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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내전 협상, 그 애피타이저 (151/151)


#151. 내전 협상, 그 애피타이저
2023.08.09.



 
제국의 항구 도시 토트웰.

정박한 선함 아래로 파도가 너울졌다. 흰 포말이 반짝이며 부서지는 가운데, 항구 도시 특유의 쾌활한 고함과 바닷물의 짠 내가 공기 속에 넘실거렸다.


“……동맹국이라니 말만 번지르르하지. 진짜 말문이 막힐 정도로 무례하군.”

“그러게 말입니다. 제국은 우리와의 전쟁이 얼마 전에 끝난 것도 까먹은 모양입니다. 어떻게 내전에서 동맹이 되어 달라고 우리를 부른답니까?”

낮춘 목소리 사이에서 참을 수 없는 불평이 터져 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헤페르티의 키월 공작은 제 외알 안경을 한 번 추켜올렸다. 그는 선박의 수하물을 내리는 선원들과 유람선을 타는 귀족들의 왁자지껄한 소리 너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화려한 색감의 옷들 사이로 곱슬거리는 화사한 금발이 찰랑이는 게 보일 때마다, 키월 공작의 머릿속에는 악귀 같은 여자 한 명이 번뜩 떠올랐다.


“……거짓말! 황녀의 말은 모두 거짓이에요!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제가 연회 때 약혼식을 치르려 했겠……!”

 
흰 얼굴과 입가의 붉은 피, 흐느끼듯 오싹한 웃음소리와 인형의 것처럼 번뜩이는 푸른 눈동자까지.

그 짧은 사이에 소름이 돋았다. 키월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황녀의 거짓을 까발린 대가로 오슬란의 중간 귀족과 혼인을 했다던 그녀가 제국에 있을 리 만무했다. 무엇보다 초대장에 적힌 동맹국에는 오슬란 왕국이 빠져 있었…….

키월 공작은 순간 멈칫했다.

비록 초대받지는 못했지만, 제국에 친밀한 귀족들을 통해서라면 오슬란 왕국에도 얼마든지 이야기는 전해졌을 거다.

저만 해도, 헤페르티를 떠나기 전 비칸데르 대공에게 귀띔하는 편지를 보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그녀가 제국에 왔단 말일까?


“초대에 응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생각에 너무 빠진 모양이었다.

지난 패전 협상 때 안면이 익은 남자가 다가와 조용히 인사를 건넸다.

태자의 옆에 있었던 보좌관, 하지스 백작이라 했나. 뒤따라오는 행렬 또한 단출했다. 제국의 요청으로 방문한 사절단 맞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키월 공작의 눈치가 보였는지 백작은 묵례를 하며 강조에 강조를 거듭했다.


“조용히 모실 수밖에 없는 상황에 양해해 주시어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누군가 불만 어린 눈초리로 키월 공작을 바라보았다. 대신 자국의 입장을 말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은 묵과한 채, 공작은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협상이 언제라 했죠?”

“급하지만, 여독을 푼 뒤 모레의 오전으로 정했습니다. 아직 몇 나라가 도착 전이기도 해서 말이죠.”

“그거참…….”

기대되네요.

하지스 백작은 그의 뒷말을 못 들은 것처럼 되물었다. 하지만 키월 공작은 비웃음을 삼키며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외알 안경 너머 그의 눈이 차게 식었다.

뻔뻔스럽기도 하지.

제 나라 헤페르티를 짓밟고서는, 동맹국이라는 말 아래에서 전쟁을 한다고 사절단을 요청하다니.

비웃음도 안 나오는 일에 응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제가 미리 연락을 보낸 비칸데르 대공이 지난번처럼 황궁을 뒤엎어 주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리고 방금, 어쩌다 보니 제 기대가 하나 더 늘어났지만 말이다.

* * *

동맹국들의 사절단은 속속들이 제도에 도착했다.

레오포드는 입꼬리에 비뚜름한 웃음을 문 채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황궁 정원을 도는 마차 행렬이 길었다.

오슬란 왕국을 제외하고도 즉답과 동시에 사절단을 보낸 제국의 우방국은 총 열두 나라였다.


“준비는 어디까지 되었느냐.”

황제의 백발은 마법으로 다시 금발이 되었다. 하지만 공주의 초상화가 불에 탄 뒤 황제는 순식간에 노인이라도 듯 노쇠한 모습을 보였다.

레오포드는 그런 황제가 우스웠다. 황제가 올리비아를 탐내던 얼굴은 레오포드의 기억 속에서 생생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황제의 대접을 하는 건, 제가 계승받을 황좌의 위엄 때문이었다.

레오포드는 냉담한 눈으로 대답했다.


“폐하. 준비랄 게 어디 있겠습니까. 늘 하던 대로, 제도는 모든 상황에 완비된 상태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황제는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자의 말대로였다. 제도는 평상시와 다를 바 하나도 없었다.

황녀 궁 부근에서는 다시 작은 티 파티가 열렸고, 황후는 엘킨 공작에 대한 걱정을 떨쳐 낸 것처럼 사교계 생활을 시작했다.

귀족 회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황제는 침음을 흘렸다.

늘 대공한테 공이 쏠리는 게 아쉽다며 자신들도 잘할 수 있다 목소리만 높였던 귀족들이 정말로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기는 하단 말인가?

분명 태자는 괜찮은 재목이다. 수려한 외모로 사람들의 호감을 사로잡으며 자존심도 강하고, 말로서 귀족을 움직일 줄 알고 자신감도 가득하다.

그래서…….


“……대공은 쉽지 않은 놈이다. 각별히, 또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황제는 거듭 당부했다.

태자는 온전한 실패를 겪어 본 적이 없다. 참전의 경험은 대공과 비교해 볼 수도 없고, 저처럼 사랑하는 여자를 잃었다는 상실감 따위도, 연적을 죽이기 위해 수를 써 본 일도 없다.

황제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레오포드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새파란 눈동자는 오만에 가득 찬 채 희망으로 반짝였다. 레오포드는 제도에서 일어나는 전부를 알고 있었으니까.

오델프 자작이 사생아가 아닌 자신의 친자식을 급히 5기사단의 견습 기사로 넣었다는 것부터 코모데 백작이 용병을 사들여 기사단에 힘을 보태느라 무리하게 채권을 발행했다는 것까지.

심지어 제도의 안정을 부풀려 보이기 위해 쓸모없는 황녀에게 티 파티라도 열라고 명령한 게 저였다. 어머니 황후가 사교계 모임을 지속하도록 강권한 것도 마찬가지고.

제도의 모든 소식은 그의 손바닥 위에 있었다. 마델레이네 공작을 제외한 제도의 귀족 모두가 어떻게 해야 전후 배상에서 자신의 지분을 높일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게 훤히 보였다.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마델레이네 공작이 내심 걸리기는 했지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수세에서 황궁은 완벽하게 우세했다.

그러니…….


“……예. 폐하. 폐하께서도 내일 있을 동맹국의 전쟁 참여 촉구에만 좀 더 신경을 기울여 주십시오.”

승리는 당연하게 거머쥘 제 것이었다. 레오포드는 달콤한 내일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협상의 날.

대회의장은 제도의 고위 귀족들과 열두 개국의 사절단 인원으로 가득 찼다.

황제의 입장과 동시에 조용해진 대회의장에 엄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국의 귀족들, 그리고 먼 길을 마다 않고 한걸음에 와 준 동맹국의 사절단 대표들. 내 이 자리를 그대들에 대한 감사로 시작하고 싶소.”

의례적인 인사가 이어지는 사이, 레오포드는 민첩하게 대회의장을 훑어보았다. 제국의 기둥인 마델레이네, 엘킨 두 공작의 자리가 비어 있기는 했지만, 그 외에는 다 레오포드를 지지하는 귀족들이었다.

레오포드는 완벽하게 통제된 이 상황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문을 지키고 있던 하지스 백작이 사색이 된 채 달려오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전하, 오슬란에서 일부러 보냈는지 사절단이 왔답니다. 그런데…….”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하지스 백작이 입술만 달싹였다. 레오포드는 입매를 굳혔다. 짜증과 조소가 동시에 일었다.

초대도 받지 않은 동맹국이 먼저 사절단을 보내다니.

굳건한 동맹의 왕국 중 홀로 초대받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급할 만하지. 레오포드는 문가를 향해 턱짓했다.

그리고 하지스 백작이 말리기도 전에 시종은 조용해진 틈을 찾아 우렁차게 외쳤다.


“오슬란 왕국의 사절단 입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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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큰 태양, 작은 태양께 경배를. 오슬란의 신하, 앤서입니다. 저희가 제일 늦게 도착하는 무례를 범했습니다. 송구합니다.”

초대하지 않은 오슬란의 사절단이 선물까지 가지고 왔다. 그것도 다른 동맹국이 다 온 뒤늦게.

황제는 제법 긴 오슬란의 행렬을 보며 적당히 응대했다.


“이렇게나마 참석했으니 되었지. 선물이라니. 협상을 제안한 건 제국인데, 고맙군.”

“제국의 큰 태양, 작은 태양께 경배를. 두 분의 격조에는 미치지 못할 선물이니 괘념치 마시옵소서.”

교태 어린 목소리가 어쩐지 익숙했다. 사절단의 후미에 선물을 들고 서 있던 여인이 천천히 선두로 나왔다.

설마 그럴 리가……. 헛웃음을 짓던 레오포드가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그는 경직된 얼굴을 숨길 수 없었다. 제 눈을 의심하기에도 급급했다.

두르고 있던 오슬란 식 숄과 모자를 집어 던진 여인은…….


“마리아 테필스, 오슬란 왕국의 사절단 일원으로 제도를 밟았습니다.”

 

 
대회의장은 얼어붙기라도 한 것처럼 조용해졌다. 제도의 귀족들은 물론 타국의 사절단 역시 그녀를 알아본 듯 눈만 끔뻑였다.

마리아 테필스, 전 에텔 영애인 마리아는 고혹적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사절단의 일원이자 한때 제국에 충성을 바쳤던 제게, 저희 오슬란의 왕께서 꼭 전달하라는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옥구슬 굴러가듯 청아한 목소리가 대회의장을 울렸다. 마리아는 천진하게 웃으며 황제를, 그리고 레오포드를 바라보았다.

잘생긴 미간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탐색하듯 저를 바라보는 새파란 눈동자를 보자, 마리아는 마음이 울렁거렸다.

그녀는 고작, 저를 버릴 때처럼 굳은 얼굴을 보고자 여기까지 온 게 아니었다.


“동맹국을 향한 초대 중 오슬란만을 빼놓다니, 아주 섭섭하시다고요. 설마…….”

마리아는 붉은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리고 설마 하듯 눈을 커다랗게 깜빡였다. 의도적으로 스스로를 가리키며 안타깝다는 듯 혀까지 차며, 마리아가 중얼거렸다.


“아직도 저에 대한 마음이 남은 건 아니시겠죠. 전하?

그 말에 잘난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잘생긴 입매가 딱딱하게 굳고, 새파란 눈동자가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일렁이는 지금 이 순간.

오싹하리만큼 통쾌한 전율이 마리아를 타고 내렸다.

저 얼굴을 얼마나 상상했는지 모른다. 저를 버린 태자가 서서히 무너지길, 얼마나 기도했는지 이 자리의 모두는 아마 상상하지도 못할 거다.

무턱대고 제가 올리비아의 제안을 받아들일 정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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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필스 부인은 잠시 나가 있게. 협상이라고는 하나도 못 알아들어 지루할 테니 말이야.”

“생각해 주신 것은 감사하나, 잠시간 제국의 여름 연회를 준비한 적도 있는 것을요.”

“감히 그때의 일을……!”

황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생긋 웃는 마리아는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아마 이 자리에서 그날의 저를 잊은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저 외알 안경의 키월 공작만 해도 저를 보고 웃고 있었으니까.

이쯤 하면, 판은 충분히 깔린 것이다. 태자가 당황하고, 황제가 분노한 지금.


“그나저나 무슨 중요한 안건을 꺼내려 하시기에, 제국의 동맹국과 고위 귀족이 모두 자리하는 회의에 정작 제국의 주요한 이들을 빠뜨리셨나요?”

오슬란에 보내진 직후 마리아가 하나 깨달은 게 있다면, 그건 이제 더 이상 잃을 게 없다는 제 처지였다.


“엘킨 공작님도, 마델레이네 공작님도 안 계신 협상이라니. 재밌네요.”

태자의 연인에서 고작 왕국, 그것도 중간 귀족의 부인 자리. 볼품없고 가난한 자리에 내려 앉혀졌을 때 마리아는 왕성한 제 탐욕을 느꼈다.

그 탐욕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하던 와중에 떠오른 건 우습게도 한때 저를 비참하게 만들었던 올리비아의 목소리였다.


“정부가 되고 싶나요?”

 
마리아는 은밀히 입술을 비틀었다. 때를 맞추어 창문 너머로 그녀가 보였다.


“어머나. 저보다 늦게 오시는 분이 있다니.”

교태 섞인 중얼거림은 연극을 하는 배우처럼 이목을 끌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마리아는 창문을 반쯤 가린 커튼을 직접 걷어 내며 환하게 웃었다.

정원을 걸어오는 검은 머리의 대공과 은발의 올리비아. 절도 있는 기사들이 그 뒤를 따름에도, 대공과 올리비아는 빛이 났다.

하지만 지금 마리아가 바라보아야 할 이는 저들이 아니었다. 이 연극에서 관심조차 받지 못할 남자.

가장자리로 밀려나는 비참함을 겪었던 이로서, 그녀는 앞으로 밀려날 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제 모든 악의를 담아 활짝 웃었다.


“……마치 주인공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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