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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흔들리는 판도와 전쟁의 서막 (2) (150/151)


#150. 흔들리는 판도와 전쟁의 서막 (2)
2023.08.06.



“……납치라면, 올리비아가 황궁에 없다는 뜻인가.”

공작의 말을 듣는 순간, 디안은 저도 모르게 제 두 손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한 번도 믿어 본 적 없는 신을 찾으며 감사했다.

아가씨는 무사하시다.

베서니 님과 함께 무사히 황궁을 빠져나간 게 틀림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당장이라도 약혼을 하겠다 설레발을 치던 태자가 ‘납치’라는 단어까지 사용하며 전쟁을 모의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기대감이 물씬 피어올랐다.

게다가 황궁에서 ‘납치’를 언급할 만큼 누군가 강한 힘으로 들이닥쳤다면 이미 제이드 마델레이네는 황궁을 지키러 나갔어야 했다. 역시 아가씨께서는 안전히 자력으로 빠져나가셨을 거다.

그렇다면 아가씨와 베서니 님이 향할 곳은 한 곳이었다.

비칸데르 대공령.


“실례 많았습니다.”

윈스터가 정중히 말했다. 건조한 음성에 미미하게 흥분이 감돌았다.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한 듯, 하워드까지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문양 없는 하인복과 말 세 필만 내어주시겠습니까? 대공가의 명예를 걸고 이 일은 곱절 그 이상으로 보답하겠습,”

“올리비아는! 더 이상 찾지 않는 건가?”

불안정하게 떨리는 고함이 윈스터의 말을 잘랐다. 제이드 마델레이네였다. 입술만 뻐끔거리던 금붕어 같은 놈의 얼굴에 순식간에 괴로움과 초조함이 스쳐 지나갔다.


“올리비아와 함께 비칸데르령으로 돌아가고 싶다 내게 애원해 놓고서. 그 애에게 맹세까지 했다는 놈들이!”

“어디로 갔는지 대략 짐작이 가니 그만 떠난다고 하는 겁니다. 마델레이네 경.”

“거기가 어딘가!”

지오반니는 제 입에서 이렇게 애타는 소리가 나올 줄 몰랐다. 하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은 윈스터 칼터는 대답 대신 느릿하게 웃었다.

침묵은 버겁도록 무거웠다. 억겁 같은 수초가 흐르고 나서야 윈스터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다시 한번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님. 하지만 아가씨의 행방을 밝힐 수는 없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래도 아가씨께서 안전히 비칸데르 성에 돌아오셨음은 곧 알려 드리겠습니다. 어쨌거나…….”

윈스터는 말끝을 끌며 침실 한쪽을 바라보았다. 마델레이네 공작가의 문양 위에 쳐진 휘장은 금색과 남색, 황궁의 상징이었다.

누군가 탁음을 흘리는 사이, 윈스터는 양해를 구한다는 얼굴로 다시 공작을 바라보았다.


“……감사의 인사를 전하러 공작가로 오든, 그 되지도 않는 동맹 회담을 엎어 버리기 위해서든. 무엇이 먼저일지는 모르겠지만 곧 제도를 다시 밟게 될 것 같으니 말입니다.”

“그럼 지금은 제도를 나가겠다고? 감시자들이 이제야 떠났는데 성문이라고 안전할 것 같나?”

“비밀리에 동맹국들의 사절단이 입궁할 것과 전쟁도 준비하는 와중인데 아무리 황실이라 해도 우리까지 신경 쓸 여력이야 있겠습니까?”

제이드의 반박에도 윈스터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눈썹을 까딱였다.

더 이상 질문은 받지 않겠다는 명확한 의도를 전달한 후, 윈스터는 소파를 바라보았다. 이 분위기와는 동떨어진 듯 숨어 있는 위르겐은 간밤 사이 제법 회복된 것처럼 보였다.

시선을 받은 위르겐은 엄살을 떨며 일어났다. 아직 온몸이 쑤셨지만, 그는 이해관계가 철저했다.


“아이고, 압니다. 저도 제 목숨값은 해야죠. 뭐부터 필요하십니까?”

제국의 편에 설 법한 동맹국과 도착까지 걸리는 기간, 그리고 협상 날짜까지.

하지만 윈스터는 대답 대신 마델레이네 공작을 향해 가볍게 묵례했다. 디안과 하워드도 마찬가지였다. 도움을 받았다고 해서 공작이 계속 입을 다물어 줄 거라고 믿지 않았다.

그때였다.


“……오슬란을 제외하고 제국의 동맹국 전부에 사절단을 요청했을 겁니다.”

윈스터를 비롯한 기사들은 걸음을 멈췄다.


“사절단이 오기까지는 대략 사흘에서 나흘 정도가 걸리니, 동맹군 요청 협상은 닷새 뒤로 잡는 게 보통입니다. 그 외 더 필요한 게 있다면…….”

소공작이 줄줄 읊는 건 윈스터가 꼭 필요로 하던 정보였다.

당혹스러웠다. 언제고 황제와 황궁만을 바라보고 살던 공작과 소공작이. 어쩌면 당장이라도 적군이 될 수 있는 저희에게 필요 이상의 선의를 베풀고 있었다.

정말 아가씨 때문이라면, 믿어도 되는 정보다. 윈스터는 해답을 바라듯 빤한 눈으로 공작을 바라보았다.


“……대공가의 명예를 걸고 곱절로 보답하겠다 말했지.”

지오반니 마델레이네는 이 순간 평생토록 들어온 제 목소리가 낯설었다. 어쩌면 평생을 지고 있던 무게 대신 새로운 무게를 지기로 결심해서인지도 몰랐다.

그는 느리게 입매를 올려 보았다. 그리고 가문의 문양을, 그 위에 자리한 금색과 남색의 휘장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제국의 두 기둥 중 한 명. 언제나 위엄을 갖추고 마델레이네의 긍지와 명예를 위해 달려왔던 자신. 그리고 그런 마델레이네가 충성했던, 위엄 있는 프란츠.

평생토록 제가 단단히 묶어 두고 싶었던 긍지는 사실 저 휘장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제이드와 함께 동행하게.”

제 품에 있는 가족. 마델레이네를 지킬 수 있는 힘. 감히 제국에 반한다 하더라도, 그 안에는…….


“적어도, 그 애가…… 무사한 것까지는 보고 공작가로 돌아올 수 있게 해 주게.”

올리비아, 그 애가 있었으면 했다.

마델레이네 공작은 흐릿하게 웃으며 비칸데르의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쐐기를 박듯 당부했다.


“그게 곱절, 그 이상의 보답이 될 테니.”

 

* * *

힘차게 흙바닥을 달리는 말발굽 소리가 겹쳐 울렸다.

윈스터는 이를 악물었다. 마델레이네 공작가에서 진통제를 먹었다 하지만 말이 달릴 때마다 몸 전체가 울리는 통증은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이제 겨우 카탕타 부근이었다. 쉬지 않고 달려야 간신히 내일모레 새벽에나 대공령에 도착할 것이다.

뿌옇게 이는 흙먼지 사이로 윈스터는 끊임없이 할 일들을 떠올렸다.

아가씨의 모습을 확인한 뒤, 바로 제 옆에서 달리는 제이드 마델레이네를 제도로 보내고. 그다음에 출정을 한다면…….


“다들 멈추십시오!”

디안의 고함에 윈스터는 고삐를 당겼다. 갑작스러운 정지였지만 노련한 기사의 손길에 말은 금세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윈스터와 하워드, 그리고 제이드까지 곧바로 말에서 내리며 주변을 경계했다.

하지만 정작 멈추라 한 디안은 말 위에서 입술을 달싹였다. 윈스터는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저, 그게……. 카탕타로 가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끝이 올라간 물음에 순간 윈스터는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디안은 오히려 스스로의 물음에 확신을 얻었다는 듯 강하게 다시 말했다.


“카탕타로 가야 합니다. 지금 저기에…….”

분명 세누아의 계곡에서 느꼈던 힘이다. 아가씨가 절벽 아래로 떨어진 뒤 느껴졌던, 우호적이고 정순한 기운. 그 느낌이 지금 디안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아가씨께서 계십니다! 아가씨가 아니시라면 베서니 님이 저희를 기다리고 계세요!”

“그게 무슨 말이야!”

제이드가 왈칵 화를 냈다. 그러나 디안은 제이드는 쳐다도 보지 않은 채 서둘러 고삐를 틀며 외쳤다.


“설명은 가서 해 드리겠습니다. 빨리, 빨리 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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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네 공작과 마델레이네 경의 도움을 받아 공작저에서 밤을 묵었습니다. 그래서 카탕타 자작령까지는 마델레이네 경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으로 출발하면서 자작저에 따돌리고 왔지만요.”

반짝거리는 갱도 위로 제 목소리가 퍼져 나갔다. 보고를 하는 와중에도 화려한 빛이 계속 윈스터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제 앞에 있는 대공도 아가씨도, 베서니마저도 모두 비현실인 것처럼 빙그레 웃고 있었다.

모든 것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역시. 디안이면 느낄 줄 알았어. 아까도 태자 측에서 사람을 보낸 터에 아예 기운을 흩뿌렸……! 아니지. 우선 둘 다 치유부터 하고 가자.”

 
정말 카탕타 자작저에는 베서니가 있었다. 기운을 흩뿌리다니, 알 수 없는 말을 한 베서니는 이내 윈스터와 하워드에게 치유 마법부터 시전했다.

윈스터는 베서니의 마법 능력을 잘 알았다. 간단한 치유나 화려한 불꽃, 적당한 무게를 공중에 띄우는 정도. 그래서 베서니가 마법을 시전했을 때 그를 말렸다. 베서니라면 힘에 부칠 때까지 저희를 치유하려 할 테니까.

하지만 치유는 수초 내에 끝났다. 믿을 수 없었다. 아가씨의 손목에 든 멍도 제법 오랫동안 치유해야 했던 베서니는 조금 웃었다.


“이제 가면서 얘기하자. 카탕타에서 광산까지는 조금 머니까, 마차를 이용하자고.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셔.”

 
그 안에서 베서니는 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했다.

제한이 없어진 것처럼 강해진 베서니의 마법도, 오로지 로웰의 유물이라 되찾고 싶었던 백수정 광산의 진면목도, 살아 돌아오셨다는 선대 대공 전하의 이야기도.

그렇게 광산까지 가는 하루하고도 반나절.

베서니의 마법을 직접 보았는데도, 살아 돌아오셨다는 선대 대공 전하의 이야기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러자 디안이 수십 번이나 동의하며 로웰의 사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사제. 그 단어 하나에 윈스터는 번뜩 제 본분을 생각했다.

아가씨의 어머니가 할머니를 부를 때 사제, 라고 했다고 했지.

어마어마한 일들 속에서도 윈스터는 애써 중심을 잡으려 했다. 그래서 겉보기엔 여느 날과 다름없는 광산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 반짝이는 광산 안에 대공과 아가씨가 저를 보고 묽게 웃을 때.

윈스터는 보고부터 시작했다. 그게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스스로가 자신을 유지하는 법이었으니까.

하워드가 시뻘게진 눈을 할 때에도, 디안이 울음을 삼킬 때도 저는 비칸데르의 기사로서 제가 알아낸 것부터 고해야 했다.

모든 게 현실로 와 닿기 시작한 것은 보고의 중반쯤으로 흘러갔을 때였다.

결계 마법이 풀린 뒤 방문하기 시작한 갱도의 번쩍임이 낯설었고, 온화하게 살랑이는 바람이 다정했다. 믿음직하게 웃고 있는 베서니가, 애틋하게 저를 바라보는 아가씨가…….

무엇보다도…….


“황궁 가기 싫다.”


“……생각해 보니 가기 싫으시긴 하시겠어요.”


“그래도 예전만큼은 아니야.”


“그럼요. 이제는 저희도 다 준비되었지 않습니까. 대공가가 얼마나 튼튼해졌습니까. 선대 대공비 전하의 백수정 광산만 돌려받는다면 전하께서 바라시는 대로 뭐든 행해질 것입니다.”

 
느른하게 웃고 있는 붉은 눈과 마주치는 순간, 습관처럼 나누던 농담들이 떠올랐다.

정말로 왔다. 광산의 소유자가 아가씨라는 게 알려졌을 때부터 짐작했던, ‘뭐든 행해질 수 있는 날’의 시작이 바로 오늘이었다.

묽어지는 시야와 달리 입술 끝은 자꾸만 올라갔다.

하지만 아직 보고는 끝나지 않았다.


“마델레이네 소공작의 정보를 통해 제국과의 우호 동맹국 중 마리아 에텔 영애가 왕자의 정부가 된 오슬란 왕국을 제외한 전 동맹국에 전쟁 협상에 참석 요청을 보냈다 들었습니다.”

“…….”

“협상은 닷새 뒤에 진행될 예정이며, 전면전으로 들어선다 해도 출정과 동시에…….”

순간 온화하기만 하던 마석 광산의 바람이 멈추었다. 오소소 소름마저 돋을 정도로 숨죽인 바람 사이로 윈스터의 목소리가 낮게 퍼졌다.


“……승패를 결정지을 수 있습니다.”

지독하게 켜켜이 쌓인 증오와 울분. 갈색 눈 아래에서 시뻘겋게 올라오는 감정을 바라보며 에드윈은 제 기사들을 향해 걸어갔다.


“승패를 결정지을 수 있다는 단언도 기쁘지만…….”

베서니의 치유 마법 덕에 말끔해진 세 사람. 하지만 에드윈은 그들이 겪었을 고초를 알았다. 길게는 십여 년간, 짧게는 오 년간. 함께 황제에게 목줄이 매인 채 전장을 맴돌며 다쳐 왔던 세월들이 순식간에 펼쳐졌다 사라졌다.

그래서 에드윈은 두 팔을 벌리고 느릿하게 웃었다.


“……지금은 잠시라도 내 기사들의 무사 귀환부터 만끽해야지.”

 

 
떨리는 숨소리가 갱도의 벽에 부딪혔다 사라졌다.


“고생 많았어.”

담백하게 떨어지는 한마디에 헤아릴 수 없는 감정들이 꼭꼭 눌러 담겨 있었다. 기사들은 입술을 깨물며 말없이 대공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내 마석의 반짝임과 함께 대공의 말이 이어졌다.


“이 모든 일을 위한 축배는, 출정이 끝난 뒤. 아주 성대하게 치를 거야.”

 

.
.
.

하지만 그날 밤, 달이 가장 높이 떴을 때.

비칸데르의 기사들은 출정 대신 대공성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대공성의 모두가 잠에 들지 못하는 밤은 길었다.

출정식에서 선대 대공이 했던 한마디 때문이었다.

위풍당당한 비칸데르의 기사들의 분노를 더 불태우고, 동시에 한마음으로 기다려 온 출정 시간을 조금 더 기다리게 했던 선대 대공의 말.


“전쟁 이전에, 선행되었으면 하는 게 있다. ……면 한다.”

 
그 말은 들은 직후, 에드윈은 선대 대공한테 독대를 청했다. 그리고 이제까지 나오지 않았다. 올리비아는 혼자 선대 대공의 말을 곱씹었다. 그러다 문득 디안이 했던 말도 떠올렸다.


“……허락해 주신다면, 카탕타 자작저에 사람을 보내려고 합니다. 제이드 마델레이네 경은 아마 가지 않고, 아가씨의 안전을 확인하려 할 테니까요.”

 
입안이 어석거렸다. 밤을 새우는 중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전 같으면 믿지 않았을 말들이 아주 조금 믿기기 때문인지 올리비아로서는 알 수 없었다.

밤이 가장 어두운 시간은 지났다. 어느 순간, 지평선 너머에서 여명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밤은 길었지만, 그만큼 아침은 더 밝았다.

그리고 결국 긴 대화 끝에, 에드윈은 선대 대공의 말에 따르기로 뜻을 정했다. 그건 올리비아도, 베서니도, 대공성의 모두가 예측한 결말이었다.

그날 아침, 견고한 대공성을 빠져나가는 건 오슬란 왕국으로 보내는 편지를 실은 마차 한 대뿐이었다.


“내가 십여 년간 겪어 봐서 아는데, 나만 빼고 뭐 하는 거. 아주 기분이 나쁘거든요.”

그 마차를 바라보면서 에드윈이 한마디 덧붙였다.


“……어쩌다 한 번 날 끼워 줄 때마다 뒤집어엎고 싶을 정도로.”

악당처럼 올라간 입꼬리를 보며, 올리비아는 속으로 웃었다. 편지의 수신자 역시 분명 그런 마음일 거라고 장담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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