 걸 원하니?’
그 목소리가 들려온 건, 내가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누워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였다.
다급하게 멀어지는 엔진 소리가 들려올 뿐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서 들려오는 소리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누군가의 목소리가 내게로 전해진다는 감각만이 선명했다.
‘너에게 제안을 하나 할까 하는데.’
고통에 몸부림치던 나는 슬며시 눈을 떴었다. 모든 것이 점멸한 것만 같던 그 암흑 속에서 찰나 어떠한 빛을 본 것 같았다.
‘네가 원했던 인생을 한번 살아 볼래?’
그다지 만족스러운 삶은 아니었다. 한때는 나 자신을 특별한 존재라고 믿고 살았고, 내 인생은 빛의 한복판에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오만한 착각이었다.
차례로 엄마와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부상으로 펜싱을 그만두어야 했을 때도 악착같이 견뎌냈던 나였다.
그저 아버지와 새어머니에게 인정받고 싶어 열심히 했을 뿐인데…….
그들에게 나는 그저 장기판 위 말에 불과했다는 걸 깨닫고 난 뒤, 내 인생은 그림자로 변주되었다.
어쩌면 실패한 인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럼에도 살고자 하는 욕망의 발로였던 걸까. 될 대로 되라면서도 내심 삶에 미련이 남았던 걸까.
나는 그 물음이 명확하게 무얼 뜻하는지 인식하기도 전에 안간힘을 다해 손바닥을 그러쥐었다.
‘그래, 대답은 그걸로 충분해.’
그 순간 따뜻한 기운이 내 몸을 휘감았다. 모든 아픔이 가시고, 눈을 떴을 땐 바로 이 세계였다.
내가 족히 수십 번은 읽었던 책 <그 겨울에 핀 꽃> 속의 세계.
원작 내용은 간단했다. 여자 주인공인 데이지가 남자 주인공인 이안을 짝사랑하는 이야기.
시한부인 데이지는 우연히 이안의 도움을 받아 그를 마음에 두었지만, 이안은 그런 데이지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사실 이안은 원작 속에서 데이지뿐만 아니라 어떤 여자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던 철벽남으로 유명했다.
황태자가 되었을 때도, 머지않아 황제의 자리에 올라섰을 때도 그의 옆자리는 늘 공석이었으니까.
원작은 데이지가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냉혈한 폭군인 이안을 계속 짝사랑하다가, 이안이 전쟁터에서 죽고 데이지까지 숨을 거두며 새드 엔딩을 맞이한다.
그래서 원작을 읽을 때, 나는 이안보다 데이지를 짝사랑하는 서브남인 에드윈을 응원했었다.
“내가 이 책 속에서 좋아했던 건 데이지, 에드윈, 그리고…….”
바로 이 몸의 주인공.
“로즈벨리아.”
잇새로 흘러나온 목소리가 새삼 익숙지 않아, 팔에 잔소름이 돋았다.
로즈벨리아 윈터스.
그녀는 원작 속에서 조연에 불과했지만, 세계관 내 최강자였다.
폰네스 제국의 백색 기사단에 있다가 돌연 레노르 왕국으로 망명해 그곳의 기사단장이 되고, 제국과 1년 가까이 이어진 전쟁에서 이안을 번번이 맞닥뜨리고 끝내 이안을 죽이는 인물.
그리고 로즈벨리아 또한 치명상을 입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둔다.
어디 그뿐이던가. 그녀는 윈터스 후작 가문의 영애이자 제국 내 최고 미인이라고 칭송받을 정도로 화려한 외모를 지닌 인물이기도 했다.
조연이지만 임팩트가 세서 결말을 읽고 난 뒤 처음부터 다시 읽으면서 로즈벨리아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정도였다.
특히나 백색 기사단의 여기사가 알고 보니 소드마스터였다는 게 알려지면서 폰네스 제국이 들썩거리는 부분은 읽을 때마다 소름이 돋는 구간이었다.
그리고 최근에 원작을 다시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조연인데도 이렇게나 임팩트 있는 삶이라면, 괜찮을 것도 같다고.
주연이라고 생각하고 살다가 뒤통수 맞는 것보다야 임팩트 있는 조연 쪽이 훨씬 멋있다고 생각했었다.
“그게 싸우기만 하다가 죽는 인물이 되고 싶단 뜻은 아니었는데…….”
로즈벨리아라는 인물에 대한 결말은 명확한데, 과정은 뚜렷하게 명시되지 않았다.
원작은 데이지의 1인칭 시점이었고, 로즈벨리아에 대한 언급 자체도 많지 않으니까.
만약 내가, 로즈벨리아와 다른 선택을 한다면…….
결말을 바꿀 수도 있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나도 모르게 손끝을 그러쥐는 사이, 트롤리 끄는 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아가씨, 식사 가져왔습니다.”
문밖에서 하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급히 몸을 일으켰다.
“들어와.”
가까이 다가오는 하녀는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 아이는 로즈벨리아의 전담 하녀인 앤이었다.
이 몸으로 눈을 뜬 지 고작 4일이 지난 내게는 분명 낯설어야 하는데.
“더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그래, 이제 나가봐도 좋아.”
“아가씨 곁에 있을게요. 주방장님이 아가씨 잘 드시는지 지켜보라고 하셨거든요.”
“감시가 아니라?”
내 짓궂은 물음에 앤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주방장님은 아가씨를 걱정하셔서…….”
“그래, 알아. 마크는 다 큰 나를 아직도 아이 취급하니까.”
물 흐르듯 대화가 이어지는 게 새삼 신기했다. 아는 척을 하는 게 아니라 나는 앤에 대해서도, 주방장 마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 눈을 뜨자마자 로즈벨리아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고, 마치 누군가 이정표를 가리키는 것처럼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로즈벨리아가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유년 시절, 검술에 두각을 나타내 제국 내 최정예부대인 백색 기사단에 입단하고, 최근에 신입으로 들어온 원작 남주 이안을 마주한 것까지.
내가 본 로즈벨리아의 기억은 딱 거기까지였다. 이곳에서 눈을 뜬 나는 하루를 꼬박 앓으면서 로즈벨리아의 기억을 모두 읽어냈다.
그 기억 덕분에 이곳에 적응하는 게 그다지 어렵진 않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배운 적도 없는데 절로 움직이는 손짓이나 몸짓 예법, 심지어 신의 경지에 오를 정도라고 칭송받았다던 로즈벨리아의 검술까지 마치 몸에 각인된 것처럼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마치 동기화된 것처럼 말이다.
문제는.
‘그런 감각은 생전 처음이었습니다.’
‘…….’
‘찰나였지만 선배님과 호흡을 섞었던 그 순간이 잊히지 않습니다.’
어제 이안이 한 말을 곱씹어 보던 내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원작이 시작되는 시점은 축제가 끝난 뒤였으니 지금은 원작이 시작되기 이전 시점이었다.
그런데 로즈벨리아와 이안 사이에 벌써 작은 해프닝이 생겼다?
어렴풋하게나마 원작의 일부분을 떠올린 나는 슬며시 포크를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윈터스 가문이 폐하께 단단히 밉보인 모양입니다.’
‘백색 기사단 차기 단장감으로 꼽히던 윈터스 가문의 장녀가 레노르 왕국으로 망명을 했잖습니까. 듣자 하니 폐하께서 직접 백색 기사단 단장직을 부탁하러 몇 차례 찾아갔다던데, 거절하고 왕국으로 건너가 기사단장이 됐다고 하니…….’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데이지가 아버지의 대화를 엿듣는 장면이었던가.
이안은 왕국과의 전쟁 중에 윈터스 가문을 멸문시켰다.
원작에서 로즈벨리아와 이안의 관계가 명확하게 묘사되진 않았지만, 나는 책을 읽으면서 둘 사이가 썩 돈독하진 않았을 거라고 유추했다.
그래서 이안과의 첫 단추를 잘 끼우려고 했는데.
‘이런 식의 회피는 선배님답지 않습니다.’
어째서 전야제에 대한 기억만 없는 거냐고!
“아가씨, 괜찮으세요?”
“아, 괜찮아. 잠깐 딴생각을 좀 하느라.”
“정말 괜찮은 거 맞으시죠?”
앤의 목소리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집안 사람들은 내가 하루를 꼬박 앓은 걸 큰일처럼 여겼다.
여태 사소한 잔병치레조차 하지 않던 로즈벨리아가 고열에 시달리며 앓았으니 호들갑 떨 만한 일이긴 하지.
“그래,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곤, 침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청록색 빛깔의 벽에 걸린 초상화들, 한쪽 벽면에 자리한 벽난로, 침대 앞에는 작지만 화려한 샹들리에가 자리하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금 테두리를 두른 창문 앞으로 다가섰다. 천장에서부터 바닥까지 닿는 길이의 창문이라, 근처에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햇살이 전신 위로 쏟아졌다.
금세 돌아선 나는 창문 옆에 자리한 긴 거울 앞에 섰다. 매끄러워 보이는 흰 피부에, 찬란한 빛을 닮은 금빛 머리칼, 그 아래로 자리한 옅은 녹색의 눈동자.
이전 삶에서도 예쁘단 소리는 꽤 듣고 살았지만, 로즈벨리아의 외모는 그 어떤 수식어로도 부족했다.
“……예쁘긴 진짜 예쁘네.”
중얼거림에 가까운 내 말에 앤이 즉각 반응했다.
“네? 뭐 시키실 일 있으세요?”
“아니야.”
이 세계에서 이 몸으로 눈을 뜬 지 4일이 지났는데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어차피 돌아갈 곳도 없거니와, 정말로 누군가 내게 기회를 준 거라면…….
“일단 사망 플래그부터 피해야…….”
“네?”
“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또 기사단에 가시려고요? 오늘은 안 가도 된다고 하셨잖아요. 아가씨 아직 몸도 다 회복하지 못하셨는데 무리하시면…….”
“기사단 가는 거 아니야. 잠깐 산책 다녀오려고.”
앤이 붙잡을세라 서둘러 침실을 빠져나왔다.
긴 복도를 지나 저택 내부를 둘러보던 나는 새삼 압도적인 스케일에 감탄했다.
윈터스 가문은 후작저인데 이렇게나 화려하다니. 게다가 이 벽화는 천장까지 그림이 이어져 있잖아?
벽화의 디테일에 홀린 내가 제자리에 잠시 멈춰 선 찰나였다.
“로즈벨리아?”
그저 이름이 불린 것뿐인데, 뺨에 오소소 소름이 일었다. 단숨에 몇 배로 예민해진 감각이 보내온 경고는 명확했다.
비교적 먼 미래인 사망 플래그보다 먼저 경계해야 할 건 이 사람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